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할 수도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를 강타한 것은 국가적인 비극에 대한 감정이었다. 거기서 느낀 경악과 비통함이 무엇에든 배어 있어서 개인적인 비극이나 불행은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이 처해 있는 전체적인 상황의 무게가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일들에 관한 느낌도 한층 강렬해졌다. 사막에 홀로 솟아 있는 무덤이 바로 주위를 둘러싼 광활한 사막 때문에 더욱 외롭게 보이는 것과 같았다. - P343

그는 수치심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면서 또한 자신과 이 시대, 그리고 자신같은 인간을 만들어낸 주변 상황에 쓰디쓴 실망을 느꼈다.
매주, 매달, 죽은 자들의 이름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개중에는먼 과거의 기억처럼 단순히 이름으로만 기억되는 사람도 있었고,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얼굴이 함께 떠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목소리,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를 때도 있었다.
그동안 내내 그는 강의와 연구를 계속했지만, 때로는 맹렬한폭풍 앞에서 등을 구부리는 것이나 질 나쁜 성냥의 흐릿한 불꽃을 양손으로 오목하게 감싸는 것처럼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347

상실감, 그가 너무나 오랫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그 상실감이 쏟아져 나와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의지를 넘어 그 흐름에 휩쓸리는자신을 내버려두었다. 자신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억을 향해 미소 짓는 것처럼. 이제자신은 예순 살이 다 되었으므로 그런 열정이나 사랑의 힘을 초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함, 초연함 밑에 그것이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렬하고 꾸준하게. 옛날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던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그는 자신을 노인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가끔 아침에 면도를 하다가 거울을 보면 그 속에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마주 바라보는 얼굴에 결코 동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기괴한 가면 속에서 눈빛만 선명했다. 마치 자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터무니없는 변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하얗게 세어버린 그 덥수룩한 눈썹, 헝클어진 백발, 앙상한 뼈 주위로 늘어진 살, 나이 든 척하는 깊은 주름살들을 모두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P353

하지만 그는 늙은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대전이 끝난뒤 온 세상과 자기 조국의 병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증오와 의심이일종의 광기가 되어 신속히 퍼지는 역병처럼 전국을 휩쓸었다. 젊은이들은 또다시 무의미한 파멸을 향해 열렬히 행진하며 전쟁터로향했다. 악몽이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그가 느낀 연민과 슬픔은너무나 오래돼서 그의 나이의 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세상사가 자신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휙휙 흘러갔다. 그리고 그는 세월이 지나가는 것을 거의인식하지 못했다. 1954년 봄, 예순세 살 때 그는 자신이 교단에 설수 있는 기간이 기껏해야 4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는 그 이후의 삶을 그려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않았다. 굳이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 P354

세월이 정말이지, 날 듯이 흐르고 있어! - P355

이제는 한 가지 일에 계속 정신을 집중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생각이 흘러가곤 했기 때문에, 가끔 정신울 차려보면 자신도 출처를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 P381

두 사람 모듀 사랑했던 그 반항적인 청년의 유령은 ㅈ금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두 사람 자신도 결코 꺄닫지 못할 만큼 깊은 우정으로 그들을 묶어주고 있었다 - P385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로, 몰려드는 시시한 일둘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 P387

그가 힘들게 눈을 떴다. 그가 느낀 것은 빛이었다. 오후의 밝은 햇빛, 그는 눈을 깜박이며 창문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눈부신 태양 가장자리를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이진짜라는 결론을 내렸다. 손을 움직여 보았더니 몸속에 묘한 힘이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공기 중에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통증이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기운이 더 많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살갗이 찌릿찌릿했다. 얼굴에 닿는 빛과 그림자의 섬세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 옆의 벽에 등을 기댄 채 반쯤 앉은 자세를 취했다. 이제 문 밖의 모습이 보였다.
긴 잠을 자고 일어나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늦봄 또는 초여름……… 풍경을 보니 아무래도 초여름이지 싶었다. 뒷마당의 커다란 느릅나무 이파리들이 풍요롭게 반짝였다. 그 느릅나무 그늘은그도 전에 경험한 적이 있는 깊이와 서늘함을 담고 있었다. 공기가진하게 느껴졌다. 풀과 이파리와 꽃의 향기로운 냄새에 묵직함이잔뜩 섞여서 그 향기들을 허공에 묶어두고 있었다. 그는 다시 숨을들이쉬었다. 깊숙이 긁히는 것 같은 자신의 숨소리가 들리고, 여름의 달콤함이 허파 속에 쌓이는 것이 느껴졌다.
또한 그 들숨과 함께 자신의 안쪽 깊숙한 곳 어딘가가 움직이는것이 느껴졌다. 그 움직임은 뭔가를 멈추게 하고, 그의 머리를 움직일 수 없게 고정해버렸다. 하지만 이내 그 느낌이 사라졌다. 그는 생각했다. 그래, 이런 느낌이구나. - P389

