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타프 도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7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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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타프(epitaph)란 심상치 않은 단어는 King Crimson의 명곡으로 처음 접했다.

존 콜트레인의 "마이 페이버릿 싱스"가 BGM이라 할 만큼 시종일관 언급되는 온다 리쿠의 <에프타프 도쿄>는 다양한 시점과 형식이 혼용된 이종격투기 스타일의 소설이다. 소설의 형식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여기서 온다는 다소 전위적이고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보여준다.

소설의 화자는 K라는 작가로 '에피타프 도쿄'라는 희곡을 준비 중이다.(K는 아마도 온다 리쿠의 분신인 듯 64년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가 중요한 동반자인 B코나 요시야와 함께 도쿄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기억과 회상을 곁들여 단상을 펼쳐 놓는 'Piece' 부분이 대부분이지만, 여기에 흡혈귀라는 정체불명의 인물 요시야가 보는 도쿄 스케치 'drawing', K의 희곡 '에피타프 도쿄'가 간간이 삽입된다. 일본판은 어떤지 모르지만, 비채판은 이 세 부분의 색깔을 달리하여 시각적인 즐거움을 키웠다.

"도시의 흐름, 기세, 성쇠. <에피타프 도쿄>에 시대성과 더불어 그런 것을 배경 어딘가에 슬쩍 넣고 싶었는데, 적당한 정도를 가늠하기가 상상 이상으로 쉽지 않다." - 153쪽

도시도 변한다. 일본의 심장으로 역사의 주요 순간을 모두 기억하는 도쿄 역시 변화하는 생명체처럼 변신을 거듭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주인공 K는 세계 최대의 헌책방 거리라는 진보초 같이 유명한 장소부터, 본인만 아는 퀘렌시아 히바이 사당까지 여기저기를 배회하며 도쿄의 변화와 자신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에 걸맞게 과거 도시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해 사유하며 사자(死者)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도쿄와 오사카의 비교도 자주 나오고, 이웃나라 한국에 대한 언급도 보인다.

'Piece'는 그래서 소설이라기보다는 도쿄의 사람과 도시의 면모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대본 같기도 하고, 그냥 느슨하게 도쿄에 대한 감상을 풀어놓는 에세이 같기도 하다. 도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기억하는 도쿄가 있고, 자기가 아는 도쿄가 있다.

그래서 <에피타프 도쿄>는 지역색이 강한 소설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K라기보다는 도쿄다. 아무래도 거기에 생활 기반이 있고 추억이 형성된 독자가 느끼는 공감은 분명 다를 거다. 예컨대 <에피타프 서울>이란 소설이 있어 거기에 80년대 쌍문동 정서나 종각에 있던 종로서적을 추억한다면... 다른 나라 독자들이 번역본으로 글은 읽을 수 있겠으나, 고유한 공감대를 공유하기엔 한계가 있지 않을까.

 

도쿄에 대한 기억을 채집하는 듯한, 희곡 집필을 위한 일종의 취재기로 'Piece'를 읽어가다 정작 희곡 '에피타프 도쿄'의 내용을 접하면 뜨악한다. 살짝 맛보기만 보여주는 이 희곡은 도쿄의 속살과는 무관한 여성 살인 청부업자 집단을 다룬다.

2020년 하계 올림픽 개최 도시로 줄곧 이스탄불을 응원했던 필자는 도쿄가 개최지로 선정되자 낙담한다.(Piece 19 '2020') 이 소설은 2015년에 발간되었다. 또한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요시야의 입을 통해 놀라운 통찰력을 선보인다.

"전염병은 꼭 다시 옵니다. 아니, 벌써 바로 저 앞에 와 있어요. 팬데믹의 수위는 높아져 있습니다." - 10쪽

뚜렷한 기둥 줄거리를 따라가지 않는 <에피타프 도쿄>는 나를 포함한 대다수 독자들에게 '이게 무슨 얘기야? 도대체 맥락이 뭐야?'하는 반응을 얻을 듯하다. 늘 가던 길보다 가끔은 샛길에서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찾을 수 있다. '맥락 없음'이 <에피타프 도쿄>의 매력이자 이 소설을 제대로 즐기는 방식이고, 온다 리쿠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노림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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