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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범우사상신서 19
콜린 윌슨 지음 / 범우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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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중의 한 명이 내게 와서 괴롭다고 그런다. 아무리 무시하려 애를 써봐도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깊게' 보인단다. 서먹한 사람조차 멀거니 바라보자면 어느새 그 사람의 과거가, 현재가 그리고 미래가 마치 영화처럼, 비가 죽죽 내리는 가운데 가끔씩 끊기기도 하는 그런 오래된 무성영화처럼, 환하게 그의 눈앞을 지나가더란다. 그저 눈이 아플 정도로 보인단다. 왜 그리도 모든 영화의 결말들이 지루하리만치 똑같을 수 있는지. 그래서 그는 뭍사람과의 접촉일랑 되도록 피하려 한다(그는 매우 예절바른 사람이다).

비단 그 뿐이랴? 정작 괴로움은 바로 자신이란다. 자신을 담은 필름이 하도 초라하고 비참해서 죽을 힘을 다해 다시 만들어보려 하지만, 완강한 줄거리는 요지부동! 언제나 다를것 없는 화면에 같은 결말 뿐이란다. 뭐 그리 추하거나 낯뜨거운 것도 아닌 걸, 이류영화쯤이면 괜찮다, 괜찮다....하며 수도 없이 '눈 가리고 아웅'도 해 보지만, 어쩌랴 고작 잔꾀쯤으로 인생을 땜질 하기엔 자신의 존재가 한심하지 않은가?(그는 심하게 성실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위안(위안? 그 사람처럼 삶에 정직한 인물에게 위안이란 퍽 드문 경험이다)이 되는 책이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이다. 그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자신이 그리 특별하지도, 야단스럽지도, 또 끔찍하도록 파멸적이지도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안심 반, 부끄러움 반, 했단다.

특이하긴 하지만 아웃사이더는 아닌 콜린 윌슨이 정의하는 아웃사이더란, '꿈과 같이 비현실적인 세상에서 깨어나 혼돈을 똑바로 본 인간'이다. 그들은 '병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문명 속에서 자신이 병자인 것을 직시'하고 인간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면서 고민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아웃사이더가 된다. 아웃사이더에게 자기가 태어난 세계는 무가치하며, 아무런 목적과 의식없이 그저 표류하는 곳으로 보인다.

사르트르가 고생하는 구토증, 앙리 바르뷔스의 퇴폐적 신경증, 까뮈의 무관심과 '전락'의 감정, 헤세의 자기 분열, 드 리슬 아담의 '악셀'적 태도, 웰즈의 허무감, 니진스키의 파멸적인 긴장감등은 모두가 부조리한 현세를 부정하는 실존적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엄밀하게 말해 인간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부르조와적 절충물임을 통감할때, 진정한 질서가 오기 전에 혼돈으로 내려가야 함'은 불가피하며, 그 '출구도 없고 회로도 없으며 뚫고 나갈 길도 없는' 막막한 세계에서 그들은 눈물겹게 탈출하려 애쓸 뿐이다.

그 탈출시도는 고호의 그림, 사르트르의 실존철학, 니체의 초인사상과 영겁회귀, 블레이크의 시와 그림, 도스또예프스키의 '삐딱'한 인물들, 라마크리시나의 신비주의, 쇼의 희곡등에 면밀히 나타나는데, 각 개인이 절감하는 소외, 불안, 긴장, 공허, 절망의 몸짓이 사뭇 잔인하도록 가슴을 찌른다.

