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패티 유미 코트렐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같이 한국에서 입양된 남매가 있다. 그간의 관계가 그다지 살갑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남매는 남매인지라 남보다는 서로 잘 안다 생각하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남동생의 자살 소식을 접한다. 누나는 남동생 자살의 미스터리를 풀고자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의절 상태인 고향집을 방문하는데... 」


연예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도 자살이란 하나의 우주가 사라지는 의미다.

거기에 분명 합당한 이유와 사연이 없을 리 없다.

"내가 신뢰하는 정신건강 웹사이트에 갔는데, 공통적으로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 여섯 가지를 제시해놨더군요.

1) 병리학적 특성 2) 우울증 3) 무분별 4) 비이성적 태도 5) 건강 문제 6) 자제력 상실."(P 100)

남동생의 자살은 이 분류 중 어디에 속할까?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인생을 살았나?

"내 동생은 평생 한결같았다. 변한 적이 없다. 만약 걔가 러시아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다면적이지 못한 평면적 인물이었을 것이다. 걔는 굶주리는 농부처럼 살았다."(P 72)

"걔한테 애인이 있었을까? 궁금했다. 섹스는 해봤을까? 아니, 인생 대부분을 방에서 보낸 내 입양아 남동생이 섹스를 했을 리 없었다."(P 73)

"동생은 평생 날마다 입은 하늘색 폴로셔츠 차림이었는데, 어쩌면 자살한 날도 같은 옷을 입었을지 모른다."(P 90)

"내 입양아 남동생은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외국에 가본 적이 없고, 운동도 하지 않았으며, 양부모와 토머스 같은 사람들하고만 이야기했고, 컴퓨터로 영화와 스포츠 경기를 봤으며, 방 안에서 항상 배경을 삼아 책상 위에 선풍기를 켜놓았다. 걔는 조용한 것들을 좋아했어."(P 134)

이런 행동 양태를 일컫는 단어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

히키코모리는 아예 방 안에서만 주거하기에, 최소한의 사회생활을 영위한 남동생과는 다르지만 그의 식물성 삶의 기질과 성향은 비슷하다 하겠다.

그는 삶에 큰 의욕 혹은 애착을 보이거나 원대한 야망을 보인 적이 없다. 누나의 추적에 의해 밝혀진 사실은 그는 오랫동안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고 준비해 왔으며, 생모와 연락이 되어 한국을 방문하지만 정작 만남은 회피한다.

그는 결국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마지막 권리, 자신의 삶을 끝장낼 권리를 행사한다.

그리고 유언처럼 컴퓨터 휴지통에 문서 하나를 남겼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 인생이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남들 눈에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겠지만, 내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 P 222


이번에 소설의 화자, 누나인 '헬렌 모런' 차례다.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

투어를 따라다닐 만큼 피오나 애플의 팬이었고 한때 지역에서 예술가 활동을 했으나 지금은 별명이 '믿음직 언니'로 방과 후 문제 학생 감독관 노릇을 하고 문제 학생들에게 처방하는 마리화나라는 특별한 의약적 개입의 전도사이기도 하다.

"나는 폭력적이고 분노로 가득 찼으며, 매일매일 평온을 위협하는 존재였다."(P 97)

말 한마디면 주위 사람들 학을 떼게 만드는 특별한 재주를 가졌기에, 양부모를 비롯한 주위 사람 모두에게 존재 자체가 '껄끄러움'이다. 심지어 남동생의 거의 유일한 친구 토머스에게조차 한 번 만나고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얻어낸다. 우연한 두 번째 만남에서 토머스는 헬렌에게 말한다.

"거울은 아예 안 보고 삽니까? 항상 미친 여자 같은 표정이잖아요. 아마 몰랐겠죠. 정말입니다."(P 174)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나를 무성無性으로 여겼다."(P 173)

"내가 보기에 누나는 아직 진단만 안 받았을 뿐 조울증 환자이거나 조현병 환자 같다. 하지만 그 상태로 용케 그럭저럭 살아가는데, 옷차림을 보면 노숙자나 다름없는 누나가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일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P 217)

어디로 튈지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는, 이쪽이 자살했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을 캐릭터다.

소설의 제목은 헬렌이 주위 사람들에게 사과할 때 쓰는 말에서 따왔다.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미안해요'는 내가 사과할 때 쓰는 말이다."(P 117)

한국계 입양아 패티 '유미' 코트렐은 실제 소설 속 상황과 같은 일을 겪었다. 같은 한국계 입양아였던 남동생이 자살한 것.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얼마나 자전적인 내용이냐고?"

당연히 작가는 부인한다. "이 소설은 대단히 사적이지만, 내게 일어난 일을 염두에 두고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당연히 독자들은 믿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0에서 100까지 점수로 낸다면, 최소 50점 이상은 나올 거라고."

그 비중이 어느 정도였든 간에 어쨌든 자신이 겪은 심연의 바닥에서 순식간에 길어 올려진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소설의 첫 페이지 "케빈에게"를 통해 적어도 우린 소설 속 남동생이 아닌, 작가의 자살한 남동생 이름은 알 수 있다.

주인공 헬렌의 의식의 흐름을 주로 따라가는 이 소설에는 대화도 많지 않다.

미국에서 독립출판된 이 책은 심리 묘사가 대부분인지라 번역이 쉽지 않았을 텐데 이원경이 섬세하게 우리 말로 옮겼다.

소설 읽기에 숙달되지 않은 독자들에겐 큰 재미가 없고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을 듯하지만, 우리는 한국계라 더욱 응원하고픈 패티 유미 코트렐이라는 아주 예민한, 날선 칼날 같은 작가의 출발을 만난다.


그림엽서에서 흔히 보는 사진.

잔잔하고 맑은 호수에 산봉우리를 비롯한 주변 경관이 그대로 비친다.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은 거기에 이는 작은 파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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