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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의 일을 냅니다 - 사장이 열 명인 을지로 와인 바 '십분의일'의 유쾌한 업무 일지
이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2월
평점 :
서울의 구도심 을지로에 수상한 가게가 생겼다.
인쇄소를 비롯한 타일, 아크릴같이 요즘은 그다지 인기가 없는 업종이 중심인 이곳의 막다른 골목 2층에 소주나 맥주가 아닌, 용감하게 '와인 바'를 차린 사람이 있다. 아니 정확히는 '사람들'이다.
'아로파 Aropa'는 나눔과 협동의 가치를 아우르는 단어로 남태평양 아누타라는 섬에서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단어라고 한다.(이 단어는 하와이로 넘어가서 아예 인사말이 됐다. 알로하~)
이 단어에서 영감을 얻은 사람들이 경제공동체 청년아로파를 만들었고, 그들의 첫 결과물이 바로 을지로 와인바 '십분의일'이고, <십분의 일을 냅니다>(이하 <십분의일>)는 십분의일 초대 사장인 이현우가 그 과정에 대해 쓴 책이다.
청년아로파의 운영 방침은 이렇다.
기존 멤버 중 새 멤버를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총회에서 신규 멤버를 추천하고 기존 멤버의 만장일치로 선발 여부가 결정된다. 만장일치인지라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멤버 영입이 안 된다.
십분의일은 멤버가 열 명이라 십시일반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멤버라면 월급의 10%를 회비로 내야 한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멤버의 숫자와는 무관하다.
본인 소득(기본급)의 10% 회비는
- 회사원 : 매년 한 번 월급명세서 공개
- 프리랜서 : 최근 3개월 소득의 평균
- 백수 : 최소 회비 10만 원
이런 거룩한 규칙으로 갹출되며, 전업으로 일하는 사업장 대표에게 이 돈의 일부가 고정급으로 지급되는 구조다.
정관에 근거하여 움직이고, 주요 사항은 매월 총회를 거쳐 결정되며 각자 적절한 임무를 부여받고 순번에 따라 가게에 나와 시시때때로 일을 돕는다. 전업인 사업장 대표 1명 정도를 제외하곤 모두 직업이 있는 멤버들이고, 이익공동체이긴 하지만 이들의 느슨한 연대는 기존의 틀로는 정의되지 않는다. 가장 흡사한 형태가 협동조합인 듯하지만 그와도 다르다.
2인이 하는 동업도 힘들다는데 '이런 식의 운영이 가능할까, 수익은 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을지로 와인 바 '십분의일'은 성업 중이고, 이후 '빈집 ; 비어있는 집'(와인 바), '아무렴 제주'(게스트 하우스), '밑술'(양조장)로 총 4개의 사업장으로 확장되고 있다.

저자 이현우의 전직은 드라마 피디였단다. 그래서인지 그가 쓴 이 책은 일단 재미있고 맛있게 읽힌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고, 몇몇 에피소드에는 작은 후일담까지 배치해 놓아 반전의 재미를 선사한다.
「2016년 10월 가오픈을 하고, 장사가 잘 될까 고민한다.
'과연 내년에도 여기서 생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
2019. 10. 22.
3년째 여기서 맞이하고 있다.
감사하고 지겹다.
내년엔 다른 데 가야지.」 - P 159
저자가 그랬듯, 십분의일 멤버들이 그랬듯 대부분 직장 생활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드물다.
직장 생활을 하면 작게라도 내 사업을 하는 꿈을 꾸고, 자영업을 하다 보면 코로나19와 관계없이 또박또박 급여가 나오는 봉급쟁이 생활이 그리운 법이다.
많은 독자들은 <십분의일>을 읽으며 자극받고 '나도 주위 지인, 친구들과 한 번 도전해 봐?'하는 생각이 들 거 같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전업이 아니라면 급여의 1/10만 내고 그래도 내 가게니 하는 생색도 낼 수 있고, 고단한 직장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나만의 '아지트'도 만들고... 손해만 안 보면 할 만하지 않을까!
망해봐야 1/10이고, 그래도 10명이 홍보 영업하고 함께 머리 맞대면 낫지 않겠는가.
당장 추리소설을 함께 읽는 모임 멤버들과 북 카페 모델에 적용해 보고 싶을 지경이다.
저자는 식욕, 성욕 다음으로 인간의 세 번째 욕망은 혼자 있기를 싫어하는 '무리 짓고 싶은 욕구'를 꼽는다고 한다. 본인의 성향이 여기에 부합하는지, 십분의일 모델에 도전하기 앞서 반드시 고려해 봐야 할 점검사항이다.

저자는 비교적 낭만적으로 청년아로파의 결성과 십분의일의 안착을 그려 냈지만 그게 그리 수월한 일만은 아니었을 거다. 비가 새서 물을 받아야 하는 가게를 낭만으로 볼지 궁상으로 볼지는 당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십분의일은 망하지 않고 버티고 있을 뿐 아니라, 사업 모델이 확장하고 있기에 이런 책도 나오게 되었다.
과정이 아름다운 데다 결과마저 기대 이상인 이런 미담은 계속 되어야만 한다!
좋은 책은 읽고 나서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낸다.
일단은 힙지로에 위치한 스웩 넘치는 '십분의일'을 방문해 보자. 그래서 시그니처 메뉴라는 '짜파게티 그리고 계란 치즈'에다 와인 한 잔하고, 혹시 사장님인 저자가 있다면 책 잘 읽었다고 수줍게 사인도 요청해 보고... 이단은 그 이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