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 - 씩씩한 실패를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드는 모험
김수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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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문득 '자유'의 사전적 의미가 궁금해서 네이버 사전을 뒤졌다.

스스로 자 自, 말미암을 유 由. 스스로, 저절로, 자연히 사물이나 현상의 원인이나 이유나 결과가 되는 것.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법률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자유를 누리다. 모든 이들이 주체가 될 수 있어 주어가 생략된 이 문장은, 여전히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나는 진정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자유라는 화려한 겉피로 그저 대면하기 주저하는 현실을 회피하며 살고 있는가. 후자라고 스스로를 칭하면서도 이 상태에서 과감하게 벗어나기란 너무 어려운 것이다.

'부유한' 상태에 있는 내게, 김수민 SBS 전 아나운서의 '도망치는 게 어때서'는 '나이스 타이밍'으로 다가온 책이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씩씩하고 맑은 영혼으로 하루하루를 모험하며 살아가는 여정을 그려내는 그의 첫 에세이다.

표지 디자인도 인상적이다. 저자로 추정되는 단발머리 여성의 일러스트가 서로 손을 맞잡고 흐르는 강물과 날아가는 새들과 시시각각 다른 기세를 보이는 산을 응시하고 있다. 인간의 세계와 상관없이 저만의 흐름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자연과 같은 삶을 지향하자는 메시지일까. 궁금해진다.

'씩씩한 실패를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드는 모험'이라는 표제 옆 소제목은 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다. 저자는 '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자고 본인의 경험을 빗대며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한다. 각자 먹고사는 문제로 바쁘다보니 내 감정에, 기호에, 시간에 충실할 사람이 몇이냐 되겠냐만 나다움을 추구하는 저자는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욕망하며, 가능성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기에. 과감하게 멈추고, 방향을 틀어 도전하는 저자의 포부와 결심은 더 큰 차원의 내가 되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 용기는 문학을 통한 깨달음과 자기 확신에서 기인한다.


본인의 처지나 직업 등 타인보다 나아 보이는 구석을 핑계 삼아 사회의 암묵적인 '틀'에 갇히길 거부하는 사람. 한국인이 추구하는 기능주의적 쓸모를 비판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잘 살아가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 마냥 긍정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백퍼센트 부정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세상을, 소망을 충실하게 느끼고 실현하며 살아가는 사람.

또래의 청년들보다 단단한 저자의 결심은 저자가 느꼈던 좌절이나 실패와도 무관하지 않다. 실패에 대한 관념도 한국 주류 사회의 담론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실패를 회피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실패라고 규정하는 행위들을 섣불리 낙인하지 않았다. 쓸모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끊임없이 주입받는 사회에서, 실패는 빈도가 잦을수록 우리를 위축되게 만든다. 충분히 해낼 일도 감당하기 벅차게 된다. 그러나 저자에게 실패란 '가는 길목마다 발에 채이듯' 흔하다. 무슨 행위든 성취하기 위해 크고 작은 실패는 반드시 경험한다. 그러니 '실패'에 호들갑이나 우울 같은 필요 이상의 감정을 지나치게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니네.'라는 마인드가 핵심이다. 오히려 실패에 더욱 씩씩해지자고 독려한다. 보다 당차고 명랑하게, 사회가 부여한 실패의 낙인에 저항하고 당도한 실패에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것을 발판 삼아 더 큰 도전을 기꺼이 감행한다.


책에서는 한예종을 다니던 저자가 '끌림'으로 아나운서를 준비하고, 학업과 취준을 병행하며 1년도 안 되어 아나운서에 합격한 기적의 이야기도 나오고, 입사 1년차부터 다른 직업을 찾아보다 3년차에 기어코 퇴사를 결심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 모든 인생 여정이 한 사람의 것이라는 게 사뭇 놀랍다. 신입사원 나이가 30을 넘기는 취업난 시대, 모두가 취준으로 고통받는 시기에 자발적 퇴사를 실현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차선이 없다면 대책없는 미친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쏘아 붙였을 듯싶다. 주변에서도 한사코 말렸겠지. 괜찮겠냐는 시선과 염려를 뿌리치고 '다양한' 가능성을 믿으며, 변화를 통해 '책임'지기로 용기를 낸 저자가, 당당한 태도가 절로 존경스럽다.


