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알다 해를 살다 - 생명살이를 위한 24절기 인문학, 개정판
유종반 지음 / 작은것이아름답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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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진에 산다. 강진에 와 실감하는 것이 달의 위력이다. 지역의 병원이나 은행에서 받아온 달력에는 음력과 절기는 물론 매일 고저 물때시간까지 표시되어 있다. 당장 가까운 강진만생태공원에 가도 밀물과 썰물에 따라 현격히 달라지는 풍경을 만난다. 자연스럽게 달력을 보고 조금과 사리의 변화와 물이 들고 나는 때를 확인한다.

절기에 대해서는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다.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귀촌하면서 농촌 풍경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좀 더 가깝게 느끼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지 않다보니 음력처럼 별로 주목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자니 달의 변화에 맞춰진 음력과 달리 24절기는 태양의 변화에 맞춰진 동북아시아의 양력이 아닌가? 해가 가장 길 때와 짧을 때를 기준으로 동지와 하지, 그리고 그 사이 춘분과 추분. 마치 시계의 문자반처럼 계절의 문자반을 그리고 자연의 변화에 따라 농사를 짓고 살림살이를 살았다니 얼마나 과학적인가? 단순히 수학적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눈비와 이슬서리, 더위와 추위의 날씨 변화를 반영하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개구리나 지렁이, 씨앗과 열매 같은 생명의 핵심적인 변화까지 반영한 양력이라니.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자연과 함께 살았던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어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런데 이 책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달라지게 관찰되고 있는 자연의 변화도 반영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절기에 따라 자연을 스승으로 삼아 진행되는 삶의 공부까지 담고 있다. 그래서 생각보다 독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작가는 절기마다 그것의 의미를 묻고 생각하고 저마다 대답을 하며 살아갈 것을 권유하고 안내하고 있었다. 참된 삶을 찾아가는 수행으로서 절기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 책은 단순히 절기에 대한 지식을 전해주는 책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자연에 맞춰 조화롭게 살아가는 참된 삶의 고백이자 안내서인 셈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지점에서 말을 걸어올 것이다.

가령 나는 곡우생이다. 책에서는 우리말로 씨앗비라 설명하고 있다. 나무에 물이 많이 오르고, 봄이 되어 볍씨를 담그는 때이다. 봄볕을 받으며 생명이 시작되는 시절이니, 기분이 좋다. 그런데 책에서는 삶에서 뿌리는 씨앗의 의미를 묻는다. 몸과 맘과 삶의 씨앗의 의미와 그것을 어떻게 뿌려야 하는지. ‘말을 할 때는 깨지기 쉬운 유리공을 주고받듯이 하라’,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몸은 겸손의 옷을 입고, 맘은 사랑의 옷을 입고, 삶은 진실의 옷을 입어야 한다며 삶의 지침이 되는 말이 담겨 있다. 몸과 맘과 삶의 세 씨앗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북미 원주민 이야기를 전한다. ‘북미 원주민들은 아무 때나 씨앗 뿌리지 않았다. 씨앗 뿌리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그대로 씨앗 속에 들어가 나중에 열리는 열매 속에 그 마음이 담긴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씨앗 뿌리기 전에 반드시 화난 마음이나 분노의 마음이 있다면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부드럽게 푼 다음 씨앗을 뿌렸다.’ 글을 읽으며 세상에 심어진 나라는 사람의 씨앗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나는 사랑과 겸손과 진실의 씨앗을 잘 가꾸고 있는가?

오십이 넘은 나이에 새삼 백로와 추분을 실감 있게 읽었다. 백로는 묽은이슬의 절기로 열매를 익히고 익어가는 때를 가리킨다. 양의 기운과 음의 기운이 교차하며 내적으로 익어가는 때인 것이다. 책은 나이 든다는 것은 늙은이가 아니라 익은 이가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잘 익어가는 것의 의미를 네 가지로 설명한다. ‘사소한 일에 감사하는 것’, ‘지혜로워지는 것’, ‘평안해지는 것’, ‘깊어간다는 것’. 나이를 먹는 것이 늙는 것이 아니라 익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이 먹는 것은 기대되고 충만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 익은 나무가 된다면, 책에서 소개한 잘 익은 자두나무 밑에는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말처럼 나누는 삶이 되리라.

열매도 열매지만 이제는 초록이 대신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나이임을 나도 느낀다. 그리하여 한로와 상강의 계절을 아름답게 맞아야 함을.

이렇게 독자마다 각자 자신의 삶을 대입하면서 읽으면 좋은 책인 거 같다.

 

한편으로는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로 여름과 가을이 길어져, 책에서 만나는 24절기가 지금의 현실보다 한 달 쯤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기상으로 가을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한로와 상강이 10월이고 겨울의 처음인 입동과 소설이 11월이다. 하지만 현실의 날씨와 자연 변화로 보면 한로와 상강의 징후가 요즘 11월에 해당하고, 입동과 소설의 징후가 요즘 12월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 되면 현대의 24절기는 다시 만들어져야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며 관찰하고 기록하며 다시 써가야 할 24절기가 분명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인으로서 24절기에 맞춰 자연과 함께 살았던 조상과 달리 이제는 생태파괴와 기후위기를 겪는 지구인으로서 우리의 과제와 사명도 달라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책임과 의무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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