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차게보단 벅차게 - 전역 후 나 홀로 세계 일주
우승제 지음 / 바른북스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때에 따라 러시아와 남극보다도 춥다는(!) 강원도 철원의 백골 부대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2017년 2월 11일 자로 만기 제대한 우승제 병장은 복무 기간 중에도 여행의 꿈을 만지작거리며 키워 '전역 후 나 홀로 세계 일주'에 도전한다. 많은 여행기 중에서 저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청춘유리의 <오늘은 이 바람만 느껴줘>였다고 하는데, 저자는 대부분 여행기가 여성들에 의해서 쓰였다는 사실에 의아해하기도 한다. 남성 작가들도 물론 여행기를 내지만, 아무래도 말랑말랑한 '갬성'이라든가 인스타에 올리기 좋은 팬시한 사진, 맛난 거 먹고 물 좋은 카페 가는 다소 트렌디한 여행이 대다수 독자들을 대리만족시키기 때문 아닌가 싶다.

아직 군기가 빠지지 않은 '진짜 사나이'(♩♪♬) 우승제는 치밀한 계획이나 넉넉한 예산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남아 있는 군인정신 '맨주먹 붉은 피'로 '어떻게든 되겠지 뭐' 자세로 세계 일주에 도전한다. 무모하게, 투박하게, 절실하게, 그리고 숨차게보단 벅차게!

"그때부터 막연하게 책을 낸다면 '스펙 싸움으로 치열하고 바쁘게 살기보단 가슴 벅찬 하루하루를 보내자'라는 뜻으로 <숨차게보단 벅차게>라고 짓자 마음먹게 되었어요." - 바른북스 저자 인터뷰 중에서

이 책의 출간 역시 맨땅에 헤딩하는 정신으로 여러 군데 출판사 문을 두드린 결과라고 한다.

대부분 여행기의 구성은 이렇다.

여행의 흥분과 설렘이 표현되고, 좋았던 기억과 감동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다가 생각지 못한 암초를 만나 삽질하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된다. 눈앞에 펼쳐진 멋진 광경을 열심히 사진으로 남기지만 그보다 강한 기억은 대부분 거기서 만난 사람들로 인해 생긴다. 길 위에서는 안 좋은 인간들도 만나지만, 예기치 못한 환대에 감동의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언젠가는 받은 만큼 돌려줘야겠다' 다짐한다.

<숨차게보단 벅차게>도 구성에 있어서는 이 패턴에서 크게 다르지 않지만, 책의 후반부 '여행을 가보지 않은 자, 여행을 한 번만 다녀온 자, 장기 여행자'로 대상을 구분해서 여행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인터뷰가 실려 있다. 일반적인 내용이라 굳이 왜 넣었나 모르겠고, 단행본에서 이 정도 분량을 잡아먹을 콘텐츠는 아니라고 본다.

저자에겐 근래 보기 드문 헝그리 정신이 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빡빡한 계획보다는 직접 부딪쳐서 해결을 보는 스타일이고, 애당초 넉넉한 여비를 들고 여행을 시작하지 않았다. 우승제의 여행은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 일주는 아니고, "대부분 유럽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 호주 워킹홀리데이 + 일부 아시아 여행" 정도로 볼 수 있겠다. 그는 아직 젊고 여행의 갈망이 강하니 아마 코로나가 종식되면 책에 밝힌 바대로 터키와 남미, 네팔 히말라야 트래킹에 도전할 거고, 머지않은 시일 내에 세계 일주는 완성되리라 예상되며 또 다른 여행기로 우리 앞에 나타날 확률이 높다.

 

여행의 출발 무슨 원대한 목표가 있어 런던을 택한 건 아니다. 단지 2017년 9월 11일 출발하는 날 가장 싼 곳이 런던이었기에 일단 시작을 런던으로 정했고, 그나마 도착해서 숙소 예약 바우처를 보니 도착일이 아닌 그다음 날로 예약이 되어 있어 잘 곳이 없었단다. 출발을 이렇게 하는 식이니 계획성과는 태평양만큼이나 거리가 있는데, '원래 계획 없이, 하염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거니는 여유로운 여행을 좋아하는' 타입이라고 고백하는 인물이다.