이 책은 나를 새롭게 되돌아보고 미래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꿈도 성향도 적성도 방향도 잃고 방황 중인 나는 '배워가는' 단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이런저런 알바 자리를 찾아보고 있는데, 대구 특성인지는 몰라도 애매한 시간대의 초단기근로가 많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꺼려진다. 아니면 인턴이라도 해볼까. 저번에 지원하려던 일자리는 자소서를 제대로 쓰지 못해 놓쳐버려 두고두고 아쉬웠었다. 일단 뭐든 하는 것이 있어야 남는 것이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DO IT'의 마음가짐이 필요한 듯하다. 이번 주는 별 거 없는 자기소개서를 잘 다듬어 봐야겠다.

돈이 나를 정의하진 않고 그래도 안 되겠지만, 재화가 없으니 기본적인 생존이 위협받음을 체감한다. 나의 기호를 충족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나보다도 생산성 있는 재화를 쌓아야 한다.

나를 폄하하지 않고, 늦더라도 방향을 잘 잡고, 휘발되지 않는 깊이를 갖추려 부단히 노력하는 삶. 그 부단함이 버거워 회피했던 수없는 시간과 이제는 이별해야 함을 안다. 스스로 발가벗겨져 있다며 괴로워하는 나체 상태가 아닌, 이 옷도 저 옷도 입어보면서 가장 잘 맞고 원하는 옷을 찾아갈 작정이다. 시간은 예상보다 많이 걸릴 수도 있을 듯 싶어 아득하지만.


본인의 인생의 한 면을 수면 위로 길어올려 세상으로 틔워준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날카롭고 무모한 언어가 팩트폭격이라는 외피로 유통되는 시대에 깊이 사유하고 고민한 사람의 글을 보며, 매일 기대하고, 위로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 듯 싶어서.


긍정을 대신할 태도가 필요했다. 험한 세상을 어떤 자세로 헤쳐 나갈 건지 새로운 태도를 배울 때가 된 것이다. 긍정의 한계를 넘어, 세상에 맞설 만한 태도. 긍정이 2020년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인정했을 때 내가 떠올린 것은 박노해의 <나는 순수한가>라는 시였다.



(중략) 나는 긍정과 이별했다. 그보다는 분노와 슬픔으로, 기쁨과 강함으로 변화무쌍한 세상을 살기로 했다.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고 열정은 쉽게 동이 나지 않게 은은히 간직하고 슬픔에는 불필요한 나르시시즘이나 동정을 담지 않고 기쁨은 그 출처를 분간해서 느끼기로 했다. - P60

장자는 내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 세상의 자질구레한 유용성에 목매지 말라며 내게 맞는 시기를 기다리라고 했다. 유용성에 맞춰 사는 것은 내게 불편함을 견딜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쓸모없음의 쓸모‘를 알기 위해서는 불편함을 견뎌야 한다. 그것을 견디는 것이 다른 차원으로 가는 길 아닐까. - P109

일을 그만두고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꼈던 이유는 단순히 시간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나의 생장점이 살아있다고 느껴서였다. 그 무엇도 내 한계를 정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나대신 나의 일에 대해 할 수 있다, 없다를 논하지 않았다. ‘나만‘이 ‘나의 시간‘을 써서 ‘성장‘이든 ‘창작‘이든 이뤄낼 수 있다는 자율성이 스스로를 자유롭다 느끼게 해주었다.

자신의 의지로 타인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일,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자유. 그것이 21세기에 적합한 지속가능한 원동력이 아닐까. - P117

원하는 곳이 내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고 돌연변이처럼 외톨이가 될 것이 뻔하더라도 깊이 사랑하는 곳이라면 그곳에 가서 살아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무엇인지 속단하지 않고, 내가 살아남을 가능성 같은 고민은 잠시 뒤로 하고 말이다. 서식지를 몇 군데 지나고 보니 돌연변이가 되는 것보다 무서운 건 살고 싶은 대로 못 사는 것이었다. 정말 내게 적합한 곳인지도 알 수 없는 서식지에 나를 맞추려고 애쓰거나, 혹은 내게 익숙한 서식지가 최선의 서식지일 거라 믿으며 안주하기보다 원하는 곳에서 돌연변이로 사는 것이 백번 행복한 일일지도 모른다. 돌연변이가 될지라도 사랑하는 서식지에 사는 것을 두려워 말자.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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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숨어 있는 세계 - 언어치료사가 쓴 말하기와 마음 쌓기의 기록
김지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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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세상을 보는 거울이라고들 한다. 그치, 나는 책이 아니었다면 결코 접할 수 없었을 사실과 세계를 접했다. 

