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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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82권의 히가시노 게이고 책을 읽었다. <몽환화>는 몇 년 전 읽었고, 당시에는 그리 큰 임팩트를 남기진 못한 작품이었다.

이번에 개정판이 출간되어 재독의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처음 읽었던 '첫인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읽혔다. 작품은 그대로 일 텐데 뭐가 달라진 것일까?

이 작품에 대한 내 평가는 개정된다.

등장인물을 보자.

주인공 소타는 원자력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나 원자력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으로 향후 진로를 고민하는 처지이고, 그와 콤비를 이뤄 사건의 핵심으로 뛰어든 리노는 올림픽까지 준비할 정도의 대표급 수영 선수였으나 갑자기 찾아온 원인을 알 수 없는 물속에서의 패닉으로 수영을 떠난 인물이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올곧은 성품의 리노 할아버지 슈지, 슈지의 도움을 받은 아들 유타에게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수사에 최선을 다하는 하야세 형사, 갑자기 자살한 리노의 사촌 나오토와 그가 재적했던 프로 데뷔를 앞둔 밴드 '팬드럼', 소타의 이복형으로 뭔가 모를 비밀을 감춘 경찰청 고위 공무원 요스케, 그리고 소타의 첫사랑 잊지 못할 그녀 다카미...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없고 각자의 사연은 명확하며 캐릭터는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이번엔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50년 전에 벌어진 희대의 MM(매릴린 먼로) 사건, 평화롭게 꽃을 키우면서 노후를 보내던 노인 슈지의 타살, 손자 나오토의 원인 모를 자살, 서로 호감을 보였으나 갑자기 연락 두절된 의문의 소녀 다카미의 행방.

히상 소설에서 프롤로그는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청사진 역할을 하기에 절대로 허투루 넘어가선 안 되지만, 이번 <몽환화>에서는 무려 프롤로그가 두 개이고 소타의 한여름 짧은 사랑을 그린 두 번째 프롤로그는 이례적으로 길다.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였던 이 사건들이 연결고리를 드러내는 얼개는 무려 에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작품이 '역사가도'란 잡지에 연재되었던 역사물을 표방한 소설이었음을 기억하자. 미스터리를 읽는 가장 큰 기쁨이 점으로 떨어져 있던 사건들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는 쾌감이라면 <몽환화>는 제대로다. 책장을 중간에 덮어도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한 몰입감은 기본이요, 여기에 인생살이에 대한 은근한 조언까지 첨언한다.

슈지 살해의 범인은 그야말로 예상 밖이었다. 숙달된 독자라도 이렇게 추측하긴 어려울 듯.

매력적인 등장인물들과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을 듯한 사건들이 얽히고설켜, 히상은 기어코 노란 나팔꽃의 비밀에서 출발한 황홀경을 빚어낸다. 역시나 이야기의 서랍이 많고, 전후좌우 스토리텔링을 축조하는 타고난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늘 추미스 계열의 책은 내 손에서 떠나지 않지만, 거의 언제나 히상의 책을 읽으면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소재가 무엇이든, 히상의 손을 거치면 적어도 독자들을 실망시키진 않는다.

'에도 시대에는 존재했다는 노란 나팔꽃이 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작가적 상상력은 놀랍고 경이롭다.

히상의 방대한 라이브러리에서 <몽환화>가 베스트 10에 들 정도는 아니지만, 20위권 안에서는 충분히 한자리를 두고 경합을 펼칠 만한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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