터키로 행선지를 잡았지만 비행깃값이 너무 비싸 고민하던 중 손님으로 왔던 아는 형의 연락으로 모로코 사하라 사막에 동행하고, 순례길 일정이 끝나자 일행들은 모두 각자 계획한 다음 행선지로 떠나지만 저자는 '다시 어딘가로 떠나야 했기에 휴대폰을 꺼내 들어 목적지를 찾기 시작'하고, 꿈꿨던 크로아티아 여행을 마치곤 제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슬로베니아로 향한다. 적응력과 즉흥성에 있어서는 진짜 갑이다. 놀라운 건 물가 비싼 일본에서 남은 돈이 8만 원뿐이었을 때, "돈이 없으니 일본으로 와서 밥을 사 달라"라는 농담 반 진담 반 문자에 호응해서 이틀 뒤 도쿄로 온 친구가 진짜 있었단 사실이다. 역시 친구를 보면 친구를 안다.

이 책에도 목표했던 곳을 방문했을 때의 감격과 흥분이 생생히 전달되는 순간이 있다. '여행의 성취'라고나 할까. 두브로브니크의 구시가지, 부다페스트의 야경,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사하라 사막의 장관(저자에겐 그간 다닌 여행지 중 가장 좋은 곳은 단연코 '모로코'라고), 사랑스러운 도시 류블랴나를 가진 슬Love니아... 여기에 고마운 인연들의 미담도 당연히 추가되지만.

그러나 정작 우승제의 여행기에서 기억에 남는 내용은 개고생한 이야기들이다. 워낙 이런 내용이 다른 여행기에 비해 많기도 하거니와 '여행의 성취'보다 저자는 이 부분 묘사에 강점이 있는 듯하다.

보통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기에 평균 배낭 무게는 6~8kg이라는데, 세계 일주 중에 (아마도 즉흥적으로) 결정된 순례길이기에 저자의 배낭은 18kg. 세상에나, 그걸 메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고? 이게 순례야 완전군장 행군이야. 혹시 저자는 군대 행군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던 걸까! 저자는 무소의 뿔처럼 그렇게 묵묵하게 순례길을 걷는다.

유럽 배낭 여행족이라면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함정, 소매치기를 당해 저자 역시 카드를 분실한다. 이후 여행은 보이는 한국인들에게 은행 어플로 먼저 계좌이체를 하고 atm에서 인출해 현금을 받는 식으로 여행을 지속했다는데 이 역시 아무나 도전해선 살아남지 못할 비기(秘器)다. 길에서 개한테 물리기도 하고, 먹은 음식이 잘못돼서 며칠 고생하고, 돈이 떨어지면 일을 해야 하고 일하다가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실수를 연발하고, 호주에선 질이 안 좋은 한국인들에게 호되게 당하고... 그렇게 해도 자금 사정상 하루 끼니는 1~2번 아니면 굶는 날이 태반이었고, 탄산을 먹으면 잠시나마 배부르니 콜라 1.5L로 이틀을 버티기도 했단다. 가슴이 벅차기보단 숨이 차온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 될 것 같다며 설레며 살아가거나, 당연한 일이라 여기며 무미건조하게 살아가거나, 나는 되도록이면 전자 같은 삶의 태도를 견지하려 한다." - 123쪽

낭만적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이고 투박한 여행기다. 어떤 독자들은 '뭐, 이렇게까지 해서 장기간 해외여행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마저 들 수 있겠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알고, 짝퉁의 판단은 명품을 잘 아는 자만이 익숙하다. 싸구려 숙소에서 아무리 베드버그에 시달려도, 밥 대신 콜라로 끼니를 때워도, 저가 비행기로 오랜 시간 불편한 비행을 해도 여행의 마력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2017.09.11 - 2019.11.28

중단 없이 여행을 한 건 아닌 걸로 보이지만, 책의 안쪽 날개에 표시된 저자의 여행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눈에 담은 풍경, 평범한 한국의 일상과는 다른 시간들, 길에서 만난 인연, 좌충우돌한 경험, 보고 들은 모든 기억은 저자 평생의 자양분으로 저장될 거다. 보통 여행기에서 기대하는 센티멘털한 감성은 아니지만, <숨차게보단 벅차게>는 군복 기운이 아직 덜 빠진 거칠고 격한, 그래서 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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