그러나, 난 이런 책을 읽을 때 여전히 조심스럽고, 어떤 면에선 읽기가 꺼려진다. 의료 윤리의 면에서, 어디까지 환자인 아이의 정보를 드러낼 수 있는지, 애초에 (사전에 당사자의 허락을 받아도) 엄연한 치료 기록을 드러내도 되는 게 맞는지 고민하게 된다. 의사/의료인이 낸 책을 여러 권 읽어 봤는데, 당사자의 사적인 정보가 내밀하다 싶을 만큼 많이 기재되어 있어서 얼굴을 찌푸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객관적인 정보의 나열뿐 아니라, 무조건적인 동정이나 연민의 투, 그 당시 본인이 제대로 치료를 이행하지 못했다는 참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듯한 일방적인 말투까지. 환자와 그 가족 당사자를 고려하지 않은 글이 시중에 너무 많았다. 유명하다는 의료인의 저서 십중팔구는 그랬다. 그사람들은 의료 윤리를 위반한 것과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우도 갖추지 못한 자다. 책만 봐도 의료인이라 불려서 안 되는 이들이 많다.

이 책은 그런 저서들과는 조금 다르다. 환자와 주변 가족들의 내밀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는 것도, 개개인마다 다른 치료 과정과 그 당시 본인의 심정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점은 같다. 그런 면에서는 여전히 우려스러웠고, 읽어도 되는지 의심스러웠다. 다만 말투가 달랐다.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서술에서는 아이와 본인을 의료인과 피의료인이라는 상하의 관계로 보지 않았다. 어른과 아이의 위계를 세우지도 않았다. 잘 놀아주고 친절한 아저씨 - 아이 정도랄까. 아이와 보호자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무조건 동정하거나 연민하지도 않았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건 '예의가 아니다.' 현재와 미래를 단정하지 않았고, 본인을 합리화하는 듯하면서도 매 수업에서 더 잘하지 못했음에 참회하고, 최선의 도움이 되지 못했음에 미안해했다. 장애를 나쁘다거나 부정적인 특성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게 되어버린' 특성으로 인식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당연한 말임에도, 나는 여전히 장애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의 부주의함이나 갑작스런 행동, 거부 행위에도 당사자를 나무라거나 하대하지 않았다. 아이의 입장에서 그 행동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끊임없이 고민한다.

언어치료사라는 직업의 특성이 저자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의 태도는 아이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그에 맞는 상호작용과 치료 기법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냉철하고 객관적이지만, 분명 희망에 차 있고 긍정적으로 보였다. 진전을 보이고자 노력하는 아이와 보호자로부터 얻게 된 마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18년간 방문 언어치료를 하며 현장에서 느낀 사회 구조적 문제를 지나치지 않는다. 아이의 가정이나 어린이집 등의 돌봄 기관에 방문함으로써 보이는 사각지대의 문제들을 저자는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장애 아동과 성인의 돌봄 및 치료 기관, 시스템의 절대 부족과 있는 기관도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폐쇄되는 현실, 장애인 복지 지원의 허점(복지를 총괄하는 일원화된 기관이 부제)과 여성에게 돌봄이 전적으로 위임되며 기존의 사회에서 쌓은 경력이 단절되는 현상, 돌봄의 갈등으로 인해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소외되고 고립됨으로써 찾아오는 가정의 불화에 대한 소신도 어김없이 밝힌다.


