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 - 나쁜 신념과 정책은 왜 이토록 끈질기게 살아남는가
폴 크루그먼 지음, 김진원 옮김 / 부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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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고, '경제학자들의 경제학자'로 불리는 폴 크루그먼이 20년 넘게 연재한다는《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신문 칼럼과 블로그에 올린 글들이 대부분이고, 말미에 경제학자로서 쓰고 싶은 일부 개인적인 글들이 추가된 책으로, 조지 W. 부시, 오바마, 트럼프 시절을 아우른다.

 

책 제목에 나오는 좀비는 폐기 처분해서 잊을 만하면 다시금 나타나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가는 '나쁜 신념과 정책'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부자 감세 좀비'를 든다. 부유층의 세금을 줄이면 투자와 경제 활동이 증가하고 그 과실이 차츰 소득 하위층까지 퍼져 나간다는 낙수이론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재정 악화와 소득 불평등 확대라는 후과를 가져온, 공화당 정책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최강 좀비다.

그 외에도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재해)는 환경 위기의 증거라는 논리를 부정하는 '기후 변화 부정 좀비', 과학기술의 발달이 야기하는 기술 격차가 실업을 양산한다는 '기술 격차 좀비'(*자동화는 지난 40년간 미국 노동자에게 일어난 역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고, 우리 사회 체제가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끔 하려는 꼼수), 긴축 재정이 유용하다는 '긴축 좀비', 불평등은 없다는 '불평등을 감추려는 좀비', 오바마케어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 '보편적 의료 보험을 물어뜯는 좀비'(*미국은 부유한 국가 가운데, 직업이 온전하지 않거나 기저 질환이 있는 사람이 의료 보험을 적용받을 수 없어, 이들이 비싼 비용이 드는 치료가 필요한 경우 재정 파탄에 이르거나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는 유일한 국가) 등 생명력이 뛰어난 좀비 군단은 지난 20년간 미국을 좀먹었다. 대부분 좀비들은 공화당의 구호이고 사상의 근간이다.

18개의 장으로 구성된 <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는 개별 좀비를 다루는 매 장의 앞에 크루그먼이 친절한 주석을 달아 전체적인 이해를 돕고, 이어서 관련된 칼럼(보통 4페이지 내외)이 나오는 구성이다.

신문 칼럼은 만인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쉽다고? 꼭 그렇진 않다.

칼럼 지면에 해당 사안의 기승전결을 시시콜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전문용어 적확한 한 단어면 끝날 걸 구태여 국어사전식으로 풀기도 어렵다. 어느 정도 전후좌우를 독자들이 안다는 전제하에 필자의 견해를 밀도 높게 농축해서 전달해야 하는 게 칼럼의 소명이다. 신문에 발표된 글이기에 비교적 말랑말랑하리란 기대는 접는 게 좋다는 이야기다. 짧고 굵게 급소만 노리는 고수의 화법이다.

크루그먼은 집중포화로 공화당의 트럼프 시기를 저격한다. 트럼프 시기는 미국의 후퇴였으며, 거짓말쟁이와 사기꾼들의 시대였고 여기에 언론이 배경음악을 깔았고, 보수주의 경제학자들은 학자의 양심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앞세워 직업윤리를 기꺼이 포기했다. 크루그먼의 애통함이 매 지면 흥건하다.

"그러나 21세기의 미국에서는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 33쪽

"공화당은 그저 사악한 이념만 쫓는 게 아니다. 현재로서는 사악한 존재 그 자체다." - 221쪽

"도널드 트럼프는 일탈이 아니다. 그는 공화당이 지난 수년 동안 걸어온 길의 정점이다." - 225쪽

 

두 가지 측면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우선 아무리 신문 지면이고, 노벨상 수상 교수가 자기 딴에는 가장 쉽게 풀어쓴다 해도 내공의 차이는 느껴질 수밖에 없다. 크루그먼은 '이 정도는 알겠지'하고 넘어가는 부분에 머리를 싸맬 수 있단 얘기다. 마치 서울대생이 과외할 때 '아니, 어떻게 이런 것도 이해를 못 하지...'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당대의 석학과 독자들 사이의 지적 격차는 외통수다.

크루그먼 역시 칼럼니스트로 이런 고충을 십분 이해하고 있는 듯싶다.

"학계의 꽤 실력 좋은 기고가가 좀 더 폭넓은 대중을 설득하려 애쓸 때 가장 크게 부딪히는 문제는, 전공자들이 서로 이야기할 때 활용할 수 있는 공통적 배경 지식을 쓰면 그 분야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꽤 정통한 독자들마저 논의로 끌어들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 589쪽

경제학의 주요 이론을 일별하는 17장 '경제학의 위기'와 크루그먼 지적 탐구의 소사(小史)인 18장 '나의 연구 방법과 경제학 탐색법'은 최소한 경제학 부전공 정도가 아니라면, 잠 못 드는 밤 좋은 동반자다.

전체 목차에서 특히 외계어에 가까운 두 개 칼럼은 아예 '공부벌레용'으로 안내하니, 도전해 보시길.

또한 어쩌네 저쩌네 해도 여기 언급되고 인용되는 사례, 정책, 제도, 인물 모두 미국이다 보니 체감도가 떨어진다. 미국 경제환경은 한국에 상수가 된지 오래라, 미국의 재채기에도 민감하지만 아무래도 책에 소개되는 지난 20년간의 경제 정책 및 재정에 관련한 수많은 정치적 논쟁은 국내 상황처럼 다가오진 않는다.

세상사에 귀 닫고 사는 자가 아니라면 폴 크루그먼이란 이름은 분명 들어보았을 것이다. 크루그먼의 팬이거나, 경제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그의 20년 세월이 압축된, 600쪽이 넘는 이 책에서 혜안을 얻는 부분이 분명 있으리라.

대학 시절에도 경제학 근처에는 가지 않았던 내게도 의도는 좋았으나 개별 국가의 조타수가 되기에는 한계가 뚜렷한 유로화, 얼마 전 방한으로 큰 화제가 되었던 낸시 펠로시에 대한 입체적 평가, 왜 암호화폐는 미래의 대안이 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근거는 유용했다.

 

책에 조심스레 언급된 걸 보면 크루그먼은 학자, 연구자, 이론가, 칼럼니스트뿐 아니라 실제 행정가, 정책 입안자, 정부 관계자로도 활동하고 싶은 모양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데, 지난 20년간 줄기차게 공화당이 조종하는 좀비군에 맞서 영향력 있는 《뉴욕타임스》지면을 통해 끊임없이 그 부조리함을 지적한 크루그먼의 존재감은 남다르다.

'한국의 OOO' 이런 표현은 질색이지만, 우리에게도 '한국의 크루그먼'이 있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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