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1-2-8. 명동 입구 대로변

등교 길의 학생들로 만원이 된 버스를 내리는 나와 장인. 명동을 따라 시공관까지 똑바로 가서 왼쪽으로 접어든다.  다시 왼쪽 골목으로 꺾자 5층 건물에 세화다방 간판이 보인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나와 장인.

S# 1-2-9 세화 다방 안

아직 손님이 없는 다방,  커피를 뽑고 있다.
레지 : 어머, 일찍 오셨네요.

카운터 뒤에서 두툼한 서류봉투를 꺼내 준다. 안쪽 자리로 들어가 앉는 장인

장인 : 다네도 앉으라우, 어--, 냄새 좋군.  (익숙한 가락으로) 모닝커피

     검지와 중지로 처억 하니 V자를 만든다. 신기한 기색으로 쳐다보는 나. 음흉한 메기입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씩 웃는 장인.

장인 : 다네, 나허구 일 두일만 덩권 공부를 해 보디.

봉투를 내 앞으로 쓰윽 밀어준다.

장인 : 한 가디 당부할 일은---,

계란 노른자를 동동 띄운 모닝커피를 들고 온 레지 아가씨가 잔을 내려놓고 간다.

징인 : 궁금한 거이 있더라도 둘이 있을 때만 묻도록, 알가서?
나   : 예 알겠습니다.
장인 : 우선 오늘은 덩권 회사가 문 열 때까지 여기  개마니 앉아 다른 사람들 얘기나 듣기로 허디. 그담에 덩권사 객장에 가 보구, 덤심은 될 수 있는  대로 고급 음식덤으로 가자구. 에에 또 --   오후에는 메트로 호텔 커피 숍에서 디내다가 다른  회사 객장도 멧군데 들러보자구, 알가서?

전투 명령을 하달하는 작전 참모의 기세다.

나    : 예
장인  : 사람들 올 때까지 기거나 읽고 있게.봉투에서 팜플렛, 증권 카다로그, 증권거래소 제도안내, 그리고 증권회사 영업 안내서 따위가 잔뜩 나온다.
군소리 없이 차근차근 자료를 읽어가는 나

장인 : (잠시 쳐다보다가) 계란 너무 익기 전에 마셔야  맛이서 야.

뜨거운 커피에 계란이 살짝 익어 있다.  자료를 들여다보는 내 모습위로 청약, 결제기간, 청산거래, 상한가, 하한가, 등 용어가 적힌 카다로그.
객장 벽 칠판에 백묵으로 숫자를 적는 직원의 날렵한 손 

S# 1-2-10. 살림집 안방

저녁상에 마주앉은 장인과 나.

장인 : 전에 상원이가 메트로 호텔까지 태워주었다는 신사  두 사람 얘기레 기억나디?
사복 군인, 덩권, 노신사,-- 이 말을 듣는 순간 대번에 피잉 오는 게 있었디. 미두나 덩권이나 투기성이 쎄다는 점은 비슷허구, 여기에 덩부가 끼어들기만 하면 꼭 큰 일이 벌어디곤 했디, 
이제 군인들이 새로 정권도 잡았겠다 ---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디. 일데 시대에도  미두시장에서 그런 일, 많아서야. 
 (숭늉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하루는 상원이 데리고 메트로 호텔 앞에 종일 보초  섰대서. 그날 태웠댔다는 사람을 찾아보려는 막연한 기대더랬는대 의외로 쉽게 찾아서.

스틸 사진) 증권 골목을 걷는 장인, 다방 마담과 얘기하는 장면, 메트로 호텔 로비를 서성대는 장면
장인 목소리)
그 양반네 사무실이 바로 호텔 안에 있었거든. 남 사장이 라면 증권가 다방 마담들까지도 다 아는 그 바닥 고참이두만.  군인 같더라는 젊은 사람은 못 찾았디만 남 사장이 군인들 과 왕래하는 건 확실한 거 같아서.  척 보기에도 군인으로 뵈는 사람들이 여럿 드나들더구

백양을 한 개비 뽑아 방바닥에 톡톡 친 후 불을 붙인다. 그리곤 물끄러미 쳐다보는 나와 힐끗 눈을 맞추더니 잠시 침묵한다.

장인  : 흠, 기리니 끼니 어더렇다는 얘기냐 이거디? 아니기 너언--, 얼굴에 다 쒸어이서 야.
길게 연기를 내뿜은 장인

장인 : (느린 어조로) 평생 가야 한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큰 투기가 둔비되는 냄새가 나. 그런데 바로 남 사장 패거리가 그 투기 닥던의 작전팀 같단 말이디.

S# 1-2-11. 증권사 객장

장인 :  이제 내일이면 일주일이디..
나   :  예,  벼락치기로 웬만큼은 배웠습니다.
장인 :  증권이라는 거이 맘 맞는 사람 몇이서 손만 맞추면 쉽게 일을 낼만큼 엉성하디?
나   :  예,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청약 증거금 10%만 내고 결제 전에 반대 매매를 하면 차익을 챙길 수 있게 돼 있던데요.
장인 :  기래. 일데시대 미두시장이나 거의 비슷해. 그거에 혹해 섯불리 달려들다 신세조진 만석꾼들이 많아대서.  잘못되면 순식간에 홀랑 날리는 무서운 바닥이지.

