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크아웃 11
최은영 지음, 손은경 그림 / 미메시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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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단지 종이 위에 문장을 나열하는 행위만이 아니다. 내가 발 딛고 선 세계의 무게를 오롯이 감각하고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려는 몸부림이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 『몫』을 읽으며 글을 쓴다는 것의 비정함과 숭고함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게 된다. 우리는 흔히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거나 혹은 글 뒤에 숨어 세상을 비판하는 것만으로 스스로의 도덕적 결벽을 증명받으려 하니까. 하지만 이 소설은 묻는다. 당신이 쓴 문장이 정말 당신의 삶과 일치하느냐고,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기 위해 어디까지 자신을 몰아넣어 보았느냐고.



문장의 벽을 부수고 나아가는 일

소설 속 화자인 ‘당신’은 대학 교지 편집부에서 만난 희영과 정윤을 통해 글쓰기의 본질에 다가간다. ‘당신’이 꿈꿨던 글은 명료하다. “한 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 이것은 단순히 유려한 문장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변화를 촉구하는 선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글쓰기는 종종 초라한 질투와 결핍을 동반한다. ‘당신’은 희영이 가진 통찰력과 절제력, 그리고 타인의 상처에 깊게 공감하는 재능을 보며 동경과 동시에 깊은 열등감을 느낀다. 희영의 재능은 글쓰기에서는 빛날지언정 삶에서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독이 되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는 감각은 예민한 칼날이 되어 자신을 먼저 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영은 쓴다.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자 그녀가 짊어진 존재의 ‘몫’이었기에.



읽고 쓰는 것만으로 면죄부를 얻는 이들에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종종 정의롭다 생각하는 글을 공유하거나 비판적인 댓글을 다는 것만으로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고 착각한다. 키보드 위에서 휘두르는 문장은 서슬 퍼렇지만 정작 그 문장이 가리키는 현장에서는 뒷걸음질 치고 있을지 모른다. 희영이 경계하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인데, 문장이 삶의 방패가 되어선 안 된다고, 문장은 오히려 나를 세상의 풍파 속으로 밀어 넣는 창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최은영 작가는 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파동을 포착해 내는 데 탁월하다. 작품 속 인물들은 대개 선량하지만 그 선량함 속에 숨은 이기심과 비겁함을 정직하게 응시한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소설을 쓸 때의 원칙으로 ‘나의 가장 더러운 부분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꼽았다. 『몫』은 바로 그 정직함의 산물이다. 자신이 쓴 글의 무게만큼 살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



상처의 조건과 공감이라는 저주받은 재능

소설 속 희영은 타인의 상처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이를 두고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라 표현했다.


우리는 공감 능력을 미덕이라 칭송하지만 진정한 공감은 수렁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 타인의 고통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일일 것이다. 스물한 살의 '당신'이 여성에 대한 폭력과 부조리한 가족주의에 분노하며 잠 못 이뤘던 것처럼 앎은 곧 고통이 된다.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이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곳이라 믿었던 순진한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이 글을 쓰는 사람이 감내해야 할 첫 번째 형벌이다.



나의 '몫'은 무엇인가

작가는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어떤 몫을 감당하고 있느냐고. 정윤은 공평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지만 ‘당신’이 느꼈던 미세한 소외감을 읽어내지 못했다. 혹은 읽어냈더라도 자신의 안온함을 위해 외면했을지 모른다. 반면 희영은 자신의 결핍과 초라함을 직면하며 끝내 답장하지 못한 편지들에 대한 미안함을 품고 살아간다.


이 에세이를 쓰며 나는 내가 뱉어낸 무수한 문장들을 되돌아본다. 나 역시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내 할 일을 다 했다 자위하며 문장 뒤에 숨어 안전한 정의를 외치지는 않았는가. 누군가의 고통을 나의 사유를 풍성하게 만들 재료로만 사용하지는 않았는가.


