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오브 맨
크리스티나 스위니베어드 지음, 양혜진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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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잠자는 미녀들>은 여성들에게만 발생하는 치명적인 전염병 '오로라 병'을 다룬다. 그 소설을 읽으며, 세상이 보다 아름답고 살만한 곳이 되기 위해서는 전염병은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 발병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현직 변호사로 작가로 이중생활을 하는 크리스티나 스위니베어드의 데뷔작 <엔드 오브 맨>은 킹의 상상력 반대편에 서있다. 치명적인 질병 '남성대역병'(Great Male Plague)은 숙주인 여성을 통해 감염되며, 치사율이 90%다. 걸리면 열에 아홉은 사망이요, 운 좋게 면역체를 가진 남자는 10%에 불과하다.

<엔드 오브 맨>은 코로나 직전 발표되었다.

소설은 전염의 과정대로 진행된다.

"원인 모를 발병 - 대수롭지 않은 초기 대응 - 급격한 확산 - 공포와 혼란 - 백신 개발을 비롯한 대응책 마련 - 새로운 뉴노멀 적응 - 백신 개발로 위험도 저하 - 뉴노멀 시대, 일상으로의 복귀"

이미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코로나로 소설 속 묘사된 많은 상황들을 실제 경험했다.

코로나가 극심하던 시기, 사람들은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원숭이로부터 발생한 감염, 백신 개발의 지난한 과정, 지독한 상실감과 외로움, 재택근무...

치사율이 그래도 높지 않고, 남녀노소 거의 차별이 없었던 코로나와 달리 남성만 공격해 생존율이 겨우 10%인 남성대역병은 훨씬 고약하다. 그러니 그 결과는 아비규환 생지옥으로 그려진다.

실제 상황이라면 <엔드 오브 맨>은 가장 강력한 전염병일 것이다. 이름이 무엇이든 팬데믹은 다시 온다.

소방관, 경찰, 밴드 뮤지션, 테러리스트, 연쇄 살인범, 국회의원... 여전히 남성비가 높은 직군이다. 전염병이 퍼지고 얼마 안 가서 이들의 90%가 사라진다고! 보고할 상사도, 명령을 내릴 상관도 없다.

성비가 완전히 깨어진 사회, 외로운 여성들은 파트너로 동성을 찾을 수밖에 없다.

결핍이 생겨야,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우친다.

 

스위니베어드는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대부분 여성 화자들을 등장시켜, 팬데믹 시기의 모자이크를 다각도로 그린다. 최초 0번 환자를 접하고 이것이 전염병임을 간파한 응급의 어맨더, 미국에서 협조를 위해 발생지 영국으로 파견 온 병리학자 엘리자베스, 백신 개발에 혈안인 캐나다 바이러스학자 리사,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인류학자 캐서린, 팬데믹 기간 동안 배에서 분리된 생활을 한 남성 토비, 자신의 농장을 안가로 남자 젊은이들에게 내줘야 하는 모번, 필리핀 출신으로 싱가포르 부잣집 유모로 일하는 로자미...

세계 각국에서 이들의 사연이 반복, 취합되면서 시대의 벽화가 완성되는 구성이다. 의도대로라면 입체적이요, 자칫 잘못하면 지나치게 많은 시선의 분산으로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작법이다. 데뷔 작가가 시도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인상이었고, 조금 가지치기를 해서 핵심 인물 3~4명으로 압축하여 이들에게 집중하고 그다지 비중이 없는 인물들은 이들의 사연 속에 녹이는 방식이 어땠을까 싶다. 사실 후반부는 소설의 동력을 잃어버린 듯, 굳이 알고 싶지 않은 후일담이 지리멸렬하게 늘어지는 느낌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등장인물 역시 팬데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캐서린과 어맨더는 남편과 아들을 잃는다.

영화 <코코>의 주제는 여기서도 반복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먼저 떠나도,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는 홀로 죽어갔고, 그도 그 무렵 혼자 죽었다. 옆집 사람과 블로그에 의해 그저 스치듯 기억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최후, 시어도어의 최후, 앤서니의 최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나에게 연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정직하게 답할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 나를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 405쪽, 캐서린

인류에게는 늘 다양한 위험이 존재했고, 그다지 체감되진 않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어느 곳에서는 크나큰 사고가 일어난다. 전쟁, 내전, 자연재해, 전염병...

그럼에도 우리는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한 줄기 빛을 보고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뛰어난 과학 기술의 힘을 빌려야 할 때도 있지만, 결국 기댈 건 서로의 따스한 온기와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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