이디스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그녀를 부르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죽음은 이기적이야. 그는 생각했다.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하지. 아이들처럼.
그는 다시 숨을 쉬었지만, 그의 몸 안에서 뭐라고 꼭 집어 말할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지식 같은 것을. 세상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인 양 느긋해도 될 것 같았다.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리자 그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학생들 몇 명이 뒷마당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어딘가로 서둘러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모두 세 쌍이었다. 여학생들은 팔다리가 길었으며, 가벼운 여름옷을 입은 모습이 우아했다. 남학생들은 즐겁고 경이로운 표정으로 여학생들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들은 잔디밭에 거의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걸었다. 그래서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는 시야를 점점 벗어나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여름날 오후에 어딘가멀리서 아무것도 모른 채 터뜨리는 웃음소리.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 P390

선하고 참을성 많고 성실한 성격이었으나 현명하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불굴의 용기와 지혜로 난관을 극복하기보다는 조용히 인내하며 기다리는 편이었다. - P393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허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작가 인터뷰 - P3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지 않아도, 정말 괜찮았다. 이쪽에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빙글빙글, 그를 가운데두고 궤도를 돌 수 있다면. - P29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끊임없이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세계에 예수와 부처의 세계에,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세계에, 테슬라와 에디슨의 세계에,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세계에, 비틀스와 퀸의 세계에,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세계에 포함되고 포함되고 또 포함되어 처절히 벤다이어그램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말이다. - P37

캐나다에서 주영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자신은 아폴로의 부속 위성이라고, 감자처럼 울퉁불퉁한 작은 위성이라서, 아폴로를 잃는 순간 궤도에서 떨어져나가 빙글뱅글 어둠 속을 떠돌 수밖에없다고………… - P50

오늘은 유리의 목소리에서 칼칼함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갑각류같은 사람, 겉껍질 안쪽엔 부드럽기가 그지없었다 - P76

한아가 기억하는 경민은 언제나 공기를 자기만의 색으로 채색하는 사람이었다. 이국적인 음식 냄새 한줄기에 한아의 손을 이끌고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맨 다음 끝내 새로운 식당을 찾아냈고, 사진한 장을 보고 이름도 낯선 나라에 반해 그 나라의 모든 자료를 흡수하며 마치 전생에 거기서 태어났던 사람처럼 1년 내내 그곳 이야기를 해댔다. 경민의 여행 준비는 그렇게나 대대적이었다. 한아도 경민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쉽게 전이되는 흥분을 싫어하지 않았다. 매일 경이를 느끼는 사람, 바깥에 대해 늘 궁금해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건 즐거웠다. 경민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재생시켜야 한다고 다짐한다. 어딘가 한아 안에 4K 화질로 저장되어 있을 거라고. - P90

"그리고 반해버린 거지.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바람에, 우리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거? 하지만 첫번째로널 보고 널 생각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망원경은 몸의 일부로 만든 것이라서, 본체가 꿈을 꾸고있을 때는 스스로 움직여. 대개는 어떤 일관성 없이 그저 산발적으로 우주의 곳곳을 비추고 있지. 그런데 내 망원경은달랐어. 깨어나서 내가 잠든 동안 어디를 비췄는지 체크해보면 꼭 비슷한 지점을 스쳐갔더라고. 지구에서도 아주 좁은 면적을 우주가 얼마나 넓은데 그건 너무 이상한 일이었어. 그래서 한동안 잠들지 않고 계속 그 근처를 살폈지. 곧 망원경이 뭘 보고 있었는지 알았어. 그러니까, 웃기지? 나보다 내 망원경이 더 먼저 널 사랑한거야." - P101

"어떤 특별한 사람은 행성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한텐 엄청분명한 문제예요. 난 따라갈 거야 내 아티스트" - P118

"말 그대로 스타라니까. 중력이 없으면 스타겠어요? 벗어날 수 있었으면 나도 다르게 살았지. - P119

정규가 손을 내밀었으나 주영은 좀 꺼림칙했다.
"엥, 악수는 좀 그렇다. 티켓이 가버리면 어떡해."
"그런 원리는 아닐 거 같긴 한데."
14그래도 모르니까 두 사람은 어깨를 서로 살짝 부딪쳤다.
"조심하세요."
"가서 구할 수 있으면, 나도 티켓 보내줄게요. 휴가 와요."
"올해 휴가 일수 안 남았기 때문에."
주영과 정규가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둘은 다시는 서로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그 만남은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었고 훗날 종종 서로를 생각하며 웃게 되었다. 그렇게 이상한 경험을 함께한 사람, 기억나지 않을 리가.
동시에 웃었던 적도 있다. 한 사람은 서울에서, 한 사람은 우주 투어 길에서. - P124