삶에서의 성찰은 대단한 깨달음에서 오지 않는다. 내가 쓴 문장이 나의 삶을 배신할 때 느끼는 그 서늘한 부끄러움에서 시작된다. ‘그대로’라는 말이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당신이 거기 있음을 확인해 주는 눈물겨운 인사인 것처럼,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도 끝내 지켜내야 할 인간다움의 ‘몫’을 서로의 눈에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다시,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 앞에 서서

『몫』은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하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서툰 영혼들이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썼던 기록이다. 희영이 정윤에게 보낸 마지막 인사는 비단 소설 속 인물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정윤 언니, 내가 언니에게 관대하지 못했던 것을 용서해요. 그렇게 사랑하고 싶었으면서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거, 편지들에 답하지 않았던 거 미안해. 아주 오래 보고 싶었어요.
잘 지내.


잘 지내라는 짧은 마침표 안에 차마 문장으로 다 옮기지 못한 삶의 무게가 심겨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몫을 지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투사가 되어 벽을 부수고 누군가는 그 파편을 주워 모아 기록하며, 누군가는 그 기록을 읽으며 뒤늦은 눈물을 흘린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문장을 쓰느냐가 아니라 그 문장이 내 삶의 어디쯤에 놓여 있는지를 살피는 태도일 것이다. 아는 척하지 않는 것, 내가 뭐라도 되는 척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나의 초라함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 그것이 최은영 작가가 말하는 소설의 정신이자 내가 문장을 대하는 태도여야 함을 깨닫는다.


나와 당신의 문장은 평행선처럼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간극을 메우려 노력하는 행위 자체가 바로 우리의 ‘몫’ 일 것이다. 읽기 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단 한 줄의 문장을 찾기 위해 오늘도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 앞에 선다.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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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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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이 시끄럽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고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현실은 나에게 남아 자꾸 머릿속을 뒤섞는다. 알고 있는 것과 다스리는 것의 간극이 멀고 가까운 정도가 얼마나 비워내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바로미터는 아닐는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되고, 스스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하게 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곱씹게 된다. 과거는 히스토리고 미래는 미스터리며 현재는 선물이라지만. 히스테릭한 현재로 인해 과거도 미래도 돌아보고 예상하는 게 부질 없어진다.


속이 시끄러울 땐 고주망태가 되도록 잔을 비워내는 게 도움이 안 되던데. 물론 아무 생각 안 나도록 몸을 움직이거나 일거리 취미거리를 찾아 시간을 채우는 것도 방법이 되겠으나 그때뿐인지라, 분을 삭일 방법을 찾다 메모장을 열었다. 여름이 다가오면 소개 글을 써야지 하고 두었던 책.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소설인데, 스펙터클한 전개도 눈에 띄는 사건도 톡톡 튀는 기승전결도 없는 것이 슴슴한 평양냉면 같달까. 그럼에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다만 평양냉면을 닮아서. 점심에 분명 먹고 왔는데 자려고 누우면 떠오르는 것처럼, 일상의 특별함이 아니라 소소한 평범함이 가진 밀도가 문장 전체에 녹아 있다.


건축학과를 갓 졸업한 주인공 사카니시가 빡빡한 조직생활과 대학원 진학 대신 선택한 '무라이 설계사무소'에 취직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무라이 건축사무소'의 수장인 '무라이 슌스케'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고 하니, 1967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20세기 건축전에서 일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소개될 정도로 능력자이면서도 건축의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건축은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철학으로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다. 이 정도 스펙이면 욕심을 부려봐도 되겠건만. 대형 건축회사를 차리고도 남겠건만. 소소한 건축사무소에서 올곧은 동료들을 모아 꾸려나간다.


무라이 슌스케와 그 동료들이 건축을, 일을,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소설 곳곳에 숨어 있다.


