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몸살과 운동회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

천막 아래 자리잡은 아이들

작아진 운동장 만큼이나 줄어든 아이들

내 아이 네 아이 모두 모여 노는 날

 

웅장하고 긴장감 돌던 국민체조 사라지고

유들유들하게 돌아온 새천년체조

국악 반주에 택견 동작이 전통적이라

이름만은 미래지향적인가

새로 배운 체조가 부끄러워 조금 다리

덜 벌리고 여럿 속으로 숨으려 들 때

천막 아래 구경꾼들이 수군대는구나

오늘 하루 공식적인 구경꾼이 되어

같은 반 아이엄마와 나도 수군대는데

 

이런 차례 저런 차례가 펼쳐지고

우두커니 앉아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 만큼 나도 기다린다

가을 땡볕 아래서 땀흘리는 모습이

짜여진 것일지라도 기쁘구나

한 두 게임이면 자신의 출연이 끝나는

아쉬운 운동회를 채워보려는 듯

아이가 든 하얀 깃발이 내려올 줄 모르고

바람을 일으키며 펄럭인다

 

몸살기로 기운이 없고

심한 입병으로 말할 기력마저 없지만

내가 앉은 이 자리가 아이에게

힘이 될 것임을 생각하니

이보다 더 최선은 없겠구나

 

이렇게 모일 때나 보는 얼굴들

스쳐가는 인연들보다 조금 더 보는 얼굴들

먼지 일으키는 운동장 둘레에 서서

아이들과 엄마들의 모습을 두리번거리다

학교일에 열심인 사람들

누구는 완장치고 설친다는 거친 표현을

하지만 그것도 열심의 다른 이름이구나

갈등할 사이도 아니고 공감할 사이도 아닌

곳에서 머무르는 사람들

 

아이의 학교에서 오늘은 맘껏 구경꾼이

되어 두리번거려야 하는 날

아이가 등장하면 곧 우리집 사진기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일을 하며

아이의 모습을 한나절 내내 좇는 것

운동회란 그런 것이다

짜장만으로 점심을 먹기에는 부족해

배불러도 탕수육을 기꺼이 주문하는

운동회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나가는 차례가 아니어도

이른 점심을 먹으러 가면 안 되는

게임을 응원하며 박수치려 하는

우리집 아이가 자랑스러운 운동회

게임을 즐길 줄도 알고

승부를 걸 줄도 아는 아이가

멋있어 보이는 운동회

이런 날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아이가

빛나 보이는 날이 있을까

 

덩치 큰 체육관이 가로막고 있는

운동장 한켠을 제하니 백미터 달리기도

할 수 없어 한 바퀴를 돌아야 하는데

커브를 돌며 멈칫 하는 속도 만큼이나

주춤거리는 달리기

땡볕 아래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

아직도 한참 남았구나

허공에 사진기를 들고 적절한 위치를

찾는데 아이가 보이는구나

아슬아슬하게 일등으로 들어온 아이야

어떻게 이겼을까 의아하기도 하고

기대치 않은 결과에 기쁘기도 하고

시원한 물을 마시는 아이 모습이

큰일을 마친 듯 대견하구나

 

적어진 아이 만큼이나 적어진 선생님

대학생 같은 선생님들이 아이와 섞여

고만고만하고 아기자기하구나

관록은 위엄과 형식의 틀 속에 갇히더니

젊음은 자유와 무형식의 광장에 놓였구나

젊은 담임은 옆반 여선생님과 무슨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 걸까

갑자기 속절없는 사생활이 궁금해지는 것은

충분한 동기를 부여한 까닭이라고 묻어두며

핼쓱한 모습이 안쓰러워지는데

 

엄마와 아빠들이 운동장 가운데 나가고

줄달리기 줄이 청군으로만 당겨지자

백군 아이들이 우우 하는 소리

뒤로 하며 우리 아이는 아직도 흰 기를

휘두르며 가을 햇볕 아래서 타고 있구나

아이의 말마따나

우리편 잘하라고, 응원상 받으려고 했다는데

왜 응원상이 없을까

승부로만 겨루는 프로 경기도 아닌데

정정당당한 승부겨루기도 점수지만

우리편을 위해 한소리로 협력하는 마음을

형식적인 명분으로라도 담았으면 싶구나

 

점심시간과 함께 저학년 아이들은 사라지고

고학년 아이들만 듬성듬성 남았구나

올해 처음으로 고학년이 된 아이는

끝까지 남는 것이 컸다는 것인 듯

조금은 으슥으슥해 보이는구나

 

운동회의 절정인 청백계주는

앞서고 뒤서고 제치고 또 제치고를

반복하더니 백군의 승리로구나

아이의 환한 얼굴이 운동회의 끝을 알리고

쳐져 있던 내 몸도 돌아가길 원하는구나

새천년 체조로 시작된 운동회는

새천년 체조로 끝나는데

아이는 끝날 때 왜 체조를 하느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가을 햇볕과 먼지와 아이가 어우러져

운동장에서 만들어지는 운동회

뜨거운 가을 하늘과 반짝이는 만국기가

아이들의 몸을 들썩이게 한 운동회

유난히 시골학교 같았던 작은 운동회

감기몸살과 입병으로 소극적인 관찰자를 

입다문 관찰자이게 한 운동회

 

그럼에도 신경쓰지 않고

독자적으로 놀 줄 아는 아이여

한나절 운동회를 아쉬워하지 말거라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은

뒤엣 것이 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앞엣 것이 충분히 채워진 것이란다

 

 

 

 

    9.19 금요일에 운동회에 다녀와서.

 화요일 저녁부터 들어온 몸살 감기로 쉬다, 쳐져 있다,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짜증내다 아픔에도 평소와 같이 나의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요구하는 식구들에 뽀로퉁해지다 간 운동회였다.

    9.23일 고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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