우리는 아직 길가에서 장애인을 보기 힘들다. 백화점이나 지하상가처럼, 평지에 경사로, 엘리베이터 등의 편의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곳에서는 곳곳에서 마주하나 그 이외에서 우리는 그들을 마주할 수 없다. 단순히 길거리뿐이 아니다. 수많은 일터에서는 더더욱 그들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이동과 일자리와 다른 많은 영역에서 장애인을 사회 구성원으로 편입하기 위한 준비를 부단히 해야만 한다. 하루종일 집에만 있어서는 장애인 뿐 아니라 돌보는 가족들이 행복할 수 없다. 삶 다운 삶을 누릴 수 없다. 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널리 이동하고, 교육받고, 일하고, 여가를 즐길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저출생과 고령화의 문제로 많은 초중고교와 대학이 소멸 위기에 처했다. 학생 수의 부족으로 폐교 위기인 기관들을 리모델링하여 국공립 특수교육 전담 기관으로 탈바꿈하면 어떨까. 이미 폐교된 기관을 다시 개축하거나 고쳐서 써도 괜찮을 듯 하다. 성인인 장애인을 돌보거나 자립을 돕도록 교육하는 주간보호센터나 자립/일자리센터도 좋을 것이다.

언어치료를 비롯한 각종 놀이, 감각치료 등의 바우처는 학교를 다닐 경우 만 20세까지, 그렇지 않을 경우 만 18세면 지원이 끊긴다고 하니 얼마나 답답할 노릇일까.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긴 지금, 수치상 성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의 지원을 끊는 것은 부당하다. 살아 있는 한 얼마든지 감각하는 존재인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살 권리를 지원해줘야 한다. '복지'란 사람이 사람답게 필요한 일들을 수행하는 데 부족함을 덜도록 돕는 것이라 믿는다.

저자와 같은 사람이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병원 치료실이 아닌 가정이나 보육 시설로 방문해서 수업을 했기에, 더 많은 의사 소통과 놀이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날것의 생활 공간에서 한 치료는 의료보다는 '체험'이자 '학습'이며 '여가'이기도 하다. 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 그 시간을 겁먹지 않고 즐길 수 있다. 비단 아이들만 치료실 바깥에서 함께한 영향이 닿진 않았을 테다. 그것은 아이와 함께한 의료인인 저자에게도, 저자의 기록을 통해 나에게도 전달되었다.

뭉클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몽글거리는 느낌. 장애인에 대한 열악한 처우에 화가 나면서도, 순수한 아이들과 새로운 소통의 방식과 마주할 수 있어 반가운 책이었다. 기쁨과 분노. 두 가지 감정을 적

장애가 있는 아이는 놀림이나 경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괜찮은 친구를 만날 가능성도 있다. 조건이 좋지는 않지만 들이가 해야 할 몫도 있다. 어쩌면 이 아이가 예상보다 훌륭하게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삶은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감정과 무관하게 지속된다. - P198

전문가로서 언어치료사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냉철하게 상대의 언어를 평가하고 계획을 세우고 수업의 목표와 진행 방식을 정해야 한다. 하지만 때로 낭만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어떤 정확한 예측도 미래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불일치의 틈 안에 기적과 희망이 숨쉬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P121

아이가 말을 더듬는다고 해서 부모를 탓하면 안 된다. 하지만 정서적 요인이 아이의 언어발달에 분명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어른인 부모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 말더듬도 예외는 아니다.
말은 강물과도 같다. 아이들의 말은 어른들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한다. 미숙하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그래야 막히지 않고 유유히 흐를 수 있다. - P111

모든 문제행동은 아주 작은 곳에서 미미하게 시작된다. 그러다 점점 그 강도가 세지게 마련이다. 아이의 덩치가 커져 더는 물리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시기가 오기 전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신뢰가 손상된 상황이 오기 전에, 아이에게 수용의 경험이 쌓이게 해주어야 한다. - P89

늘 경쟁에서 배제됐던 이 아이들이 역설적으로 경쟁에 목말라한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는 것,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싶어한다. 진다고 해서 내가 열등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주, 컴퓨터와 모바일 게임에 빠진다. 이 친구들이 원하는 건 누군가의 한 마디다.
"너도 우리와 같아.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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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마음 - 나를 돌보는 반려 물건 이야기
이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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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자의 맑고 선한 마음을 닮고 싶다. 

세월에 이리 닳고 저리 닳으며 마모되었지만, 절대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미감과 취향과 다름을.


