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을 스쳐 지나가는데 코끝에 포도향이 맴돌았다. 플리마켓 이후로 이이월은 이 센터에서 유일하게 포도향을 내는직원이 되었다. 역한 냄새들 사이로 은은한 포도향이 풍기면,
근처 어디엔가 그 애가 있었다. 방독면을 쓰고 일을 하는데도이상하게 그 포도 향이 선명했다. 신기한 일이지. 전부 똑같은작업복에 방독면을 썼는데도 그 애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주 일방적이지만 꼭 그 애와 연결된 기분이었다. 나는 흔하고흔한 사과 향 사이에 숨어서 그 애의 기척에 반응했다. 처음에는 혹여 이상한 기미는 없는지 감시하기 위함이었는데 나중에는 습관이 되었다. - P170

그런 나에게 한 뼘 정도 떨어져서 옆에 서 있던 처음 보는 아이가 말을 걸었다. 방금 웃었지 하고, 나는 그때도 정색하고 답했다.
"아니."
사실은 웃었는지도 모른다. 주영은 다 안다는 듯이 싱글거리며 "아님 말고." 답한 뒤 금세 타깃을 돌려 다른 애들에게 시답잖은 말을 걸어 댔다.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주영은 오리엔테이션 내내 심심하다는 얼굴로 기지개를 켜거나손가락을 움직이거나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며 작은 소란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생각해봐도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다. - P140

늘 그렇지만, 작가의 말을 마무리 짓는 일은 매번 어렵네요. 모쪼록 이월과 모루의 여정을 즐겁게 상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월의 이름은 입춘이 든 달에서 따왔습니다. 모루의옆에 타고 있는 것은 봄이니, 설원을 달리는 과정이 많이 춥지는 않을 것입니다.

2021년 2월조예은 - P228

이 소설은 거듭해서 말해준다. 멸망을 눈앞에 두고도 사실은 죽지 못해 꾸역꾸역 살아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모두 외면하는 멸망의 진실이다.
그런데 『스노볼 드라이브』의 아름다운 순간은 모루와 이월이 그 진실을 너무나 처절하게 직면하면서도, 여전히 눈길 위로 달리기를 선택하는 장면들에 있다. 그들은 세계를 포기하기 위해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이 끔찍한 세계 속에서도 함께 있을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떠난다. 모루와 이월의 여행을 따라가면서, 그들이 설원 위에 긋는 무수한 자국들을 상상한다. 또다시 그 위에 눈이 쌓이더라도, 오직 내달리는 사람의열기만이 이 세계를 조금씩 녹인다는 것을 이제는 어쩐지 알것 같다. 언젠가 눈이 내리고 내려서 더 내릴 눈이 없는 어느날을, 눈길 위에서 처음으로 겨울의 끝을 목격하는 두 사람의 얼굴을 그려 보고 싶었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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