S# 1-2-12 살림집 안방

순례 일정이 끝나는 일주일째 날  

나와 마주 앉은 장인,. 잠바 안주머니에서 꺼낸 통장을 말없이 내 앞으로 밀어 놓는다.
통장을 펴보는 나. 클로즈 업 되는 통장. 12만환.

나  :  꽤 오래 모으신 돈이네요.
장인 : 애초는 그 돈만으로 혼자 시작해보려 했디. 허디만 투기란 상식적 판단으로 덤비면 안되게 되어 이서.  남 사장 정보를 알아내려면 내부 사정에 밝은 덩권사 딕원의 협조가 이서야 되는데, 푼돈으로는 협력을 얻어내기가 어렵디. 
 (잠시 뜸 들이다가)
다네가 채워서 한 장을 만들 수 있가서? 

 비장한 표정의 장인.

나  : ------
갈등하는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는 나. 살벌한 표정으로 운전하던 트럭 운전수 시절의 장면.
(음악 : River Dance 리듬의 숨 가쁜 탭 박자)
봉지쌀과 연탄을 들고 비탈길을 걷는 아내의 뒷모습  세차장의 단란하던 새참 시간--

S# 1-3-1.대륙증권 창구

시큰둥한 표정으로 전표를 결재하고 있는 마흔 살의 고 흥수 과장
도장을 찍으려던 손이 멈칫 한다. 100만 환짜리 청약 전표. 클로즈 업 되는 전표의 예금주 이름,  하 정수, 고개를 갸우뚱 하는 고 과장,  표정이 긴장한다. 

고 과장 : (앞 자리의 여직원에게) 김 양,   이 손님 (전표를 들어보인다) 호출 좀.
사원  : (고개를 끄덕이고) 23번 손니-임, 하 정수 손님

창구로 다가오는 나의 볕에 그을은 검은 얼굴.

S# 1-3-2 대륙증권 창구

응접 소파로 나를 안내하는 고 과장. 명함을 건네고 악수하는 모습.

고 과장 : (여직원에게) 김양, 여기 시원한 거 좀,  (나를 향해) 이렇게 저희 점포를 찾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불경기에 거금을 첫 거래로 입금해주셔서---.

관록 붙은 세련된 중년 직장인의 연기. 침침한 사무실 조명과 직원들의 시들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돋보인다.

나 : 저는 사무실에서는 별로 지내보지 않아서---,

두 손을 어디 둘지 몰라 양쪽으로 처억 늘어뜨린 나. 판단이 헷갈리는 고 과장의 표정.
음료수를 쟁반에 받쳐 들고 다가오는 여사원. 찬 음료수를 죽 들이키는 나.

나 : 운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내 목소리)
장인 통장과 내 비상금을 털었지만 100만환에는 어림도 없었다.  은행융자란 나 같은 잔챙이 따위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먼 세상 얘기다. 거래처에서 빌리고 전세 보증금까지 빼내 겨우 마련한 백만환이다.

고 과장 : (건성으로) 네에-- 그러시군요

시원찮은 반응을 보이는 고 과장

나  : (목에 힘을 주며) 군납도 조금 하구요.
고 과장 : (다시 보는 눈치로) 아, 그러십니까. 대단하십니다. 아직 젊으신 연세에---.

눈에 띄게 정중해지는 고 과장..

고 과장 : 모처럼 우리 회사를 찾아주셨는데 점심이라도 모시겠습니다.
나      : 조옷치요.

큰 목소리에 여직원이 훔칫하다 웃음을 깨물며 고개숙인다.

S# 1-3-3. 시공관 골목의 일식집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 고 과장. 뭔가 망설이는 표정.

나  : 이렇게 과장님께서 손수 자리를 마련해주시니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아양 떠는 표정의 나   

고 과장  : 천만의 말씀을, 감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맥주 컵을 쳐드는 고 과장.

나   : 자, 반갑습니다.
맥주를 단숨에 반 컵 이상 비운 나.

나  :  전문가를 뵌 김에 요즘 증권가의 움직임이나 소문을 듣고 싶습니다. 

 안도하는 표정의 고 과장

고 과장 :  최근의 증권가 동향을 얘기하려면 2년 전,  그러니까 4.19전 인 1959년도에 발행된 증권 거래소의 출자 증권에서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큰 사건들과 모두 엮어져 있으니까요.

화면) 증권사 창구,
대증권 신규청약 창구 라는 붓글씨의 안내 종이 앞에 길게 늘어선 수십명의 인파.  웅성대는 사람들
목소리)  대한 증권거래소가 주식회사 형태의 공영제로 가려고 발행한 출자증권이 있었습니다. 그걸 대증권이라고들 불렀는데 이게 투기 대상이 되었지요. 그해 3월에 공개된 대증권은 상장되자마자 단 하루만에 액면가를 웃도는 시세로 일차분 일억좌가 팔렸습니다. 이어서 실물 품귀사태가 벌어졌구요. 
매매를 위탁받은 증권사들은 차익에 욕심을 내서 가진 실물보다 많이 팔아버렸습니다. 소위 공매지요. 물건도 없으면서 파는 게 바로 공매란 건데 사실 사기나 다름없는 짓이지요.

