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자본주의자 - 자본주의의 변두리에서 발견한 단순하고 완전한 삶
박혜윤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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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계획도 준비도 없이 한 가족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 시골로 향했다. 가진 것을 털어 허름한 시골집과 너른 땅을 마련한 그들은 실험하듯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여름이면 블랙베리를 따고 밀알을 즉석에서 갈아 빵을 만드는 삶을···」

책의 뒤표지에 실린 소개 글이다. 이 글을 읽고 우선적으로 두 개의 질문이 떠오른다.

1. 왜 하필 미국인가? 호구지책으로 뭐라도 해야 한다면 한국이 여러모로 낫지 않을까?

2. 도대체 뭘 해서 먹고 사나?

질문 1에 대한 답변은 명쾌하게 책에 나와있지 않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저자의 선호 아니면 '한국이 싫어서' 더욱 철저한 고립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질문 2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박혜윤은 자신들의 일상을 이메일에 담아 정기적으로 발송하는 유료 구독 서비스를 하고, 이렇게 책도 발간하지만 주업은 일주일에 이틀 집에서 여는 빵집이다. 본인이 직접 간 통밀가루로 이스트를 최소화하기 위해 하루 넘게 숙성시켜 온 정성을 다해 자부심이 가득 담긴 건강빵을 만들지만 손님은 보통 하루에 두 사람, 많으면 세 사람이 온다고. 배울 만큼 배운 남편은 글에 관련된 일을 프리랜서로 하는데, 4인 가족의 생활비로 100만 원 남짓이면 충분하단다. 이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국내 최고의 대학을 나온 박혜윤은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교육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남편은 40세가 되어 갑자기 퇴직하면서 이들은 '은퇴' 생활의 길로 접어들고, 시애틀에서 한 시간 떨어진 작은 마을의 110년 된 오래된 집에서 전원생활을 이어온 지 이제 7년째다.

부부의 작업에 분명 인터넷이 필수일 텐데 집에는 인터넷 자체가 없고 커피와 술도 안 마시고 산다. 옆집에는 미국판 '태극기 부대' 트럼프 지지자가 사는데, 예상과 달리 그 가족은 머리에 뿔난 외계인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저자의 고등학교 2학년, 초등학교 4학년 자녀들에게 명절마다 선물을 가득 안기는 친절한 이웃이란다.

4인 가족의 특별한 삶에 대해 오지랖 넓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태클을 걸기도 하는 모양이다. '왜 이러고 사니? 자녀 교육은? 그렇게 가방끈이 긴데 다른 방식도 있지 않겠니?...' 어떤 때는 궁금증의 차원을 넘어서 거의 공격적이기까지 해서 모욕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까지 있다는데 심지 굳은 저자는 이런 질문에 도가 터서 "세상의 모욕 앞에서 나를 지키는 시선"을 지킨다. 특히 다른 질문보다 자녀 교육이나 성장에 관한 부분은 저자가 <부모는 관객이다>라는 '괴짜' 육아법 책까지 쓴 교육심리학 박사라는 점을 기억하자.

박혜윤이 공기 좋은 한적한 시골에서 길어올리는 사유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다소 도발적이다. 애당초 남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의 사고방식이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 같기를 기대하긴 어려울 터.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현대판 <월든>이 아닐까 하는 지레짐작이 있었으나 그와는 결이 사뭇 다르다. 저자는 <월든>이 애독서인지라 책장이 닳도록 읽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1846년대를 살아가던 소로의 코트는 2020년대를 살아가는 내게 잘 맞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밝힌다.

이런 자연친화적인 삶을 무조건 찬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속성에 무한 반감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저자는 마음이 가는 데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묵묵히 자신의 인생을 산다.

책의 제목 '숲속의 자본주의자'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숲속의 철학자'에 더 가깝다. 박사급 고학력, 적잖은 인생 경험, <월든>을 비롯한 다양한 도서들, 저자 특유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인생관을 기반으로 자연 속에서 오랜 기간 숙성된 '숲속의 철학자' 박혜윤의 생각은 밑줄 치고 싶은 문장의 대향연이다.

"글루텐 프리, 채식주의, 로컬 음식 등은 미국에서는 정치적·사회적 계급의 지표와도 같다." - 24쪽

"친환경적인 농사는 없다. 농사는 원래 환경 파괴를 기본으로 한다." - 25쪽

"무언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내가 그것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말해준다." - 33쪽

"사람들이 타인을 보며 판단할 때, 그들은 늘 자기 자신을 비춰보고 있기 때문이다." - 166쪽

"부모의 교육 방침과 태도는 시대적 산물이다." - 208쪽

"듣는 것은 어떤 기술이 아니라 사랑이다." - 220쪽

"내가 지켜야 할 가치가 절대적이라는 믿음이 사라지면, 똑같은 행동을 해도 훨씬 가볍고 즐겁다." - 236쪽

"하지만 내가 인정을 받아야 하는 그 '남'은 누구인가를 내가 정한다." - 253쪽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사슴을 증오하며 농사를 짓는 대신 사슴처럼 살기로 한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농사꾼, 박혜윤의 삶은 독자들에게 '그게 가능해?'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이렇게 사는 소박한 삶의 방식도 가능하고 충분히 의미가 있음을 가만히 전파한다. 이들이 사는 모습이 '자본주의의 변두리에서 발견한 단순하지만 완전한 삶'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4인 가족의 일상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충만하다.

늘 내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욕망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는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소금 같은, 모처럼 만나는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쉬운 책이다. 저자의 다음 책을 빠른 시일 내에 만나볼 수 있길 희망한다. 윤회를 거듭하는 내 책장에서 이 책의 유통기한은 무기한이다. 어반자카파의 <널 사랑하지 않아>를 다시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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