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 - 씩씩한 실패를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드는 모험
김수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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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문득 '자유'의 사전적 의미가 궁금해서 네이버 사전을 뒤졌다.

스스로 자 自, 말미암을 유 由. 스스로, 저절로, 자연히 사물이나 현상의 원인이나 이유나 결과가 되는 것.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법률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자유를 누리다. 모든 이들이 주체가 될 수 있어 주어가 생략된 이 문장은, 여전히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나는 진정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자유라는 화려한 겉피로 그저 대면하기 주저하는 현실을 회피하며 살고 있는가. 후자라고 스스로를 칭하면서도 이 상태에서 과감하게 벗어나기란 너무 어려운 것이다.

'부유한' 상태에 있는 내게, 김수민 SBS 전 아나운서의 '도망치는 게 어때서'는 '나이스 타이밍'으로 다가온 책이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씩씩하고 맑은 영혼으로 하루하루를 모험하며 살아가는 여정을 그려내는 그의 첫 에세이다.

표지 디자인도 인상적이다. 저자로 추정되는 단발머리 여성의 일러스트가 서로 손을 맞잡고 흐르는 강물과 날아가는 새들과 시시각각 다른 기세를 보이는 산을 응시하고 있다. 인간의 세계와 상관없이 저만의 흐름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자연과 같은 삶을 지향하자는 메시지일까. 궁금해진다.

'씩씩한 실패를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드는 모험'이라는 표제 옆 소제목은 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다. 저자는 '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자고 본인의 경험을 빗대며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한다. 각자 먹고사는 문제로 바쁘다보니 내 감정에, 기호에, 시간에 충실할 사람이 몇이냐 되겠냐만 나다움을 추구하는 저자는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욕망하며, 가능성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기에. 과감하게 멈추고, 방향을 틀어 도전하는 저자의 포부와 결심은 더 큰 차원의 내가 되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 용기는 문학을 통한 깨달음과 자기 확신에서 기인한다.


본인의 처지나 직업 등 타인보다 나아 보이는 구석을 핑계 삼아 사회의 암묵적인 '틀'에 갇히길 거부하는 사람. 한국인이 추구하는 기능주의적 쓸모를 비판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잘 살아가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 마냥 긍정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백퍼센트 부정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세상을, 소망을 충실하게 느끼고 실현하며 살아가는 사람.

또래의 청년들보다 단단한 저자의 결심은 저자가 느꼈던 좌절이나 실패와도 무관하지 않다. 실패에 대한 관념도 한국 주류 사회의 담론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실패를 회피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실패라고 규정하는 행위들을 섣불리 낙인하지 않았다. 쓸모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끊임없이 주입받는 사회에서, 실패는 빈도가 잦을수록 우리를 위축되게 만든다. 충분히 해낼 일도 감당하기 벅차게 된다. 그러나 저자에게 실패란 '가는 길목마다 발에 채이듯' 흔하다. 무슨 행위든 성취하기 위해 크고 작은 실패는 반드시 경험한다. 그러니 '실패'에 호들갑이나 우울 같은 필요 이상의 감정을 지나치게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니네.'라는 마인드가 핵심이다. 오히려 실패에 더욱 씩씩해지자고 독려한다. 보다 당차고 명랑하게, 사회가 부여한 실패의 낙인에 저항하고 당도한 실패에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것을 발판 삼아 더 큰 도전을 기꺼이 감행한다.


책에서는 한예종을 다니던 저자가 '끌림'으로 아나운서를 준비하고, 학업과 취준을 병행하며 1년도 안 되어 아나운서에 합격한 기적의 이야기도 나오고, 입사 1년차부터 다른 직업을 찾아보다 3년차에 기어코 퇴사를 결심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 모든 인생 여정이 한 사람의 것이라는 게 사뭇 놀랍다. 신입사원 나이가 30을 넘기는 취업난 시대, 모두가 취준으로 고통받는 시기에 자발적 퇴사를 실현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차선이 없다면 대책없는 미친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쏘아 붙였을 듯싶다. 주변에서도 한사코 말렸겠지. 괜찮겠냐는 시선과 염려를 뿌리치고 '다양한' 가능성을 믿으며, 변화를 통해 '책임'지기로 용기를 낸 저자가, 당당한 태도가 절로 존경스럽다.


