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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평점 :

<복수해 기억해>라는 스릴러를 2019년 인상 깊게 읽었다. <로드킬>을 일고 난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소설이야말로 '곤경에 빠진 소녀' 서사의 최종 병기였음을 알겠다. 작년에 그 소설의 번역가는 에세이 작가로 변신,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를 다룬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를 그야말로 맛깔나게 선보였다. 권남희 선생님을 비롯해서 글 쓰는 번역가분들의 산문집이 심심찮게 나오지만, 일단 이 두 권의 책은 모두 강렬한 잔상을 남겼다.
그 번역가의 이름은 김지현이다.
올해 비채 카페에서 <로드킬>이라는 소설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작가 이름이 아밀이었다. SF 쪽이라면 그런 필명을 쓸 수도 있겠구나 했는데 아밀의 본명이 김지현이란다. 앞서 말한 그 번역가 김지현이 맞고, 아밀은 소설가로서의 필명이었던 것. 부캐의 전성시대라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부캐'의 활용 아니겠는가!

앞날개를 펼쳐야 진가를 알 수 있는 <로드킬>의 표지는 BTS, NCT의 앨범 디자인 작업을 한 방상호의 손을 거쳤다.
영미문학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아밀은 오랫동안 '환상문학웹진 거울', '공동창작프로젝트 ILN', '브릿 G' 등의 플랫폼을 통해 작품을 발표해왔고, 그 결과 단편 「로드킬」로 2018 SF 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상을, 중편 「라비」로 같은 부문 2020 대상을 수상했다. 이쯤 되면 번역가 김지현이 본캐인지, 소설가 아밀이 본캐인지 헷갈린다. 여하튼 이런 수상작들을 실은 단편집이라 <로드킬>은 SF 소설집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정작 SF로 분류될 만한 작품은 표제작과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 정도다. 또 다른 단편, 제목만으로 너무도 읽고 싶은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로는 대산청소년문학상 동상을 수상했다는데 아쉽게도 <로드킬>에는 수록돼 있지 않다.
'작가의 말'에서 아밀은 '곤경에 빠진 처녀'들의 이야기가 자신이 천착하던 화두였음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그 주제로 여기 실린 6편 중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에 대한 해석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여성 수난사로 파악하면 주제의식은 하나의 길로 모여진다.
가임 여성이 오히려 희귀종이 되어 보호받는 「로드킬」, 소수민족의 마지막 주술사가 남성의 폭력에 희생되는 「라비」, 남편의 가스라이팅과 성폭력에 무방비인 「외시경」,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하지만 저변에 성폭력이 깔려 있는 「몽타주」,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라 할 자수를 빼앗긴 「공희」...
알게 모르게 사회에, 남성에, 남편에 억압돼 있는 주인공들에게는 10대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보낸 저자의 기억이 투영되었다고 한다. 한국 여성이 다니기엔 치안이 그리 안정적이지 못한 그곳에서 아밀은 아버지의 차를 통해서만 바깥세상과 교류할 수 있었다고. 그 기억은 또 한 가지, 인도네시아의 설화를 차용한 「라비」의 작품 구상에 도움을 준다.
작가는 이들을 미력한 존재, 희생자 프레임에 놔두지 않는다. 힘은 없지만 서로 연대해서 로드킬의 위협에 맞서고(「로드킬」), 갑갑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여성의 삶을 살고(「라비」), 더 이상 당하지 않고 칼(!)을 들고(「외시경」), 무사가 제공하는 안락하지만 재미없는 삶 대신 광대를 따라나서는(「공희」) 식으로 이들의 선택을 응원하고 뜨겁게 지지한다. 작가는 이중 「로드킬」, 「라비」, 「공희」를 '소녀 탈출 3부작'으로 명명하며, 차기작으로 워맨스 「로드킬」의 세계관을 확장한 장편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여가부 폐지론으로 시끌벅적한데 폐지론자들에게 <로드킬>을 추천도서로 권장한다.
걸그룹 오마이걸의 초기 곡들을 좋아하고, 특히 'WINDY DAY'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단편 「로드킬」. 작가는 오마이걸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는데 오마이걸 측은 이 사실을 알고나 있을지 궁금하다.

수록된 6편의 단편 모두 톤 앤 매너가 신출귀몰 변하는 게 놀랍다. 설화의 세계를 탐구하는 「라비」와 우리의 신화 '마을이 처녀 공양을 시작하게 된 기원'을 따라가는 「공희」의 작풍은 완연히 다르다.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소설의 힘을 보여주는 「몽타주」는 또 어떤가. 변검을 보는 듯하다.
<로드킬>은 한 번만 읽긴 아까운 단편집이다. 재독하면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할 작품들이기에 N차 독서를 유발하는 책이다.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몰아주진 않는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고 싶다.
번역도 하고, 에세이도 소설도 쓰는 아밀 김지현의 행보는 나의 그런 소박한 믿음을 산산조각 낸다.
각각 한 편씩의 번역작, 에세이, 소설을 읽고 나니 가장 기대되는 건 아밀의 차기 장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