잘된 집은 말이야, 우리가 설명할 때 했던 말을 고객이 기억했다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되지. 우리 건축가들의 말이 어느 틈엔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말이 되어 있는 거야. 그렇게 되면 성공인 거지.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자유는 정말 중요하지. 아이들에게도 똑같아.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평소에 속한 사회나 가족과 떨어져서 책의 세계에 들어가지.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 아이가 그것을 스스로 발견한다면 살아가는데 하나의 의지처가 되겠지. 독서라는 것은, 아니 도서관이라는 것은 교회와 비슷한 곳이 아닐까? 혼자 가서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한 점의 틈도 그늘도 없는 완벽한 건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아무도 못 만들어. 언제까지나 주물럭대면서 상대방을 기다리게 할 만한 것이 자신한테 있는지, 그렇게 자문하면서 설계해야 한다네."..."고객이 시키는 대로, 납기를 지키기 위해서 일하라는 건 물론 아닐세. 만일 고객이 불평하거나 변경해 달라고 했을 때 마감이 임박할 때까지 주물럭거리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 자네가 잘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어. 그런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라도 늘 시간은 봐둬야 하네. 그런 의미에서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무라이 설계 사무소는 여름이 되면 짐을 싸고 숲 속 여름별장으로 떠난다. 새들의 노랫소리로 가득한 고즈넉한 숲 속에서, 아침이면 어김없이 산책길에 나서는 무라이의 발소리와 삐걱이는 현관문 소리로 시작되는 여름별장. 국립현대미술관 설계경합을 목적으로 도착한 여름별장은 조용하고 아늑해 보이지만 설계사무소 직원들의 손에 녹아든 업무습관은 비할 데 없이 세밀하고, 톱니처럼 얽힌 직원들의 설계작업은 각자가 1인분의 역할을 소화해 내지 못하면 프로젝트를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가득하다.


... 나중에 유키코에게 물었더니 오전오후 합해서 최대 열 자루 정도 연필을 쓰는 것이 일의 정확성도 지켜지고, 연필도 정성껏 다루게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보다 더 깎아야 하는 것은 필압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난폭하거나 너무 서두르거나 그중 하나로, 즉 아무 생각 없이 일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선을 계속 긋고 있으면, 어느 지점부터 의식이 흐트러지는 때가 있다. 그 틈을 노려서 실수가 미끄러져 들어오니까 연필이 어떻게 닳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설계도는 한 군데라도 놓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 버리면 다시 그리는 데 두 배 이상의 힘이 든다.


선생님은 내 의문에 미리 대답하듯이 말했다. "가구는 좀 더 뒤에 생각하자는 이구치 군 생각도 이해하지만, 건축이라는 것은 토털 계획이 중요하지. 세부적인 것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니야. 세부와 전체는 동시에 성립되어 가는 거야."... 무의식의 영역을 빼놓고 사람에게 태아시절의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이 손가락이 예전에 그렇게 세계를 탐색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서 손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손을 움직이는 것이 생각으로 연결된다. 선생님의 건축 작법은 그 양쪽으로 성립되어 있다.


"덮어놓고 죽죽 조각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 노래한다는 것은, 즉 숨을 쉬면서 손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니까 손놀림이 가벼웠을 거야. 사람은 말이야, 그냥 의자에 앉아 있을 때조차 어깨에 힘이 들어가거든. 그렇지만 숨을 쉬면서 몸의 긴장을 풀면, 어깨에서 힘이 빠지지. 호흡을 편히 하면 어깨도 굳지 않아."


안타깝게도 무라이가 뇌출혈로 쓰러지며 설계경합에는 결과물을 제출하지 못하고 무라이는 더 이상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기 어려워지게 되는데, 사무소 직원들의 안녕과 무운을 바라며 무라이는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일은 사무소 안에는 없고, 여러분의 손안에 있습니다.
부디 좋은 건축 일을 계속해주길 바랍니다.


모든 것은 내 손안에 있다.

속 시끄러운 것도 결국 내 안에 있고, 이걸 만든 것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도 나에게 달린 일이다.

그리하여 내가 나에게 바란다.

