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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 숲으로 ㅣ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은 틀 같은 고시원 방에서 짐을 싸던 나는 책상 한 쪽에 놓여있던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주말엔 숲으로.’ 책의 겉표지에 그려져 있는 나무들의 풍성한 초록빛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이 책은 만화가이자 수필가인 작가의 만화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뿐만 아이라 그 속에 담긴 스쳐지나가는 듯한 조언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여주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숲에서 얻게 되는 많은 것들은 작은 상가 같은 고시원에서 벗어나 푸른 싱그러움으로 채울 수 있어 한 번쯤 쉬고 싶을 때면 이 책을 손에 쥐곤 한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결한 그림에 잔잔한 어투가 편안함을 주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여자들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공감을 통한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짱 시리즈는 물론 다른 책들도 읽었지만 ‘주말에 숲으로’는 곁에 두고 툭하면 꺼내봤던 책이다. 게다가 집을 나와 고시원으로 짐을 옮길 때 챙겨와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하고 있다.
오늘 나는 책장을 열고 숲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번역가로 영어책을 번역하는 일을 하는 하야카와. 그녀가 시골생활을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잡지 독자 선물에서 받게 된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주차 공간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은 생각을 현실로 옮겨 살기 시작한 하야카와, 그렇다고 직접 농사를 짓는 대신 주어지는 것들로 생활하는, 그러면서도 필요한 것들은 택배로 주문하는, 정말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웃들과 알게 되면서 기모노 입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아이들의 영어공부를 봐주기도 하고, 대신 카약을 얻기도 하고 텃밭을 가꿔주는 도움을 받기도 하며 시골생활에 익숙해져갔다.
하야카와의 친구인 마유미와 세스코는 하야카와를 찾아와 주말을 보내곤 했다. 출판사에서 경리업무를 맡고 있는 마유미, 여행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세스코, 둘은 회사일로 얻게 되는 스트레스는 물론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씁쓸함을 하야카와를 찾음으로써, 숲을 통해 마음을 달래고 이야기를 나누며 조언을 얻는다.
나는 하야카와, 마유미, 세스코와 함께 숲을 거닐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시골이나 숲에 대해 모르고 있던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하야카와를 통해 듣게 되는 이야기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하얀 눈 속에 피어있는 물파초를 통해 누가 보지 않아도 피는 싱그러움을, 추위에 강해서 질 부러지지 않는 너도밤나무를 통해 강한 게 아니라 부드러워서 눈이 쌓여도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는 강인함과 유연함을, 커다란 나무에 가려 햇빛도 못 보는데 살아가는 숲속의 잡초를 통해 강인함을, 하늘타리의 씨앗에는 하늘타리 나무가 되기 위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것처럼 우리들 마음속에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는 것도.......
지금까지 나는 실패와 위기의 순간이 오면 그냥 부딪치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의 ,주위의, 세상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리고 나서 마지못해 선택을 하고, 다시 또 되풀이 되고. 그러다보니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휴학을 하고 외무고시 준비를 해온 2년의 세월을 되짚어볼 겨를도 없이 마치 도망치듯 짐을 싸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세상이 짜 놓은 판에 섯불리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 채....... 지금 내 마음 속에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아 주변의 기대도 컸다. 우등생에 모범생으로 자란 나에게 공부는 자존감을 세워주는 길이었는데 수능 때부터 공부로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지로 네 번의 수능을 치르고 대학생이 되었다. 재수, 삼수, 사수까지 네 번의 수능을 치르고 대학생이 되고 보니 남들보다 늦었다는 조바심을 달고 살았다. 그래서 대학생활도 조기졸업을 목표로 학업이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그동안 모른척 하고 있었던 내 꿈이 조금씩 되살아났고, 급기야 나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올해 28세로 대학교 3학년 때 휴학을 하고 외무고시 공부를 하고 있다. 이렇게 결심하기까지 나도 쉽지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나보다 더 걱정을 하고 있어 부담이 되곤 한다. 다시 외무고시 시험을 준비하면 적어도 2년은 걸리기 때문에 다시 또 늦어진다는 사실이, 또 수능 때처럼 한 번에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에 망설이기도 했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용기를 냈다. 젊음을 오롯이 책상 앞에 앉아 보내면서도 꿈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그렇게 2년을 보내면서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결과에 나는 조금씩 지쳐갔고 몸은 물론 마음까지 지쳐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에 짐을 싸게 된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려보았던 미래, 내가 바라는 미래는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은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 나에게 숲은 또 다른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어두운 밤 숲길을 걸을 때는 해드라이트를 발밑 보다는 조금 더 멀리 보면서 가야 하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이 막막할 때는 좀 멀리 내다봐야 한다는 것을, 카약을 탈 때 가고 싶은 곳을 보면서 노를 저으면 그 곳에 다가갈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뜻을 항상 염두에 두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거기에 똑바로 나갈 것인지 작게 회전하면서 빠져 나갈 것인지 상활에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하늘을 나는 날다람쥐는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날지만 아래에서 위로 날 지 못하기 때문에 아래로 내려오면 다시 나무를 올라야 하는 것처럼 우리 삶에는 반드시 대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가슴 한 쪽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짐을 풀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손길에 힘을 주어 그동안 널브러져있던 시간을 정리하며 막연한 불안함 대신 새롭게 시작할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스스로 내가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스물여덟 당당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하야카와가 전해준 숲의 싱그러움을 가슴에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