이 책은 나를 새롭게 되돌아보고 미래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꿈도 성향도 적성도 방향도 잃고 방황 중인 나는 '배워가는' 단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이런저런 알바 자리를 찾아보고 있는데, 대구 특성인지는 몰라도 애매한 시간대의 초단기근로가 많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꺼려진다. 아니면 인턴이라도 해볼까. 저번에 지원하려던 일자리는 자소서를 제대로 쓰지 못해 놓쳐버려 두고두고 아쉬웠었다. 일단 뭐든 하는 것이 있어야 남는 것이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DO IT'의 마음가짐이 필요한 듯하다. 이번 주는 별 거 없는 자기소개서를 잘 다듬어 봐야겠다.

돈이 나를 정의하진 않고 그래도 안 되겠지만, 재화가 없으니 기본적인 생존이 위협받음을 체감한다. 나의 기호를 충족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나보다도 생산성 있는 재화를 쌓아야 한다.

나를 폄하하지 않고, 늦더라도 방향을 잘 잡고, 휘발되지 않는 깊이를 갖추려 부단히 노력하는 삶. 그 부단함이 버거워 회피했던 수없는 시간과 이제는 이별해야 함을 안다. 스스로 발가벗겨져 있다며 괴로워하는 나체 상태가 아닌, 이 옷도 저 옷도 입어보면서 가장 잘 맞고 원하는 옷을 찾아갈 작정이다. 시간은 예상보다 많이 걸릴 수도 있을 듯 싶어 아득하지만.


본인의 인생의 한 면을 수면 위로 길어올려 세상으로 틔워준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날카롭고 무모한 언어가 팩트폭격이라는 외피로 유통되는 시대에 깊이 사유하고 고민한 사람의 글을 보며, 매일 기대하고, 위로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 듯 싶어서.


긍정을 대신할 태도가 필요했다. 험한 세상을 어떤 자세로 헤쳐 나갈 건지 새로운 태도를 배울 때가 된 것이다. 긍정의 한계를 넘어, 세상에 맞설 만한 태도. 긍정이 2020년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인정했을 때 내가 떠올린 것은 박노해의 <나는 순수한가>라는 시였다.



(중략) 나는 긍정과 이별했다. 그보다는 분노와 슬픔으로, 기쁨과 강함으로 변화무쌍한 세상을 살기로 했다.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고 열정은 쉽게 동이 나지 않게 은은히 간직하고 슬픔에는 불필요한 나르시시즘이나 동정을 담지 않고 기쁨은 그 출처를 분간해서 느끼기로 했다. - P60

장자는 내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 세상의 자질구레한 유용성에 목매지 말라며 내게 맞는 시기를 기다리라고 했다. 유용성에 맞춰 사는 것은 내게 불편함을 견딜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쓸모없음의 쓸모‘를 알기 위해서는 불편함을 견뎌야 한다. 그것을 견디는 것이 다른 차원으로 가는 길 아닐까. - P109

일을 그만두고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꼈던 이유는 단순히 시간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나의 생장점이 살아있다고 느껴서였다. 그 무엇도 내 한계를 정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나대신 나의 일에 대해 할 수 있다, 없다를 논하지 않았다. ‘나만‘이 ‘나의 시간‘을 써서 ‘성장‘이든 ‘창작‘이든 이뤄낼 수 있다는 자율성이 스스로를 자유롭다 느끼게 해주었다.

자신의 의지로 타인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일,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자유. 그것이 21세기에 적합한 지속가능한 원동력이 아닐까. - P117

원하는 곳이 내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고 돌연변이처럼 외톨이가 될 것이 뻔하더라도 깊이 사랑하는 곳이라면 그곳에 가서 살아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무엇인지 속단하지 않고, 내가 살아남을 가능성 같은 고민은 잠시 뒤로 하고 말이다. 서식지를 몇 군데 지나고 보니 돌연변이가 되는 것보다 무서운 건 살고 싶은 대로 못 사는 것이었다. 정말 내게 적합한 곳인지도 알 수 없는 서식지에 나를 맞추려고 애쓰거나, 혹은 내게 익숙한 서식지가 최선의 서식지일 거라 믿으며 안주하기보다 원하는 곳에서 돌연변이로 사는 것이 백번 행복한 일일지도 모른다. 돌연변이가 될지라도 사랑하는 서식지에 사는 것을 두려워 말자.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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