여 종업원이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대구 냄비를 들고온다. 식사하는 두 사람.

고 과장 : 이때 팔자 측에 대항군으로 나선 것이 경희 증권이었습니다. 경희를 중심으로 사자 세력이 뭉쳤지 요. 이들이 단결해서 대증권이 나오는 족족 사들이니까 공매로 물량이 늘어났는데도 시세는 떨어 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팔자 측이 공급해야하는 실물 규모는 시중에 나돈 실물의 3배에 가까워서 순리대로라면 팔자 측이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고 과장, 얘기에 도취해 있다.

고 과장 :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거래소장은 목 내놓을 각오로 재무부에 읍소했습니다. 그랬더니 아 -- 이 재무부 양반들이 금융단 보유량 70%를 몽땅 방출시키는 긴급 조치를 덜컥 내려버렸지요. 일거에 3배 이상 실물이 늘어났으니 시세는 액면가 아래로 폭락해버렸지요.
시세보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막대한 물량을 떠맡은 경희를 비릇한 사자 측 증권사 상당수가 증권업계에서 사라져야 했습니다.

남은 맥주를 마시는 고 과장.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

고 과장 : 정상적인 거래, 정상적인 거래 하지만     (보리차를 마시며) 
   지금 같은 인프레 시대에 10% 도 안되는 배당만 보고 투자하라면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결국 증권업계는 노름판 비슷한 곳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쓰게 웃는 고 과장    

S# 1-3-4 증권 골목

스틸 사진) 아침 시간, 증권 골목으로 들어서는 나. 세화 다방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는 나,
객장에서 시세판을 주시하는 나. 고 과장을 만나 담소하는 나

S# 1-3-5 세차장

한산한 11월의 늦은 오후. 자료를 보며 장인과 마주 앉은 나. 

나 : 고 과장 말로는 지난 5월에 대증주 책동전이 있었답니다.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 5.16 때문에 졸지에 찬물을 뒤집어써서 작전을 주도한 측이 오히려 당했대요.
장인 : 역시 대증주가 호재는 호재로구먼.
나  : 그런데 그때 작전을 주도한 인물이 남 사장이래요.   그때 손해가 커서 집까지 차압당하고 전세방에 나앉아 있다던데요?
장인 : 그럴 리가 있나? 메트로 호텔에 번듯한 사무실 까지 차리고 외제차 모는 사람이 전세방이라니---? 
나  :  저도 혹시 해서 인상까지 물어봤는데 동일 인물이 맞던데요?
장인 : (반색하며 놀라는 표정)  기래에---? 그렇다면 남 사장 사무실은 군인들이 벌리는 책동전 본부야. 틀림 없어!
나  : (고개를 끄덕이며) 글쎄 제가 보기에도----.

S# 1-3-6  메트로 호텔 로비
`일송증권 창립발기인 회의`라는 안내판의 붓글씨
무심히 쳐다보던 나  

`어--?` 하면서 다시 들여다보는 나,  안내판의 회의 장소가 301호로 적혀 있다.
301호는 남 사장의 사무실이다.

S# 1-3-7  호텔 커피숍

손님 1 : 신설한 일송 증권에 젊은 대주주 있잖아?  못 들어본 이름이던데 누구지?
손님 2 : 해외 교포라던가?
손님 3 : 무역으로 돈 번 사람이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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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1-1-1. 서울 삼청동 골짜기  


1960년 9월에서 달력이 연거푸 넘어간다.  1961년 10월
철조망으로 차단된 계곡을 덮은 예쁜 색깔의 낙엽들,  골짜기를 흐르는 푸르도록 맑은 시냇물을 따라가다 보면 삼선교 밑을 지날 때쯤 구정물로 변해 있다.
개천 주변의 판자촌. 무기력한 표정의 초라한 행인들.
벽에 붙은 5.16 혁명공약, 찢어져 있다.

S# 1-1-2. 삼선교 상류, 빨래터

아낙네 대여섯이 개울가의 솥에 빨래 삶고, 방망이로 두들 기고, 부산스럽게 행군다. 이불 홋청, 검은 염색 군복바지, 한복 치마, 국방색 내의 등 가난한 옷가지들.
방망이 소리와 아이들의 높고 투명한 웃음소리,
좁은 집을 벗어난 아이들, 개울가의 어미가 집에서보다 너그럽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 평소 몇 배 더 설쳐 댄다. 물장구, 싸돌아다니기, 물싸움, 닭싸움 --- 천방지축이다.
다리 밑 가마니 움막 앞에 늙은 거지가 앉아있다.
눈치를 보며 슬슬 피하는 아이들. 
첨벙대며 물장구치는 아이들. 
 

한 아이가 저보다 어린 녀석을 붙들고 해박한 문둥이 지식을 자랑하는 중이다.   