문득 생각했다. 역시 보고 싶네. 보고 싶잖아.
그렇지만 뭔가 달랐다. 원래의 경민을 보냈을 때의 그런 몸이 간질간질하고 신경이 쏠리고 불안해지는 보고 싶음이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심해를 헤매고 있어도 이어져 있는 보고 싶음이었다.
기다리는 게 즐거울 수도 있구나. 이건 또 새로운데? 한아는 계단에 앉아 생각했다. - P151

나와 똑같은 누군가는 외로움에 전혀 도움이 안 돼 - P156

"우주의 광막함을 견디고 싶지 않고, 긴 여행에 필요한한정된 자원을 미래 세대에게 양보하고 싶대."
그래서 한아와 경민은 어쩔 도리 없이, 먼 곳의 문명이 그대로 녹아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투명하고 둥근, 조금씩 무늬가 다른 한 장 한 장의 날개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끝의 끝까지 눈부신 형상이었지만, 다시는 목격하고 싶지않은 장면이기도 했다.

한아는 이후 채 겪어보지 않은 광막함에 대해 계속 떠올렸고, 우주가 언제나 광막한 곳이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마음속에도 그것이 일부 녹아들지 않았을까 여기게 되었다. 누군가는 어렴풋하게, 누군가는 살을 찔러오는 강렬함으로 안쪽의 춥고 비어 있는 공간을 더듬는 것이다. 얼음 무당벌레들이 지독하게 느끼는 편이었을 뿐, 우리는 모두 이어둡고 넓고 차가운 곳에 점점이 던져져 있지 않은가? 부디 탈출한 자들이, 더 오래 변하지 않을 보금자리에 잘 도착하기를 여행이 그들을 너무 바꾸어놓지는 않기를. - P161

"그야 그렇지만 거대한 산업용 컨베이어벨트 위에 실린느낌이었다고. 아주 개인적인 행사인데 전혀 개인적이지 않았어."

웨딩이야기 - P177

"너무 쪽팔려하지 마. 지구는 아직 평화롭지 않지만, 그래도 위대한 정신들이 자주 태어나는 멋진 별이야. 넌 어슐러 르 귄이랑 몇 년이나 같은 별에 살았잖아. 그건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일이야. 끝까지 노벨문학상을 안 주다니, 멍청이들." - P183

한아는 돌아온 경민을 엑스라고 불렀다. 대놓고 부를 일은 없었으므로 3인칭으로만 부르며, 그렇게 짧게 흔히들 쓰는 말로 함께한 시간을 깎아버렸다. 차마 경민이라고 부를수는 없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민은 언제나, 단절 없이, 연속적으로 한아가 사랑하는 존재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 P193

한아는 경민에게 온 체중을 실어 안겼다. 경민의 오래된 스웨터에서 먼지 냄새, 바람 냄새, 시간 냄새가 났다. 한아는 그 순간의 두 사람이 얼마나 완벽하게 꼭 들어맞는가를가만 느끼고 있었다. 우주가 그들을 디자인했다. 재단하고 완벽한 스티치로 기웠다. 한아는 그 솜씨를 죽었다 깨도 못따라 하리라는 기이한 감탄에 빠져들었다. - P216

그것은 매듭 이후, 끊임없이 이어질 달콤한 하루의 첫날. 셀 수 없을 키스 중의 첫 키스였다.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우주 가장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러브 스토리의 시작이면서, 끝이었다. - P217

주영과 유리는 아껴 마지않는 친구들의 이름입니다. 그친구들의 빛나는 부분을 채 담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10년 동안 이름을 빌려줘서 고맙고, 10년 더 빌려주면 좋겠습니다.
아마 다시는 이렇게 다디단 이야기를 쓸 수 없겠지만, 이 한 권이 있으니 더 먼 곳으로 가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2019년 여름
정세랑 - P2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월을 스쳐 지나가는데 코끝에 포도향이 맴돌았다. 플리마켓 이후로 이이월은 이 센터에서 유일하게 포도향을 내는직원이 되었다. 역한 냄새들 사이로 은은한 포도향이 풍기면,
근처 어디엔가 그 애가 있었다. 방독면을 쓰고 일을 하는데도이상하게 그 포도 향이 선명했다. 신기한 일이지. 전부 똑같은작업복에 방독면을 썼는데도 그 애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주 일방적이지만 꼭 그 애와 연결된 기분이었다. 나는 흔하고흔한 사과 향 사이에 숨어서 그 애의 기척에 반응했다. 처음에는 혹여 이상한 기미는 없는지 감시하기 위함이었는데 나중에는 습관이 되었다. - P170