부디 하루하루를 쌓아 계속 나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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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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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사형제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싶다. 단순히 ‘존재해야 한다’, ‘폐지해야 한다’의 논쟁을 넘어 타인으로서의 인간이 누군가의 생명을 법적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이 사회에 있을지에 대한 관점이랄까.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 『13 계단』은 그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이야기는 전과자 준이치가 가석방 후 사회 복귀를 준비하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으며 시작된다. 퇴직을 앞둔 교도관인 난고는 준이치에게 특별한 제안을 하는데, 조만간 처형될 사형수가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이고 그가 무죄임을 증명할 수 있게 수사를 도와주면 사례금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 사형수는 기하라 료라는 인물로, 강도살인죄로 사형이 확정되어 수감 중인 인물이다. 그를 구원하기 위한 시간은 단 두 달. 이렇게 세 사람의 기묘한 접점이 시작된다.


형벌을 다룬 소설은 많지만, 『13 계단』은 조금 다르다. 작가는 사형제도의 존재 자체보다 그것이 돌아가는 방식, 절차, 시스템, 인간의 감정까지 냉철하게 들여다본다. 초점은 한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이 판결이 과연 정당 했는가를 추적하는 과정에 맞춰져 있다. 준이치와 난고는 기하라의 사건과정을 복원하려 노력하면서, 수사의 허점과 증거의 약점을 하나하나 발견해 나간다. 그러다 보면 점차 소설을 읽는 우리는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정말 기하라는 범인인가.


소설 속에서 ‘13 계단’이라는 상징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일본의 실제 사형 집행 구조에는 교수형 집행장까지 이어지는 13개의 계단이 있다고 한다. 형틀까지 오르는 그 계단은 물리적인 구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법과 제도, 양심과 죄책감, 복수와 용서가 얽혀 있는 상징적 공간으로 보인다. 이 계단은 단지 사형수만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를 판결한 판사, 수사한 형사, 감시한 교도관, 그리고 집행 버튼을 누르는 이들 모두가 관여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영화 ‘재심’이었다. 영화는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살인 사건’이라는, 전북 익산에서 한 택시기사가 흉기에 찔려 숨진 실제 사건을 다루는데, 사건 직후 경찰은 당시 15세였던 현우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현우는 강압 수사를 받았고, ‘범행을 인정하고 깊이 반성하는 점’을 참작하여 5년을 감형한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죄 없이 감옥살이한 것만으로도 억울한데 만기 출소 후 1억이 넘는 사망보험금으로 소송당하고, 이를 재심하는 과정에서 진범이 밝혀져 3년이 더 지난 2016년에야 무죄를 선고받는다.


만약 현우가 사형을 선고받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법은, 과연 누구를 구제할 수 있었을까. 일본의 법 제도 아래 쓰였지만 『13 계단』은 이런 현실을 은유하면서도 매우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일본 역시 수많은 무기수, 사형수들이 기억이나 정황으로만 죄를 뒤집어쓴 채 갇혀 있다. 소설 속의 기하라는 실제로 그런 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모른 채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느냐의 물음에 있다.


소설은 단순히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 소설이 강한 울림을 주는 이유는, 어느 입장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따라가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지를 보여준다. 준이치는 과거에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고 그 죗값을 치렀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난고 역시 과거에 사형 집행자의 역할을 했던 것을 계기로 죄책감을 지고 살아간다. 그들은 둘 다 ‘법의 심판’을 받았거나 그 체계에 몸담았던 사람들이지만, 결국 그들 자신이 느끼는 죄와 용서는 제도 바깥에 있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묻는다. ’죄는 법으로만 다스려질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은 정말 구원받을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은 소설의 말미로 갈수록 점점 더 선명해진다. 사형이라는 결정적 형벌은 법적으로는 명확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과 갈등, 회한과 후회는 그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특히 난고와 준이치에 의해 기하라 사건의 진실이 조금씩 드러날 때, 우리는 ‘판단하는 자’의 위치에서 벗어나게 된다.


『13 계단』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강한 처벌이 곧 정의라는 단편적인 사고로는 복잡한 인간의 죄를 다룰 수 없음을 말한다. 정의는 때로 처벌보다 더 어려운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그건 바로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참회하게 하고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너무 이상적인 말일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은 그렇게 이상적인 믿음을 현실 속에서 질문한다.