분명한 제각기의 목표의식을 갖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을 방황과 의심, 갈등, 고립감속에 꽁꽁 갇혀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발광이나 육체적 혹은 정신적 자살을 택할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실패요인마저 조목조목 분석해가는 윌슨의 주눅들이만치 탁월한 비교비평 방식은, 가히 엄청난 충격이었다. 변변히 내세울 까닭도 없이 점점 제 삶에서 소외되어 간다고 비통해하는 사람이라면 하루 바삐 윌슨을 만나는 것이 좋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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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반의 역사 - 역사는 그들을 역모자라 불렀다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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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방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장을 보러 갔다. 이 사실은 역사책에 안나온다. 그러나, 이성계가 1338년에 압록강을 건너 말을 타고 개경으로 향한 것은 역사책에 사실로 박혀 있다. 또 이성계가 개경에 칼을 들이대며 정권을 장악한 것을 우리는 '이성계의 난' 또는 '이성계 쿠테타'라고 부르지 않는다. '위화도 회군'이라는 근엄한 이름이 붙어있다. 왜 우리는 어떠한 행위에 '난'이니,'반역'이니, '사태'니 이름하고, 또다른 행위에는 '혁명'이니, '항쟁'이니 하며 차이를 두는 것일까? 그 구별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사건의-그것이 '난'이든,'혁명'이든- 인과는 어떻게 해석되어 지는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 강자의 힘의 논리에 의해, 또는 시대사상적, 정치적 유행의 압력에 의해 선택되어지고 비틀려 꿰맞춰지는, 소위 '국정교과서식의 역사인식'을 질책하는 E.H. 카아의 지극히 타당한 일설이다. 인류 과거속에 '기록'이라는 방식이 도입되면서부터 그 숱한 사실들중에서 간추려져 남겨진 역사적 사건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정형화된 틀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역사란 있는 그대로라기 보다는 승자로서 살아남은 집단들의 왜곡된 판단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단순하게 대립되는 선악의 구조 안에서 그 시대의 상황적 논리에 어긋나는 모든 결과들은 결국 '악'의 편으로 밀어부쳐졌고, 엄한 형벌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 더렵혀지고 흉하게 일그러졌다. 우리는 역사의 객관성을 잊고 살고 있다. 몇몇의 지식인들만이 사실과 해석 사이의 모순을 짚어내고 의문을 제기한다.

내가 읽은 '모반의 역사'는 이러한 문제에 의의를 제기한, 한국사 연구자들의 모임인 한국역사연구회의 공동작업의 성과이다. 이 책은 고대로부터 조선말기까지 우리 역사에서 슬픈 행적을 남겼던 17인의 '역모자'들을 앞세워놓고, 그들의 행위의 동기, 그 시대의 사회질서, 실패의 원인, 그리고 그들이 진압된 후의 정치, 사회, 경제적 파급효과를 통하여 읽는 역사가 아닌, 해석하는 역사를 권유한다.

우리가 중고교 교과서에서 영문도 모르고 이름만 외웠던 정중부, 이시애, 홍경래등은 물론이거니와, 나로서는 낯설었던 신라의 비담, 고려의 왕규같은 과거의 몇몇 실패자들을 그 시대적 배경과 아울러 불러내어 좀더 다양한 해석으로 그들을 재평가하고, 그 불행의 역사속에서 우리가 건질수 있는 교훈을 여러모로 발굴해낸다. 비록 개괄적으로 짧게 끊어 놓은 글모음인지라 꼼꼼히 따지며 물고 늘어지곤 하는 내 책읽기 방식과는 조금 불협화음이긴 하지만, 그래도 의미있는 상식이 보태어진 꽤 즐거운 시간보내기를 내게 만들어 주었다.

우스개 소리: 내 아버지는 T.V.사극이라면 뭐든지 빼놓지 않고 보신다. 하루는 '제국의 아침(?)'을 방영하는 T.V.앞을 지나다가 마침 왕규가 나오길래, 아버지께 이 책에서 읽은 내용을 그 시대 인물들과 버무려서 맛나게 설명해 드렸다. 자주 한국역사책을 읽어보시는 아버지께서도 왕규란 인물이 만만하지는 않으셨는지 나를 보시는 눈이 휘둥그레 해지신다. 그 뒤로는 책 사고, 책 쌓아놓는 내 '돈취미'를 걱정하시던 아버지의 눈길이 많이 풀어졌다. 나는 나름대로 불쌍한 역사를 잘도 이용해먹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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