그런 나에게 한 뼘 정도 떨어져서 옆에 서 있던 처음 보는 아이가 말을 걸었다. 방금 웃었지 하고, 나는 그때도 정색하고 답했다.
"아니."
사실은 웃었는지도 모른다. 주영은 다 안다는 듯이 싱글거리며 "아님 말고." 답한 뒤 금세 타깃을 돌려 다른 애들에게 시답잖은 말을 걸어 댔다.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주영은 오리엔테이션 내내 심심하다는 얼굴로 기지개를 켜거나손가락을 움직이거나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며 작은 소란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생각해봐도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다. - P140

늘 그렇지만, 작가의 말을 마무리 짓는 일은 매번 어렵네요. 모쪼록 이월과 모루의 여정을 즐겁게 상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월의 이름은 입춘이 든 달에서 따왔습니다. 모루의옆에 타고 있는 것은 봄이니, 설원을 달리는 과정이 많이 춥지는 않을 것입니다.

2021년 2월조예은 - P228

이 소설은 거듭해서 말해준다. 멸망을 눈앞에 두고도 사실은 죽지 못해 꾸역꾸역 살아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모두 외면하는 멸망의 진실이다.
그런데 『스노볼 드라이브』의 아름다운 순간은 모루와 이월이 그 진실을 너무나 처절하게 직면하면서도, 여전히 눈길 위로 달리기를 선택하는 장면들에 있다. 그들은 세계를 포기하기 위해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이 끔찍한 세계 속에서도 함께 있을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떠난다. 모루와 이월의 여행을 따라가면서, 그들이 설원 위에 긋는 무수한 자국들을 상상한다. 또다시 그 위에 눈이 쌓이더라도, 오직 내달리는 사람의열기만이 이 세계를 조금씩 녹인다는 것을 이제는 어쩐지 알것 같다. 언젠가 눈이 내리고 내려서 더 내릴 눈이 없는 어느날을, 눈길 위에서 처음으로 겨울의 끝을 목격하는 두 사람의 얼굴을 그려 보고 싶었다. - P2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른들도 우리를 둘러싼 소문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과구의 부모님은 구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 잘 알면서도, 우리가더럽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구와 나를 추궁했다. - P40

구에 대한 생각이 옅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자,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구는 엄청나구나. 구 대신 들어온 다른 것들이 터무니없이 옅고 가벼워서 구의 밀도를 대신하지 못했다. - P50

빛과 그림자처럼, 현실도 상상도 적당하지 않았다. 현실에서는 담이 눈조차 바로 보지 못하면서 상상에서는 담이 살 어느곳이든 맛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음 속 욕망과 금기의 주머니는 공평하게 커져갔다. 담을 보는 것도 괴로웠고, 보지 않는것도 괴로웠다. 더 가까워지고 싶었고 행여 더 가까워질까 겁이 났다. 담이 앞에서만큼은, 나는 나를 최고로 경계해야 했다.
담은 나와 달랐다. 평온한 들판에 산책이라도 나온 듯 나를만나는 것 같았다.
그 점이 서운하기도 다행스럽기도 했다. - P58

하지만 기다림은 공장 문 앞이 아니라 구와 헤어질 때부터시작되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학교에 있을 때도 내내 구를기다렸다. 만날 시간은 분명 정해져 있고, 그때가 아니면 만날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 마음은 항상 대기 중이었다. 오분, 삼십 분,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 종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심지어 구와 함께 있을 때에도 구를 기다리는 기분이었고, 구가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내가 구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를 끝없이 기다린다는 뜻일까. - P65

힘든 일할 때 시간이 빨리 가면 좋잖아.
주저하다가 물었다. 그 속도로 내 삶이 지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좀……… 무서워. - P67

걔들 사귀는 거 보면 좀 유치해 자전거가 이번에는 왼쪽으로 휘청 쏠렸다. 넘어지려는 자전거 핸들을 구가 잡았다. 그래서 너는 누구랑 유치해지고 싶은데? 구가 놀리듯 물었다. 노마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나한테 친절하면 좋겠어. - P77