큰 아이 : 니 아나? 문디이는 말이다, 아아를 잡아가마  간지럼을 계속 태운데이, 그라마 아아는 숨도  못쉬고 낄낄대기만 하다가 죽는 기라.
작은 애 : (또라진 서울 말씨) 왜 간지럼 태우는데--?
큰 아이 : 그래 쥑인 아아 간이라야 약이 되서 그라는기라.
작은 아이 : 아니래. 울 엄마가 그러는데 문둥이들은 손가락이 다 오그라들어서 그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런대.

 

S#1-1-4. 하 정수의 세차장/ 삼선교 하류  


발동 걸린 펌프가 소음과 함께 연기를 뿜는다. 하늘로 세찬 물살이 솟구친다. 물살은 이내 개천으로 쏟아지며 바람에 흩날린다. 눈부신 물방울들이 햇살에 반짝인다. 세찬 물살에 씻겨 나가는 타이어에 붙은 진흙덩이.
방향을 바꾸는 물줄기. 스러지는 물안개, 말쑥해진 타이어가 드러난다.
시커멓게 기름에 절은 통나무에 맺힌 물방울들이 영롱한 이슬로 잠시 머물다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입을 헤벌린 상원,  재미삼아 말쑥해진 택시 밑으로 괜히 호스를 들이댄다. 그 꼴을 본 나는 타이어를 빼내던 몽키 스패너를 던지고 벌떡 일어나 한 달음에 녀석을 덮친다. 기름 묻은 큼직한 주먹으로 다짜고짜 머리통을 쥐어박는 다.  익은 수박 깨지는 소리  


나 : (부릅뜬 눈으로 째려보며) 이 - 짜샤, 멀쩡한 차 밑은 왜 쏴? 차에 똥구멍 뚫을 거야?
국방색 런닝 소매아래 검게 그을은 팔뚝을 쳐들고 또 때릴 곳을 노리는 나. 
상원 : (엄살) 아구야아  또 사람 팬다. 쫌 마--알로 하이소.

훼인트 모션으로 두 번째 주먹을 잽싸게 피하는 상원. 이를 드러내며 싱글거리는 새카만 얼굴.
세차용 물받이 드럼통에 호스를 꽂은 사원. 빨래 비누가 담긴 군용 반합을 집어 든다. 차에 비누거품을 입히며 유행가를 흥얼거린다. 한 번 더 눈을 부라려 주고 돌아서는 나.  찌푸렸던 얼굴은 어느새 씨익 웃고 있다.

S# 1-1-5. 세차장  

스틸 사진)

홈이 밋밋하게 닳아빠진 타이어에서 바람 빠진 튜브를 빼내는 나,  공기를 채운 튜브를 조금씩 돌려가며 사이다 병의 물을 흘려보는 나.  일에 몰입한 표정. 거품이 뽀글대는 못 자국. 그 주위를 물걸레와 마른 걸레 로 닦는 나.
노란 색 생고무 조각에 접착제를 발라 새는 구멍에 붙인다.   


화면)
접착제가 굳기를 기다리는 동안 담배를 꺼내 문 나. 긴 나무 걸상에서 담배만 죽이고 있던 덩치 큰 트럭기사 옆에 나란히 앉는다. 길게 허공으로 연기를 날리는 나. 동네 복덕방에서 장기두는 영감님처럼 한가로운 표정.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흘낏거리는 상원.  


나 : (덩치에게) 타이어 갈 때가 한참 지났네요.  비올 때 브레이크 잡으면 많이 밀리죠?
지켜보던 상원이 또래의 조수가 느려터진 충청도 말씨로 받는다.
조수 : (트럭 기사의 눈치를 보며) 허두 불안혀서 지가 사장헌티 벌써 여러번 얘기해슈우-. 그래두 아직 멀었다구만 허는 디야 헐말 없쮸 뭐어, 씨이----이펄!
성근 앞 이빨 사이로 바람이 새게 `씨이---이`하며 길게 뽑더니 박력있게 `--펄!`로 마무리한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차 화통 삶아먹은 놈처럼 요란하게 끼어드는 상원. 
상원 : 와아-따, 교통한테 걸릿다 카소 고마. 와 그 있십니꺼? 댕기는 길목에 있는 교통 아아가 퍼떡 안갈마 정비 불량이라꼬 운행정지 때린다 카던지--   마아 핑계사 억수로 안 많십니꺼?

들고 있는 거품 묻은 걸레를 드립다 내젓는다. 덩치의 솔깃한 표정. 입질 본 낚시꾼의 표정으로 조여 가는 상원.  


상원 : 타이어 갈마예에-- 아재, 오늘 세차는 공짭니데이.
덩치 : 그래-? 정말이야
나   : (잽싸게) 어이구, 그러믄요, 그렇게 해드려야죠.
덩치 : (피우던 꽁초를 멀리 개천 바닥으로 튕겨 날리며) 
   쵸오와 ! 내주에 갈러 올 테니까 재생말고 신삥 챙겨 놔.
상원 : (굽실대면서) 니예 니예, 여어부가 있겠습니까.  


       입이 귀에 걸리는 상원.  


시발택시 : 야 ! 세차는 하는 거야? 마는 거야? 
딴청 피우는 상원에게 소리지르는 40줄의 시발택시 기사.
나, 상원  : (한 목소리로) 어이쿠, 죄에--송하게 됐습니다.
연신 헤픈 웃음을 흘려가며 허리를 굽실거리는 나. 꽁초가 수북한 택시 안의 재떨이를 비우고 걸레질하며 부산을 떤다. 하다만 비누질을 부리나케 계속하는 상원.