나는 올바른 소비를 하고 있는가? 주위에 있는 사물과 물건을 존중하며,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살기로 선택한 이상, 죽지 않고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이상 '소비'는 인생의 제일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결코 빠져선 안 되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현명한 소비는 비우고 사지 않는 것만큼이나 가치 있음을, 때로는 그것이 나의 생산성과 쾌락이라는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취하게 한다. 취향과 기능의 교차점에서 최적의 상품을 잘 고르고, 사고, 잘 보관하고, 쓸모가 다하면 잘 버리는 것. 여기서 초점은 사고 나서 '잘 쓰는 것'이다. 물건에 인격과 영혼이 있는 듯 의미와 추억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 추억을 긍정하되 매몰되지 않으며 '반려'하는 존재로서의 예우를 갖춰주는 것이다. 물건과 함께한 시간은 따지면 내 세월이기도 하니까. 그런 물건의 시간이 켜켜이 모여 어느 한 시절의 나를 이룬다.

'사는 마음'이라는 제목답게,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 책은 사실 모두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새겨두면 좋을 조언들로 꼭 차 있다. 언뜻 개인적 서사로 보이지만 결연하고, 단단한 언어들이 정갈하게 모여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글이 되었다. 읽으면서 뜨끔거리게 만들지만, 날이 서지 않아 좋다. 이 글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나는 살기로 선택한다. 삶을 고집하기로 한다. 그리고 소비하는 행위를 즐겁게 만들기로 한다. 살아가는 데 물건이 필요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이상 그 물건을 구매해야 한다면, 그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면 삶이 즐겁기 위해서는 소비하는 행위가 즐거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즐겁지 않은 소비는 하지 않기로 한다. - P198

여성의 외모가 더 가혹한 잣대로 평가받는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외모가 뛰어나거나 외모를 잘 가꾼 여성들을 향한 추잡한 말들을 봐도 알 수 있다. 남녀를 ‘떠나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많지 않다. 외모에 대해서는 더더욱 남녀를 떠나서 말할 수 없다. - P178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영영 볼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바로 성찰과 사유가 필요하다.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불편한 감정이 부수적인 욕망으로 인한 시샘인지,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데서 오는 울분과 좌절감인지 판단해야 한다. 내가 누리는 특권을 보지 못하고 괜히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시기심을 박탈감으로 오인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익하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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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조금만 - 자부심과 번민의 언어로 쓰인 11인의 이야기
이충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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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조금만'은 전 이충걸 GQ 및 보그 편집장이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11인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본인의 언어로 재해석한 평론 형식의 인터뷰집이다. 전형적인 인터뷰집과는 확실히 궤를 달리 한다. 대다수의 인터뷰에서 재현되는 뻔한 질문과 답으로 점철된 데자뷰가 아니다. 인터뷰어로서, 인터뷰이에 대한 예의와 존중과 존경을 기저에 두고, 그 사람의 곳곳을 탐색한다. 이때 인터뷰이의 삶의 궤적을 훑으며, 내면 깊이 있을 외로움이나 불안, 상실을 끊임없이 끄집어낸다. 무례하지 않은 솔직함으로 무장된 질문들은 파격적이지만 폭력적이진 않다. 더 나아가 인터뷰이의 답변과 움직임을 자신의 세계로 가져와 끊임없이 변주하고, 질문하며, 비평의 장르를 만들어낸다. 내밀하고 진솔한 말들이 저자의 손길을 거쳐 더욱 세밀해졌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말들이기에,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인터뷰이 11인은 최백호, 강백호, 법륜, 강유미, 정현채, 강경화, 진태옥, 김대진, 장석주, 차준환, 박정자다.

음악과 스포츠, 외교, 예술, 패션, 예능의 분야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는 이들이라는데, 사실 잘 몰랐다.

대부분은 이름만 슬쩍 아는 수준이었다. 구조 안에 사람 있는데, 세상을 알려고 노력했건만 사람은 문외한이라는 점에서 아직 한참 부족하다.