나의 미래는 오래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향과 알코올과 탄산이 다 날아간 미적지근한 그 병에 뚜껑만 다시 닫아놓고서 남에게나 나에게나 새것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았다. 영영 이렇게 살게 될까봐 겁이 난다고, 담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 P90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과 부모님을 이해한다는 말이 같은 뜻은아니었기에, 아버지와 악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며 아버지 힘드시죠, 라는 눈빛을건네고 싶진 않았다. 원망하지도 않지만 이해하지도 않는 선.
그 선을 지키는 것이 내가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P99

뜨거운 하루였다. 세상이 보온밥솥에 담긴 밥 한 그릇 같던날씨, 사람들은 찐득하게 엉긴 밥알처럼 서로를 못 견뎌했다.
무자비한 태양이 산 너머로 사라진 후에도 열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밤늦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교복도 벗지 않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몸에 간신히 남아 있던 영양분이 모두바닥난 느낌이었다. 여름도 겨울도 잔인하다. 잔인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잠들었다가 빗소리에 눈을 떴다. 깜깜한 바깥에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내릴 낌새라곤 전혀 보이지않았는데,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그 시계의 건전지를 구가 두어번 갈아줬었다. 이모도 나도 시계가 멈추는 걸 신경쓰지 않았다. 건전지를 갈아야지, 생각만 하고 아직 멈추지 않은 다른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곤 했다. 집 안의 모든 시계가 멈춰버렸을때는 그저 느낌만으로 시간을 점쳤다. 그 시계를 구가 다시 움직이게 했었다. - P109

그새 겨울이 다 지나고, 봄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이미 여름도 절반이니까 - P110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과 니가 알아서 하라는 말을 많이 했다. 예전에는 나를 보면 안쓰럽고 신경쓰여 절로 눈물이 나면서도 그게내 처지 때문인지 자기인생 때문인지 헷갈렸는데, 헷갈려서자꾸 잔소리를 하고 간섭했는데, 더는 헷갈리지 않게 된 거다.
헷갈리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다해서.
내게 줄 마음을 다 줘버려서.
더는 내가 생생한 생물 같지 않아서. - P120

발소리는 멈추고 애꿎은 봉지 소리만 골목을 메웠다.
·····왔어?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다가, 담이 먼저 말했다.
밥은 먹었어?
어제 본 사람처럼 내게 말을 걸었다.
그건 뭐야?
내 손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검은 봉지를응, 소고기.
거의 삼 년 만에 만나, 내가 담에게 한 첫 말이었다.
"그래, 들어가자 국 끓여 먹자.
담이 문을 열며 말했다.
이거 등심인데, 꽃등심인데.
거의 삼 년 만에 만나, 내가 담에게 건넨 두 번째 말.
fogn물었다.
그래, 구워 먹자, 그럼.
나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담이 얼굴만 멍청히 쳐다봤다. 담이 내 손을 잡았다. 손목에 걸린 비닐봉지가 멀미하듯 덜렁덜렁 흔들렸다. 잡힌 손이 아프고 부끄러웠다. - P139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사람은 뭐든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사기를 친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작살낼 수 있다. 그리고구원할 수도 있다. 사람은 신을 믿는다. 그리고 신을 이용한다. - P163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빠져나왔대.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이 얘기를 담에게 꼭 해주고 싶었는데 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해주고 싶었냐면, 나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 P166

그때는 네 옆에 잠시라도 있으려면 널 괴롭혀야 했다. 너와 눈을 맞추려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네게 알리려면, 너에게 나란 존재를 새겨넣으려면, 다정하게 말을 걸 수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너의 무표정을 보게될까봐 겁이 났다. ‘안녕‘ 하고 말했는데 ‘안녕‘으로만 끝날까봐.
아니, 그 인사조차 돌려받지 못할까봐.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겉치레 인사 말고, 너의 고유한 표정과 감정을 갖고 싶었다. 네 머리채를 잡아당기면 분명 네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화를내면서 하지 말라고, 아프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면 나는 깐죽거리고 싶었다. 왜? 왜 하면 안 되는데? 시비 걸 듯 놀리면서우리만의 특별한 시간을 고무줄처럼 쭉쭉 늘이고 싶었다. 그런데 너는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울었지. 내가 어쩌지도 못하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게 겁이 나서 신발이나 내던지는 내 앞에서.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너였는데, 내가 화를 내고 말았다 - P169

사랑하고 쓴다는 것은 지금 내게 ‘가장 좋은 것‘이다. 살다보면 그보다 좋은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더 좋은 것 따위, 되도록 오랫동안모른 채 살고 싶다.
2015년 3월, 일인용 의자에 앉아
최진영 - P1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