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데니스 존슨 외 지음, 파리 리뷰 엮음, 이주혜 옮김 / 다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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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리뷰>(the PARIS REVIEW)는 '작가들의 꿈의 무대'라 부르는 미국의 문학 계간지로, 1953년 출판과 문학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창간했다. 영어로 작품을 발표하는 유명 작가치고 여기 지면을 거치지 않은 이가 없다 할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는 문학잡지인데, 어느 날 편집자는 재미있는 기획을 한다.

작가들에게 <파리 리뷰>가 발표한 단편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하나를 고르고, 그 소설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결정적인 이유를 서술해달라고 부탁한 것. 2012년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Object Lessons : The Paris Review Presents the Art of the Short Story》다. 출간 연도를 고려하면 약 60년의 세월 동안 발표된 작품들 가운데 현직 작가들이 고른 결과물인 셈이다. 국내 소설집의 아름다운 제목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는 수록된「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에 나오는 문장에서 따왔다. 원서에는 스무 편이 실렸다는데, 도서출판 다른에서 나온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는 이중 열다섯 편을 추려 수록했다. 소설 애호가라면 누구나 그냥 지나치기 힘든 유혹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최고 작품을 뽑을 때 평론가와 일반 팬들의 리스트는 많이 다르다. 아무래도 전문적인 감식안을 가진 사람들이 손꼽는 작품들은 일반인들의 눈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거나, 무엇보다 재미가 담보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이 책에 선정된 단편들은 창작 강의나 글쓰기를 생업으로 하는 성공한 문인 자신이 꼽은 작품들이라 아마도 일반 독자들의 그것과는 다를 거다. 그야말로 '작가들의 작가'인 셈 아닌가. 보통 독자들이 좋아하는 스토리텔링 위주의 단편보다는, 다소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성향의 작품이 이들의 레이더에 포착돼 창작에 자극과 영감을 주었을 확률이 높다. 또한 해당 작가의 알려진 대표작이 아닌 숨겨진 걸작을 복권하고픈 심리도 있었을 테고.

수록된 작가들의 면면을 살핀다. 레이먼드 카버, 제임스 설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렇게 세 명의 작가 정도만 이름을 알고 다른 분들은 잘 모르겠다. 조이 윌리엄스는 추천 작가로 본인의 작품이 실리기도 했고, 추천인으로 다른 작품을 추천하기도 한다. 보르헤스의 「모든 걸 기억하는 푸네스」를 추천한 알렉산다르 헤몬은 내주 개봉하는 <매트릭스 : 리저렉션>의 각본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앞서 예측한 대로 약 절반 이상은 핵심적인 줄거리가 잘 드러나지 않는 단편들이 많다.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읽는 재미가 별로라는 이야기다. 일반 독자의 시선으로 대가의 경지까지는 이해하지 못한 탓이 크다. 이런 독자들을 위해 해당 소설을 추천한 작가들이 소설의 말미, 몇 페이지에 걸친 해제를 실어 이해를 돕는다. 해제가 대부분 소설보다 더 어렵다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거보다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마음을 뺏긴 단편은 이선 캐닌이 쓴 「궁전 도둑」이다. 좋은 소설은 일 방향의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인 감상은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로 「궁전 도둑」의 주제를 평가하고 싶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잊지 못할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을 테고 그와 연관된 사건이 분명 있으리라. 두 번에 걸친 '미스터 율리우스 카이사르 선발대회'를 다루는 이 단편이 소설집의 백미로 다가왔다. 「궁전 도둑」은 2002년 <엠퍼러스 클럽>으로 영화화되었는데, 아쉽게도 국내엔 소개되지 않았다.

그 외 폴라로이드 사진 같은 즉각적인 이미지를 남기는 카버의 「춤추지 않을래」, 짧은 대화로 어떻게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는지 잘 보여주는 모범답안 제임스 설터의 「방콕」,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아들의 시선에서 연민으로 지켜보는 「늙은 새들」, 걸작을 위해서는 작가는 그 무엇도 희생할 수 있다는 풍자와 은유 「스톡홀름행 야간비행」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문학의 힘을 믿는 소설 팬들은 전문가들이 이름을 걸고 감식한 15편의 소우주에서 분명 자기와 주파수가 맞는 작품을 만날 것이다. 문예 창작을 염두에 둔 자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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