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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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SF계의 '그랜드 데임'으로 추앙받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대미를 장식하는 '우화' 시리즈의 첫머리에 놓이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가 2022년 우리에게 도착했다. 소설이 출간된 게 1993년이니, 거의 30년이 지난 지각 출간이다. 소설의 배경은 2024~27년으로 설정되어 있으니,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SF가 아닌 바로 코앞에 닥친 근미래를 비교하며 읽을 수 있게 됐다.

 

소설의 주인공 로런 오야 올라미나.

연도별, 일자별로 진행되는 이 소설의 시작 2024년에 로런은 15세였으니, 18세가 되는 2027년까지 4년의 축약된 여정, 로런의 성장사를 따라간다.

세상은 생지옥 무법천지다. 부유한 동네는 장벽을 치고 외부인의 침입을 막으며 그나마 안전을 유지하는데, 당연히 부유한 동네일수록 중무장이다. 끊임없이 외부의 불량배, 불우이웃, 무뢰한들은 장벽 안 동네를 기웃기웃 대고 절도, 방화, 약탈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바깥세상에서 치안은 개에게나 줘버린 지 오래라 살인, 강간, 식인 등 온갖 범죄가 난무한다. 특히 힘없고 나약한 여자들은 밥이다. 가장 위험한 무리는 '파이로'(pyromania 방화광)라 불리는 얼굴에 색칠을 하고 다니는 약쟁이들인데, 그들이 하는 마약은 방화 충동을 불러일으켜 세상 모든 곳을 불태울 태세다. 화재 따위를 진압하려고 물을 낭비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무도 없다.

2027년, 점점 세상은 험악해지고 로런이 사는 동네 로블리도도 불타고 가족을 잃고 홀로된 로런은 집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이미 세상의 변화에 여러모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뜻한 바가 있어 북쪽으로 향하고 도중에 몇몇 가족이 로런과 뜻을 함께 한다. 로런은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새로운 공동체를 꿈꾼다.

 

"내게는 진리처럼 보이는 '변화가 곧 하느님'이라는

특이한 신앙 체계는 지구의 씨앗이라는 뜻에서

'지구종'으로 이름 지을 것이다." - 136쪽

 

로런은 18세 흑인 소녀다. 여자, 소녀, 흑인.

로드킬 당하기 딱 좋은 모든 여건을 갖췄다. 그래서 그녀는 남장을 하고 길을 떠난다.

로런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어려서부터 모태 신앙이라 그런가, 하느님에 대해 남다른 사고와 개념 정립을 한 로런은 아비규환의 디스토피아를 구원할 '지구종'이라는 신인류를 제안하고, 기존 종교 체계와는 다른 자신만의 종교를 정립하고 이를 <지구종 : 산 자들의 책>에 정리한다. 다시 말하지만 로런은 겨우 18세다. 그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임신했을 때 처방약을 남용한 엄마는 로런에게 '초공감증후군'이라는 장애를 남겼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느끼는 이 특별한 장애는 완력이 필요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 로런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다. 계속 이 은유를 보면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혜안에 무릎을 쳤다. 현대는 공감하는 능력이 많이 부족한 사회 아니던가?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지금보다 높았다면, 한국은 보다 살기 좋은 사회가 됐을 거다.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화상 연설 때 불참한 국회위원들 생각이 난다.

일부 지역에서 흑인들은 아직도 노예제도가 있어,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사고파는 대상이고, 심지어 아이들은 물건처럼 팔려 나간다. 집필 당시 버틀러는 30년 후에도 흑인들의 생활이나 처우는 그다지 나아질 걸로 보지 않았단 얘기인데, 얼마 전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60발 이상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흑인이 떠오른다. 노예제도까지는 아니라도, 흑인의 대접은 아직 버틀러의 근심 안이다.

불안한 세상에 대한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전혀 낯설지 않다. 평범한 사람들도 뭔가 이상한 기미만 보여도 마트를 싹쓸이하지 않나. 영화 <테이크 쉘터>, <기생충>에서 보듯 방공호까지 준비하는 이들도 드물지 않은 걸 보면, 버틀러의 예지력에 탄복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게 나빠져만 갔어요.

기후, 경제, 범죄, 마약, 그런 것들 말이에요." - 328쪽

 

18세 소녀지만,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을 이끌고 새로운 세상의 메시아 역할을 하는 로런의 모습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희망과 염원을 본다.

서부 개척시대, 총 솜씨만 믿고 활개친 무법자들의 세상. 그래도 사람들은 황금이라는 희망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향했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마치 2020년대의 서부처럼,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보다 나은 희망을 찾아 북으로 북으로 향한다.

이제 겨우 반콜레의 땅에 정착하기로 한 로런의 지구종. 이야기는 <은총받은 사람의 우화>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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