결국 이 소설은 촘촘하게 쓰인 한 편의 미스터리이지만,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누군가의 실수를 되돌릴 수 있는 용기를 가졌는가. 그리고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 법이 완전하지 않은 인간을 처벌할 수 있다고 믿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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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감각
조수용 지음 / B Media Company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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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저마다 살면서 기념할 꺼리들이나 잊지 않고 싶은 마법 같은 순간들이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군가는 생일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처음 마주하게 된 순간이나 새로운 시작, 생명의 탄생, 감동으로 벅차올랐거나 변화의 기로에 놓였던 순간들 말이죠. 누군가는 월급날을 기다리기도 할 테고요 :)


저도 제 나름에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는 순간들이 몇 가지 있는데요. 5월 14일이 그렇습니다.(벌써 어제가 되었네요.) 누군가에겐 로즈데이이겠으나, 저겐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며 밥벌이의 수단으로써, 나를 찾는 과정으로서, 내가 속한 곳에서 무언가로 기여하고 의미를 찾아온 ‘일’이라는 걸 시작한 날입니다. 열여덟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으니 기념할 만한 꺼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별하진 않지만 매년 이때가 되면 ‘그래, 그동안 잘했지’, ‘한 해 동안 이러이러했지만 올해는 더 나을 거야 ‘, ’또 얼마나 가슴 뛰는 새로운 일거리들이 기다리겠어 ‘ 하는 심정으로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자는 생각에 혼자 그럴 듯~까지는 아니더라도 괜찮은 점심 한 끼를 찾아 제게 주곤 합니다.


별건 아닙니다. 네 뭐,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야죠 :)


돌아보니 그동안의 일에 있어 수많은 부침과 변곡점의 순간이 있을 때마다 깨우침을 주었던 게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 『프리 워커스』- 모빌스 그룹, 『일하는 사람의 생각』- 박웅현, 『지적자본론』- 마스다 무네아키, 『일을 잘한다는 것』- 야마구치 슈, 『언바운드』- 조용민, 『일의 격』- 신수정, 『Start with WHY』- 사이먼 시넥 같은, 일이라는 이 요망한 녀석을 어떻게 바라보고 마주 해야 할지에 대한 책들을 적절한 시점에 만나 다시금 뒤돌아보고 나아가게 해 준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우연히 『일의 감각』이라는 책을 접하고 배운 것이 많아, 조금 소개해볼까 합니다.





조수용이라는 분의 글은 묘하게 말이 많지 않습니다. 짧고 단단한 문장들이 머릿속에 오래 남는데요. 화려하게 설득하려 들지 않고, 차분히 자신의 생각을 꺼내 놓는데 그게 오히려 더 크게 와닿을 때가 있죠.


오너의 신뢰를 얻으려면 오너의 고민을 내가 대신해 주면 됩니다.

이 이야길 듣고 예전 같았더라면 '사내정치'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을 이제는 조금 알겠습니다. 수많은 의사결정이 필요한 순간들에, 오너도 리더도 사람인지라 이해해 주고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오너와 리더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조직이 원하는 바와 나아가려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고, 오너가 가진 고민의 지점이야말로 정답이 아닌 해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죠.


감각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예전엔 뭐든 다 해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게 성실이고 책임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가려내는 감각이 오히려 더 중요한 거더군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 지금 당장 힘을 쏟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구분해 내는 감각. 그건 결국 어디까지 내가 책임질 수 있는가에 대한 태도 같기도 했습니다.


사용자는 디자인을 분석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느낍니다.

이 문장은 디자인뿐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도 자주 떠오릅니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묘하게 신뢰가 가는 사람.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왠지 마음이 끌리는 태도. 결국 그런 건 다 감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감각이란 게 결국 훈련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감각 있는 사람은 없다고, 좋아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무엇이든 좋아하려는 노력, 그걸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 말이 좀 오래 남더군요.