나 : (왁스를 먹이며 시발택시에게) 손님들이 요샌 뭐래요?
시발택시 : (폼을 잡으며)군바리 아니면 자유당 시절 깡패 얘기지 뭐, 허긴 그게 그거지만.
나 :  지난 번 조리돌리고 부텀은 깡패 없잖아요?  저희두 요샌 세금 없어 좋더라구요.
시발택시 : 요즘은 그 마누라들 얘기야. 갸들이 원래 인물  반반한 게 많잖아. 예쁘기만 하면 어디서 뭔 짓을 했던 상관않고 데리구 사는 친구들이니까
상원    : (헤벌락 해진 표정으로) 그런데예-- ?
시발택시 :  서대문 국립호텔 계신 서방님들 뒷바라지에 난리지 난리야, 그럭저럭 팔거나 잽힐 거라도 있는 축들은 낫지만 원래 생기는 대로 써 버리는 애들이라--, 그럴 주제도 못되는 예펜네들은 아예 메트로 호텔 앞으로 나선다는 거야. 그래도 고무신 까꾸로 신는 년들한테 대면 뭐 갸들이 바로 춘향이지 춘향이야.
상원     : 나서는 기 먼데예?
도통 말귀를 못 알아듣는 순박한 표정.
시발택시 : (내게 벌쭉 웃어 보인다.) 애들은 몰라도 돼
비감한 내 목소리)
메트로 호텔 앞은 저녁이면 고급 콜걸들이 모이는 장소 다. 멀쩡한 젊은 남자들도 일자리 얻기 힘든 세상에 배운 것 없는 여자들의 벌이수단으로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서랍에서 돈을 꺼내 세어보는 나. 4천환. 지폐를 세는 모습 겹쳐지는 내 트럭 운전수 시절의 주급 봉투.
빠져 나가는 택시와 트럭. 이어서 들어오는 검은 외제 승용차, 넥타이의  기사. 경수 산업도로에서 내 옆에서 신호대기 하던 남 상우 사장의 바로 그 승용차다.  못 알아보는 나.  


기사 : 오일 갈고 세차 좀--.
상원 : 어서 오이소.(나무의자를 가리키며) 여어서 좀 쉬시소.
젊은 기사에게 담배를 권하는 나 
나  : 못 뵙던 분이시네요?
기사 : 아--, 우리 사장님이 이 동네로 이사 왔습니다.
나  : 예에--, 새로 오신 인사로 오늘은 깎아드리지요.
기사 : (씨익 웃으며) 사장님 수완이 보통 아니시네요.
나  : 수완은 무슨--, 다 손님들 덕분에 먹구 사는데 잘  모셔야지요.
붐비는 점심 시간대의 세차장. 부산스러운 나와 장인, 상원, 창배  


차들이 모두 빠져나가 썰렁해진 세차장, 개다리 소반에 차려온 김치 와 시래기 국으로 늦은 점심을 때우는 나와 집 사람, 상원.  

전화받는 장인. 
장인 : 어이, 창배 (전화를 바뀌준다.)
창배 :  예에, 3시까지요. 고맙습니다.
장인 : 일 나오래?
창배 : (수선하던 자전거를 챙기며) 교대 기사가 펑크 냈대요. 

S# 1-1-6 세차장(저녁 때)  


쭈그러진 검게 탄 냄비에 누룽지를 튀기는 아내. 오래 써서 색깔이 칙칙해진 소쿠리에 담은 누룽지를 세차장으로 이고 오는 아내.  


상원 : (환성을 지른다) 와아--, 새참이다. 
달려가 누룽지 소쿠리를 넙죽 받아드는 상원. 넘겨주며 미소 짓는 아내

다시 같은 장소, 다른 날 저녁 때. 찐 감자 소쿠리를 이고 세차장을 들어서는 아내, 달려와 받아드는 상원, 주전자를 들고 세차장으로 들어오는 창배, 단란하게 둘러앉아 막걸리를 따르는 나, 장인, 창배, 상원,  


칭배 : (흐뭇한 표정) 역시 우리 형수님이 최고야   


찍어먹을 소금 종지를 꺼내놓는 아내.  검게 그을은 손등이 꺼칠하다.
그 손등을 안스런 눈길로 쳐다보는 나, 그런 나를 흘낏 쳐다보는 장인.     

어두워진 시간, 문을 닫은 세차장. 나무 의자에서 가로등 불빛에 만화책 보기에 골몰한 상원, 창배  


장인 :  안 가?
상원 :(싱긋 웃으며)  갑갑한 하꼬방 보다 여--가 백번 낫다 아입니꺼.
장인 : 자네들도 빨리 정식 기사가 되어야 할텐데
상원 : 하모예  정식 기사가 되고 언젠가는 택시 주인도  될낍니더. 