반도의 여성이라 그런지, 수많은 인터뷰이들 중에서도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의 인터뷰에 눈이 갔다. 질곡의 세월에서 스스로 커리어를 지킨 기성 여성들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예전에도 유능한 직업인이다가도 주부로 꺾이고 마는 세태가 끝이 아니라고, 변하지 않을 듯한 유리천장에 조금씩 균열을 냈던 세태들도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강유미 개그우먼, 강경화 (전) 장관, 진태옥 패션 디자이너, 박정자 배우의 인터뷰는 그런 점에서 매우 값졌다. 읽는 내내 존경심이 벅차올랐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워너비'라는 말은 이들을 두고 말하는 수사일 것이다. 그들의 초연한 태도, 단단한 마음과 곧은 기품, 겸손한 언어를 모두 닮고 싶다.

저는 한순간도 헛되게 지나가는 건 없는 것 같아요. 나태하면 나태한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다 나의 인생에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나이 드는 거에 대해서는 한 번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어요.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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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영혼 오로라 - 천체사진가 권오철이 기록한 오로라의 모든 것
권오철 글.사진, 이태형 감수 / 씨네21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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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을 당신은 오로라를 얼마나 가슴 깊이 품고 있는가?

나에게 오로라란, 닿을 수 없는 신비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늘의 아이돌. 딱 그런 말로 표현하면 좋을 듯하다.

내가 있는 한반도에서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엄두를 낼 수조차 없는 대상이 오로라이기 때문이다. (보현산 천문대에서 광활한 은하수를 봤던 그 순간에도 오로라는 볼 수 없었다. 책에 따르면 고대 시대에는 한반도에서도 오로라를 볼 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지구 자기장의 자극점이 옮겨가며 요원한 일이 되었다.)


저자 '권오철'은 이공계 관련 일을 하다 오로라 사진가로 진로를 바꾼 특이한 커리어의 인물이다. 과감하고 언뜻 무모해보이기까지 한 진로 전환은 어느새 여덟 번의 개인 사진전을 개최한 예술가이자 다섯 권의 책을 써낸 작가로, 나아가 나사에서 선정한 한국인 최초의 사진가라는 타이틀을 모두 가져다주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을 다시 실감했다. 역시 우리네 삶은 언제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알 수 없다.


오로라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부터 (그리 길지 않다) 전업 사진가로 활동한 2009년부터 지금까지 그가 '오로라'를 관찰한 소회와 귀중한 사진들이 담겼다. 구글에 검색하면 셀 수 없이 많이 나오는 게 사진이라지만, 디지털이 아닌 지면에 인쇄된 사진을 본다는 것은 다른 느낌이었다. 이때 사진은 '물성'이 있어 얼마든지 만질 수 있기에, 사진가의 고단함과 현상의 기이함, 차마 짐작할 수 없는 시공간의 광활함을 더욱 고스란히 느꼈다. 질감이 있다는 것은 이다지도 소중한 것이다.

옐로나이프(저자가 주로 오로라를 관찰하는 캐나다 북부 도시)에서 오로라를 관찰하는 원정대에 속한 듯한 환상에 잠시나마 몰입할 수 있었다.


책 뒷면만 봐도 가슴이 뛰지 않는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짜릿함과 아쉬움은 어느 말로도 헤아리지 못한다. 맘 같아선 사진만 백만 개 올리고 싶다. 백문이 불여일견. 수만 자의 활자보다 더욱 인상깊은 한 장의 사진이란.

'오로라의 보고'라 할 만한 이 책을 성층권의 슈퍼스타 오로라를 감상하고픈 이들이라면, 읽어보길 바란다.

태양의 극점이 활성화되는 2024~2025년에 (내년 아닌 내후년 !) 나올 개정판은 얼마나 많은 오로라의 황홀경으로 물들어 있을지 기대된다.

간이 볼 수 있는 현상으로 대상을 한정한다면, 밤하늘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단언컨대 오로라이다. 비처럼 쏟아지는 별똥별들, 그리고 개기일식도 다 보았지만 그중 최고는 오로라였다. 과학자들이 예측한 시간에서 한 채의 오차 없이 몇 시간 동안 진행되는 개기일식은 장엄하다. 태양이 완전히 가려지는 단 볓 분, 그 기적의 순간은 숭고하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오로라다. 오로라는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희미한 날도 많지만 오로라 푹풍과 같이 온갖 색의 빛이 밤하늘 전체를 물들이며 휘몰아치는 순간을 맞으면 그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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