'사소한 일도 잘하는지’를 평가하는 게 아닙니다. 잘하고 못하고 이전에, 그가 일에 대해 가지는 마음가짐을 보는 겁니다.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더 잘 해내려는 마음가짐 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타인에 대한 이해’가 만나는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결과물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내 취향을 깊게 파고, 타인에 대한 공감을 높이 쌓아 올린 결과 만들어지는 것이 ‘감각’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감각은 ‘현명하게 결정하는 능력’입니다.




이 책 덕분에 그간의 업무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아는 말, 누구나 하는 방식 속에서 내가 놓치고 있던 건 없었을까. 그렇게, 다시 천천히 돌아보게 됩니다.


일도 감각도 결국은 ‘본질’이라 믿습니다. 전문적인 기술도, 일이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끝까지 해내려 하는 능력도 업과 일에 있어 중요하겠으나, 그 모든 건 결국 본질을 잃지 않기 위한 도구라 믿습니다.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나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누구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지. 그걸 잊지 않기 위해 감각을 훈련하고, 상식을 지키고, 태도를 다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5월 14일, 올해도 자신에게 점심 한 끼를 선물했습니다. 이유는 여전히 같고,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아요. 얼마나 어떻게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스스로에게 바라는 건 앞으로의 일에도 여전히 중심이 있었으면 합니다. 정답이 아니라, 흔들려도 돌아올 수 있는 기준 같은 것 말이죠. 그게 바로 제가 지금 생각하는 ‘일의 감각’이고, 제가 믿고 싶은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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줬으면 그만이지 -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
김주완 지음 / 피플파워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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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라는 말의 무게

어릴 적 참 싫었던 별명 중 하나. 애늙은이. 어른들이 붙여주신 별명인데, 속이 깊다거나 의젓하다거나 어른스럽다의 순화된 의미로 그리 부르셨던 듯하다. 꼭 그렇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언제부터 어른이라는 단어를 쉬이 쓰게 되었을까.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쉽게 어른이라 부를 수 없고, 오래 살아왔다고 해서 자동으로 존경이 붙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어른이라 부르기 위해서는 그 삶 전체를 낯빛처럼 들여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뗄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결핍한 존재가 진짜 어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가운데 작년 초에 만났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한 편. 《어른 김장하》. 문장도 아니고 설명도 없었지만 사람의 이름 앞에 어른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더라. 뭔가 싶어 봤지. 다큐멘터리를 워낙 좋아하니까. 이 다큐멘터리는 결국 어른이라는 단어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삶을 따라가며, 그 사람을 어른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를 하나하나 보여주겠다는 조용한 다짐.


다큐멘터리의 여운이 잊히지 않는 와중이었는데, 최근에 책으로 다시 만났다. 경남 지역 언론인이자 기자이신 김주완 님의 『줬으면 그만이지』. 김장하 선생의 뒷모습을 잡은 표지는 단조로웠고 제목은 툭 던지듯 무심했지만, 그 속엔 10년 넘게 한 사람을 추적하며 기록한 시간들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와는 또 다른 밀도의 진실이 그 안에 있더라. 카메라 대신 펜으로, 말 대신 침묵으로 채워진 참 어른의 삶.


나는 이 두 기록 사이에서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 글은 그 사이를 오가며 내가 받은 울림과 물음을 되새기고, 나름의 방식으로 기록을 덧대보는 시도일지 모르겠다. 김장하라는 사람을 통해, 우리는 다시 어른을 말할 수 있기를.



줬으면 그만이지 - 기대하지 않는 베풂

줬으면 그만이지. 뭘 칭찬을 되돌려 받겠다는 것이오?


어떤 말보다 단호하고, 어떤 철학보다 간결하다. 김장하 선생이 소개한 한 거지의 에피소드인데, 선생의 삶을 통째로 압축해 보여준다. 무언가를 베푼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그 행위를 쉽게 선행이라 부르지만, 그의 태도는 선행조차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냥 당연한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마음.