S# 1-2-1 세차장 밑의 개천 바닥  


자동차 부속 뭉치들이 잔뜩 쌓여있다. 자동차 부속품을 닦는 스페어 기사들, 독려하는 구씨  


구씨 : 정성껏 닦아. 검사해서 불합격이면 말짱 헛수고 야.  (다독거리는 음성으로) 당신들, 명색이 기사잖아. 장사동 뜨내기들 하구는 뭐가 달라도 달라야지. 

세차장 기둥에 붙은 작업단가표  
          라지에타, 300환 
          엔진 블록 350환 
          샤프트  50환 
          베어링  10환 
             ---

S# 1-2-2.  세차장 (아침)  


상원이 세차장으로 들어온다.
나 :  연 사흘째 안 보이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출근이네.
나와 장인에게 한 번씩 꾸벅거린 상원. 다짜고짜 창배의 허리를 껴안아 번쩍 들더니 한 바퀴 빙 돌려서 내려놓는다.
창배 : 아니, 이 자식이 아침부터 육체적으로 놀아.
지켜보던 장인, 나와 눈을 맞추며 빙긋 웃는다. 

S# 1-2-3.세차장 (점심시간)  


차량들이 늘어선 세차장.

나 : (개천 바닥을 향해) 어이, 거기 상원이랑 창배, 좀 올라와.  

닦던 부품을 들고 세차장 사다리를 올라오는 상원과 창배, 작업이 비는 짬짬이 칫솔과 넝마로 닦으면서 떠든다.  


상원 :  그래서 아베끄 족을 남산 팔각정까지 태우고 갔다 아이가, 가시나를 보는 이눔아아 눈까리가 헬렐레에 한기 고마 진작에 갔는 기라. 뒤에 앉디만도 어데를 우째 주물러쌓는지 가시나는 색쌕거리고. 와--아따, 완저이 직이더라.

창배  : (부러운 한숨) 끄--응
상원 :  팔각정에 내라놓고 돌아 올라카이, 아구야아-- 백지 내가 기운이 쫘악 빠지는기라.  대한극장 쪽으로 니리오는데 이분에는 신사 둘이 타디 `메트로 호텔` 안 카나, 덕분에 으지씨도 간만에  명동 구경 한번 했재.  


화면)
택시를 탄 사복 차림의 30대 청년, 이 석호 중령과 50대의 남 사장. 퇴계로에서 명동으로 이동하는 택시. 대화하는 두 사람

상원 목소리)

나이 든 양반은 그런대로 모양이 나오는데 젊은 쪽은 옷태 부터가 여엉 아인기라, 몸 따로 옷 따로 노는데다가 머리 까지 짧은 기 영판 군바리더라꼬.. 그런데 우째된 심판인지 늙은 쪽이 젊은 아한테 연방 따리를 붙이 쌓는 기라,  


다시 세차장

상원 : 홍 회장님 홍 회장님 케싸 멘시나 말이라, 메트로 호텔에 갈 때까지 내내 증권이니 대증주니 하고 쑥덕거리 쌓더라. (장인을 돌아보며) 증권쟁이들, 요새 호텔만 상대하고 끗발 좋아진 모양이데예.
창배 : 조오뺑이 칠 때 치더라도 진작 하사관으로 말뚝이나 콱 박는 건데.

S# 1-2-4. 세차장  


관심없는 표정이던 장인이 불쑥 묻는다. 
장인 : 젊은 쪽이 어드레? 군인 같아서?
상원 : 하모예, 지가 제대한지 얼마댓다꼬 군바리를 못 알아 보겠십니꺼? 지깐에는 머리에 물 발라 세얏지만도 모자씨던 짜국이 어데 가겠십니꺼?

제 눈썰미에 자신만만한 상원.  


장인 : 기이--래에--? 군인이 덩권에 손을 댄다아 이거디?
칫솔로 라지에타 틈새의 먼지를 파내며 중얼거리는 장인. 같은 부분만 반복해서 건성으로 솔질하고 있다. 멍한 표정이 무슨 궁리에 골똘한 사람이다.
잠시 후 작업 도구를 챙기며 일어서는 장인.
장인 : 나 오늘은 일찍 쉬가서.  상원이허구 창배가 수고  좀 해.
나 : (걱정스러운 표정) 아니,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장인 : 아냐, 아냐, 내레 조금 피곤해서 누워 있으려고 기래. 
  세차장과 길 하나 사이인 집으로 스적스적 걸어간다.

S# 1-2-5 살림집 쪽 마루

장인 : (부채로 모기를 쫓다가) 한 메칠 외출할 일이 생겨서야--,  미안허디만 아범이 애들 데리고 좀 꾸려나가야 쓰가서.
나   : (안색을 살피며) 쉬시는 거야 애들 많으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만--, 정말 어디 편찮으신데 없으신 겁니까?
장인 : 허-- 아니라니깐 기래. 그저 갑갑해서 바람 좀  쏘일려고 기래.

S# 1-2-6. 부산의 피난지  


스틸 사진) 굳세어라 금순아 가 들려오는 6.25 시절의 부산거리. 트럭을 몰고 거리를 지나는 나.

초라하지만 깨끗한 차림새인 처녀시절의 아내가 길에 앉아 울고 있다.  트럭을 세우고 처녀를 부축해 일으키는 나.
은행에서 찾아오던 돈을 날치기 당했다며 우는 처녀. 추운 날씨에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앳된 얼굴. 트럭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는 나.
처녀가 집안으로 사라지고도 한참 그 자리를 떠나지 못 하는 나. 

