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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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하드보일드를 대표하는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내가 죽인 소녀>가 13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독자를 찾아왔다. 이 소설로 제102회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올랐으니 시리즈의 대표작으로 봐도 무리가 없겠다.

탐정 사와자키와는 최신작 <지금부터의 내일>로 인연을 맺었지만, 여운이 짙다.

 

이번에 탐정 사와자키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소녀의 유괴 사건에 연루된다. 유괴범이 사와자키를 몸값 운반책으로 콕 집어 지명한 것.

300여 페이지를 훌쩍 넘겨도 사건의 전말은 오리무중이다. 소녀의 목숨이 걸린 유괴 사건인지라 최대한 신속하게 이런저런 수사를 진행하고 용의자를 특정해 보지만 모두 헛다리였음이 드러나고 사건은 다시 원점이다.

사와자키는 경찰과 대부분 경원시하고 살짝 협조하는 관계지만, 이번에도 믿을 건 탐정뿐이다.

 

장르물 애호가라면 책을 중반 정도 읽으면 나름 추리를 해보기 마련이다. 나 역시 나름의 시나리오를 도출해 보았지만 전혀 사건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범인이 탐정 사와자키를 지명한 데는 분명 합당하고 중대한 이유가 있으리라 전제했다.

역시 이 소설은 사건의 해결이 주는 쾌감보다는 '낭만 마초' 사와자키의 매력이 우선이다.

필터 없는 담배를 피우고, (닛산) 블루버드를 몰며, 폭력단에게까지 사건 의뢰를 받는 그는 칠 년간 700번 이상 반복해온 정정에도 불구하고 '와타나베 탐정사무소'의 사와자키를 고수한다. 동업자 와타나베는 과거 폭력단과 얽힌 사건에서 각성제와 1억 엔을 들고 튄 인물이다! 불행한 개인사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대형 사건에 면죄부가 될 순 없다. 와타나베는 이후 행불 상태로 간간이 사와자키에게 종이비행기로 안부를 전할 뿐이다.

"강탈 사건은 그가 선택한 최선의 처신이었다." - 404쪽

이 문장에서 크게 한 방 먹었다.

아무리 동업자였더라도, 사건 이후 적잖은 고초까지 겪었건만 이런 '인간에 대한 이해'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 건지!

그는 진정 이 시대의 '낭만 마초'다.

소설의 말미, 보너스 트랙 격으로 '맺는말을 대신하여 : 패자敗者의 문학 - 한 남자의 신원 조사'가 실려 있다.

하라 료는 소설가가 되기 전 재즈 뮤지션으로 여러 장의 음반을 낸 이색 경력의 소유자인데, 자신의 과거를 의뭉스럽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짧은 단편으로 정리했다. 그의 과거가 궁금한 하라 료의 팬이라면 박수칠 만하다.

개정판에는 국내 미출간된 단편 「감시당하는 여인」이 특별 수록되었다. 이 단편은 하라 료의 문고판 에세이 <하드보일드>에 수록되었다는데... 이런 건 번역이 시급하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도와준 노인이 남긴 증여금 2000만 엔을 받지 않는다.

20,000,000JPY!

탐정 사와자키의 매력엔 탈출구도, 비상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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