기부란 뭐고 나눔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종종 베푸는 행위를 하면서도 의미나 반응을 기대한다. 그것이 당장 감사의 말이든 혹은 칭찬이든 혹은 언젠가 돌려받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심리든 말이다. 그렇게 보면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는 해야 할 것 아니오?'라는 말엔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많은 행동을 조건과 기대 속에서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기대에 김장하 선생은 무심히 선을 그었다. '줬으면 그만이지.' 그 말에는 진심의 무게가 담겨 있다.


40대의 젊은 나이에 명신고를 만들고 10년 넘게 이사장으로 계시다가 학교를 사회에 내놓으신 김장하 선생. 본인이 가난으로 인해 배우지 못했음이 안타까워, 같은 이유로 학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많은 학생들을 장학금으로 도우시더라. 김장하 장학회에서 지원을 받은 어느 학생은 '저는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내가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이보다 더 분명한 가치관이 있을까. 김장하 선생에게 베풂이란 성과를 기대하는 일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몫을 다하며 살아가도록 조용히 밀어주는 일이었다. 기대하지 않기에 실망도 없고, 실망하지 않기에 또 미워할 일도 없는.


선생은 말보다 실천으로 보여주셨다. 자신의 직업이자 생업인 약방의 수익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라며, '나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라고 했다. 어떤 명분도, 계산도 없었다. 다만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덜 아픈 자리를 남기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단단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아무 기대 없이 베풀고, 아무 대가 없이 살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어쩌면 그의 삶 전체에 있다. 그는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다'라고 했다.


참된 어른은 자신이 심은 나무가 자라는 걸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물을 주고 그늘을 만들어줄 뿐이다.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말은 그래서 무심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엔 깊은 책임과 윤리가 숨어 있다. 내가 한 행동을 나 스스로 감당하고, 거기서 멈추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의 방식 아닐까. 그 말 하나로 김장하 선생을 어른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명예보다 일상 – 약방을 비울 수 없어서

국가가 수여하는 훈장, 그것도 대통령이 직접 주는 국민훈장 모란장. 보통 사람들이라면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요, 감사 인사부터 기념사진까지 잔치처럼 치러질 만한 순간이다. 그런데 김장하 선생은 그 전수식 참석을 거부했다.


그 이유가 뭐였냐면, 약방을 비울 수 없어서.


이 한마디는 실로 기이하고, 또 기념비적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훈장이 권위이고, 업적의 증명이고, 살아온 시간에 대한 인정일 수 있다. 하지만 김장하 선생에게는 당장 자리를 비우는 게 더 큰 문제였나 보다. 누군가의 병을 듣고 약을 지어주는 일, 소문을 듣고 먼 길 찾아오는 손님의 말벗이 되는 일이 더 중요했나 보다. 훈장보다 일상, 명예보다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경남교육청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내 목이 날아간다며 교육감이 사정사정했다나. 이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된단다.


김장하 선생은 그 순간에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삶이란 결국 자리를 지키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선택 앞에서도,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놓지 않는 일. 그것이 설령 많은 이들이 아까워할 훈장이라 할지라도.


생각해 보면 명예란 늘 외부에서 붙여주는 이름표 같은 것이지만, 일상은 오롯이 자기 손으로 짓는 집과 같다. 김장하 선생은 그 집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중시한 약방은 단지 약을 짓는 공간이 아니었다. 지역 주민의 안부가 오가고, 아픈 이들에게 말 한마디를 더 건네는 곳이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을 선생이 아닌 이웃으로 살았다. 훈장이 아무리 빛나도 그 하루의 삶이 더 값지다 여기신 것이겠지.


우리는 종종 더 나은 자리를 향해 애쓴다. 부와 명예, 인정, 영향력. 그러나 그 자리가 나를 밀어낸다면, 진짜 손해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끝까지 머무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른의 방식 아닐까.



무재칠시 - 가진 것 없어도 어른일 수 있다

우리는 나눔을 생각할 때, 내가 가진 것 중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부터 고민한다. 그래서 나눔은 가진 게 많은 자들이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돈, 물건, 시간, 재능 같은.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없다면? 가진 게 없으면 베풀 수도 없는 걸까?