다른 날) 나란히 앉아 국밥을 먹는 그녀와 나, 트럭으로 해변을 달리는 그녀와 나. 석양의 해변에서 손을 잡고 무언가를 간청하는 나. 수줍은 표정으로 끄덕이는 처녀.

처녀와 장인이 사는 전셋집) 나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장인감
장인감 : 잘 살 자신 이서?
나  : (얼굴이 붉어진다. 큰 소리로) 예, 그렇습니다
장인감 :  내레 결혼식장부터 살림할 셋방까지 몽땅 마련해 놨어.  날짜만 잡자우 
나  : (놀란다) 예에---?

S# 1-2-7. 살림집 안방  


마루에서 다림질하는 아내
아내 :  결혼식 때나 매던 넥타이까지 매고 그 중 깨끗한 잠바를 골라 입고 나가셨어요.

저녁 무렵의 살림집 마당)
피곤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장인. 반주로 삼학 소주를 곁들인 저녁상,

증권 골목) 걸어가는 장인의 모습, 일력이 3장 넘어간다.
다음 날) 살림집 안방에서 장인과 마주 앉은 나.

장인 : 이환 아범허구 어디 갈 일이 좀 생겨서 야, 내일부터 일 두일만 세차장을 쉴 수 있가서?
나   : 예, 그러겠습니다.
장인 : 그럼 내일은 일딕부터 나갈테니 고만 자디.
뻥해서 나를 쳐다보던 아내가 자리를 편다.  입에 손가락을 대보인 후  불을 끄고 나오는 나
아내 : 대체 무슨 일이시래요?
나   : 나두 몰라. 그치만 안 좋은 일시키시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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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투기의 소용돌이

프롤로그 S# p1. 서울 마장동 화물 터미날 (오후 5시 30분)

5톤 화물차에 짐 싣는 인부들. 그 옆에서 손에 든 배차전표를 보고 있는 후줄근한 작업복의 나, 하 정수.   

클로즈 업 되는 전표, 『도착지 : 수원 아주대 터미널, 예정시간 : 19시』

나 : (찡그린 표정) 여기서 1시간 안에 수원 가래. 보통 때처럼 안양 컨트리 길로 가자니 한창 밀리는 퇴근시간대고, 광주 쪽으로 돌면 시간이야 되지만 배차계가 기름값 시비할 테고, 이런 니기미--.

이씨 : (심드렁 하다) 이 사람이 장사 첨하나, 새삼스럽게 왜 이래? 과속하라 이거잖아? 배차계 하는 짓이 늘 그렇지.


나 : (어두운 표정) 잘하면 또 한 따까리 하겠군. 나도 웬만하면 안전운행 좀 하고 싶지만 배차계가 하도 빠꼼이라 옴치고 뛸 재주가 없어.

이씨 : 안전 운행? 딱지 안 떼게 교통이나 잘 보고 다녀.

나 : (짐 싣는 인부들에게) 거기 비뚤잖소, 험하게 달리는 사람 짐까지 신경 안 쓰게 잘 좀 합시다.

S# p-2. 경수 산업도로 (오후 6시 40분)

배경 음악) Bill Whelan --- the countess cathleen the Women of Sidah 후반부의 빠른 탭 박자 River Dance 리듬의 강렬한 탭 박자(하 정수의 주제), 빠른 음악 속에서 차선을 연거푸 바꾸며 경수 산업도로를 질주하는 5톤 트럭. 시속 100km 가까운 속도계. 비상등을 켠 과적 트럭이 켜고 차선을 밀고 들어가면 옆 차선의 차들은 알아서 비킨다. 긴장해 핸들을 잡은 내 표정, 살벌하다.

전방에 보이는 교통경찰. 속도를 확 줄이며 온화한 미소를 짓는 나. 신호대기 중인 내 트럭 옆 승용차 뒷좌석에 앉은 초로의 신사가 힐끗 올려다본다. 남 승우 사장. 1년 뒤 증권시장에서 나와 악연을 맺게 되는 자다.

이윽고 나타나는 수원 표지판. 아주대 사거리를 지나자 화물 터미널 간판이보인다. 계기판의 시계는 7시 1분 전. 운전대 옆 인형에『오늘도 무사히---.』 라고 쓰여 있다.

S# p-3. 숙직실/ 수원 화물 터미널

배달용 알미늄 쟁반의 백반을 바닥에 놓고 먹는 세 남자. 하나같이 복장이 추레하고 얼굴은 부스스하다.

나 : 난 오늘 여기서 잘 거야. 새벽에 서울 갈 짐이 있대.

기사 1 : 난 이거 먹는 대로 목포행이여.

기사 2 : 거--, 밤 운전 조심하쇼.

기사 1 : (창밖을 내다보며) 날씨가 그나마 다행이지. 야밤중에 비까지 쫙쫙 쏟아져 봐. 완전히 살려 구다사이 지.

나 : 한 달이면 절반이 외박이니-, 독수공방 우리 마누라 생각나네.

