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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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시온은 기본적으로 '외길 인생'에 대해 찬탄과 존경을 보내는 작가다.

<배를 엮다>에서는 '대도해'라는 일본 국어사전을 만드는 이들의 장장 15년 세월을 담담하게 다루었는데, <사랑 없는 세계>에서는 식물 연구에 매진하는 대학 연구소가 무대다.

<배를 엮다>가 사전에 미친 이들을 다루었다면, 이번엔 그 대상이 식물이다.

사전 편집부의 '마지메'가 마쓰다 연구실의 '모토무라'로 재탄생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이들 모두 세상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묵묵히 하는 전문가 집단이다. 도대체 누가 애기장대에 관심이 있고, 기공이 인쇄된 옷을 입는단 말인가!

소설의 상당 부분 연구소 리포트를 보는 듯한 상세하고 집요한 묘사로 이 작품은 '식물학 로맨스'라는 명칭을 얻었고, 작가는 흔하지 않은 소재에 도전한 노고를 인정받아 일본 식물학회의 특별상을 수상했다.


장인 정신으로 따지자면 남자 주인공인 후지마루도 부족하지 않다.

아직 30세도 되지 않았지만 요리로 인생 승부를 걸겠다는 노선이 확고하기에, 종업원은 자기 혼자뿐인데도 불구하고 작지만 맛있는 양식당 '엔푸쿠테이'에서 식당 주인 쓰부라야를 사부로 모시고 온갖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수련 생활을 이어간다.

그런 그가 배달을 하던 중 만난 모토무라에게 반하게 되는데 그녀는 본인이 연구하는 식물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 그녀도 주위를 맴돌며 계속 은근한 애정을 보여주는 성실한 후지마루가 싫은 건 아니지만.

"식물에는 뇌도 신경도 없어요. 그러니 사고도 감정도 없어요.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왕성하게 번식하고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환경에 적응해서 지구 여기저기에서 살고 있어요.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식물을 선택했어요. 사랑 없는 세계를 사는 식물 연구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누구하고든 만나서 사귀는 일은 할 수 없고, 안 할 거예요." - P 96

이런 초강력 실드라니!

독자들은 아무리 그래도 결국 후지마루의 사랑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없다'고 모토무라를 공략하여 애정이 꽃 피는 결말을 기대하기 십상이나 미우라 시온은 그런 독자들의 애타는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없다.

다시 한번 소설의 제목을 보라. "사랑 없는 세계!"

식물학에 대한 세부 묘사가 다소 독자들을 질리게 만드는 경지지만, 그래도 <사랑 없는 세계>에는 미우라 시온의 장기가 다시 한번 발휘되어 있다. '전문가 소설'로 칭해도 좋을 만큼 특정 직업에 대한 엄청난 취재와 연구를 거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온기"말이다.

모토무라는 본인이 심혈을 기울여 진행하던 실험의 최초 설정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고민에 빠진다.

그때 그녀에게 가장 마음에 와닿는 조언을 해 준 사람은 지도 교수나 팀원들이 아닌 비전문가 후지마루였다.

이 과정을 거쳐 그녀는 '그것만이 내 세상'을 다른 면에서 볼 수 있게 되었고, 본인이 그렇게 사랑하는 식물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도 큰 위안과 힘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반면 후지마루는 사랑하는 상대가 그토록 좋아하는 '연적' 식물에 대해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본인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된다.

비록 본인이 원하는 사랑을 얻지는 못했으나, 이 과정을 거쳐 두 명의 주인공은 분명 한 뼘 이상 성장했다.

결국 이 소설은 "일과 사랑에 열정을 다하는 이들의 따사로운 성장의 기록"인 셈이다.

최근 식물 기르기에 재미를 붙이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은 주저 없이 <사랑 없는 세계>에 빠져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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