기사 1 : (한숨을 쉬며) 우린 언제나 정착해서 살아보지?

나 : 정착 좋아하네. 가게라도 하려면 우선 터가 있어야지. 그게 한두 푼도 아니고--! 게다가 어리숙한 나하고 순둥이 마누라가 무슨 장사를 하겠어?

기사 1 : 맞아, 하씨는 그 쪽 체질은 아닌 거 같아.

나 : 장인 영감님, 나만 보면 노상 그래. 약삭빠른 구석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대. 딸 고생시킬 인간이라나

기사 2 : 말씀은 그래도 하씨가 정말로 약아 빠졌어 봐. 사위씩이나 삼았겠어. 당신도 그런 인간은 싫지만 답답하니까 해본 말씀이겠지.


S# p-4. 수원의 터미널 근처 대로변 인도

숙직실을 나와 골목을 천천히 벗어나는 나.  밤중의 대로변 인도에 서서 담배를 피운다. 피곤한 표정. 가로등 기둥의 표지판에 포르르 내려앉는 참새 두 마리.  

내 목소리) 니들은 좋겠다. 돈 없이도 아무 데나 둥지 틀 수 있으니-,


S# p-5. 삼선교의 산동네


버스를 내리는 나. 내리자마자 오라이-- 하며 문을 닫는 차장 아가씨 

하류 쪽 산동네로 걸으며 상의에서 봉투를 꺼내보는 나.  

“주급” 이라고 인쇄된 봉투에 “4천환” 이라고 적혀 있다.


골목 어귀로 들어서자 저만치서 걸어가는 아내의 뒷모습. 잰 걸음으로 다가가는 나.


나 : (반가운 얼굴로 어깨를 건드린다.) 여보


화들짝 놀라며 돌아본 아내, 활짝 웃는다. 왼팔에 종이 봉지를 안은 아내, 오른 손에는 새끼에 꿰인 19공탄 두 개가 힘겹게 들려있다. 표정이 굳어지며 새끼줄을 빼앗아드는 나. 함께 비탈길을 올라간다. 봉지쌀을 안은 아내도 말이 없다.


S# p-6. 삼선교 개천 길


이른 아침에 개천을 따라 걷는 나. 힘찬 걸음. 깍깍대는 소리에 올려다보니 전봇대에 앉아 짖는 까치 두 마리.


겹치는 장면) 수원 도로 표지판의 참새 두 마리 

내 목소리) 니들은 좋겠다. 돈 없이도 아무 데나 둥지 틀 수 있으니-,


문득 걸음을 멈추며 팔짱을 끼는 나. 개천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표정. 가운데만 물이 흐를 뿐 갓 쪽 바닥은 대부분 말라 있는 개천 바닥. 전봇대의 까치와 개천 바닥을 번갈아 쳐다보던 나. 이윽고 눈이 반짝이며 미소를 짓는다. 

목소리) 바로 이거다. 나도 허공에 둥지를 틀 수 있었어.


S# p-7 개천 바닥의 공사장


개천 바닥에 세운 헌 전봇대들. 그 위에 얹은 통나무 판을 못과 와이어로 고정시키고 있는 나, 그리고 인부 두 명.

옆에서 지켜보는 장년의 사내 구씨와 장인.


장인 : 아범이 궁리 잘했어. 물이 개천으로 바로 빠지니 하수도 공사도 필요없구, 길가라서 선전도 잘 될테구.


나 : 생각은 좋았는데---, 수월찮습니다. (헌 전봇대를 가리키며) 저거 구하러 헤맨 거 생각하면---,어디서 구할지 몰라 한전을 찾아갔죠. 이 친구들이 그거 파는 물건 아니라며 딱 잡아떼요. 좌우지간에 어딘가 모아두는 곳은 있을 거 아니냐고 사정사정해서 가보니 이야아--, 엄청 많이도 쌓였더라구요. 뭐할 거냐니까 그냥 폐기한대요. 어차피 버릴 거면 나 한테 팔라니까 쓸 만큼 그냥 가져가래요.


장인 : (흡족한 표정) 어리숙한 아범한테 기런 수완이 있을 줄이야--.  

나 : (멋쩍은 표정) 수완은 무슨---,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거지요.


장인 : 기게 바로 수완이디. 목말라도 우물 못 파는 답답한 사람들이 태반이야.


나 : (뒤통수를 긁으며 게면쩍게) 그럼 제게도 제법 소질이 있는 건가요?


구씨 : (다독거리는 말투) 그러엄, 있구 말구. 이게 작아도 만만찮은 공사야. 헌 전봇대 구하는 거부터 구청 허가 받아야지, 공사인부 달래야지, 세차 펌프에다 공구--, 뭐 그딴 거야 내가 있지만, 여하간 잘 해내고 있잖아.


나 : 까치하고 참새 덕분에 (으시대는 표정) 세차장 만들게 될 줄이야---, . 무슨 옛날 얘기 같지요?


장인 : (온 얼굴에 주름살을 지으며 활짝 웃는다.) 까치하고 참새 덕분이 아니라 우리 공상가 덕분이디. (대견하다는 듯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겨준다.)



공사 현장을 배경으로 제목이 뜬다.   『베링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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