김장하 선생은 그런 물음에 오래전부터 대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소개한 개념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무재칠시(無財七施)’라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글자 그대로, 재물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베풂인데, 화안시(和顔施), 자안시(慈眼施), 언사시(言辭施), 심려시(心慮施), 사신시(捨身施), 상좌시(床坐施), 방사시(房舍施) 라고 한다.


그게 뭐냐면, 첫째가 화안시(和顔施)라는 겁니다. 얼굴빛을 환하게 해서 상대를 대할 때 이것도 큰 봉사라는 것이죠. 둘째는 자안시(慈眼施), 눈빛을 편하고 부드럽게 해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도 큰 봉사라는 겁니다. 이건 재산이 없어도 되거든요. 그다음에 언사시(言辭施), 말씨를 부드럽게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크나큰 봉사입니다. 그다음에 심려시(心慮施)라고 하죠. 마음 씀씀이입니다. 서로가 마음과 마음을 위로해 주는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다음에 사신시(捨身施)라고 하지요. 결국 몸으로 때우는 겁니다.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걸 보면 좀 들어주고, 얼마든지 몸으로 때울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상좌시(床坐施), 자리를 양보하는 일입니다. 자리 양보하는 일은 큰돈 안 들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마지막으로 방사시(房舍施)입니다. 요즘 와서는 그런 일이 좀 적겠습니다만, 그래도 방을 빌려줄 일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나그네가 많이 다닐 때 그 나그네가 집 떠나서 어느 헛간에라도 좀 재워 달라 할 때 방에 재워주는 것, 이것은 정말로 엄청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일곱 가지를 무재칠시라 그럽니다.


처음엔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다. 얼굴을 환하게, 눈빛을 따뜻하게, 말씨를 부드럽게 등등. 이게 진짜 베풂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김장하 선생의 삶을 곱씹다 보면 알게 된다. 선생이 정말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그는 누구에게든 정중했고, 말수가 적지만 필요한 말은 꼭 했다. 바쁘고 피곤할 때조차 약을 지러 오는 사람 앞에서 인상을 쓰지 않았다. 모임 자리에선 늘 먼저 일어났고 기꺼이 자신의 공간을 열어두었다. 그는 큰소리 없이 몸을 앞세우거나 젠체하지 않고, 그 대신 눈빛과 표정, 말씨와 태도로 세상을 대했다.


그 삶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이런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어른이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


그 말에 답이 있다. 애정이 본디 인간의 바탕이라면, 어른은 그 바탕을 가장 고요하고 자연스럽게 실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재칠시는 그래서 어려운 말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쉬운 나눔이다.


돈이 없어도, 시간이 부족해도, 피곤한 날에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부드러운 말, 따뜻한 시선, 잠깐의 자리를 내어 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조차 하지 못한 채 내가 풍족하지 않기에 줄 수 없다 한다. 김장하 선생은 베풂이란 결국 태도의 문제라는 것, 그런 삶의 태도에 조용히 이의를 제기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실천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군가를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가.



김장하 바이러스 - 조용한 전염, 조용한 유산

사람 하나의 이름이 이렇게 오래, 그리고 깊게 전해지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도 소리 없이, 자랑 없이, 억지로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김장하 선생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마치 전염병처럼 번진다. 누군가를 직접 만난 사람만이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이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 그가 한 일을 곁에서 지켜본 이들 사이로 조용히 퍼져간다.


김주완 기자는 이 현상을 가리켜 이렇게 썼다.


등장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이미 ‘김장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많았다.


그건 아마도 김장하라는 사람이 말보다 삶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누군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고 자신이 옳다고 뭔가를 주장한 적도 거의 없다. 대신 본인이 옳다고 믿는 공평이라는 방식대로 살았을 뿐이다.


그는 특출한 성공이나 유명한 제자, 결과로 평가받는 세상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응시한 건 그저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 내세울 이름은 없어도 지킬 것을 지키며 하루를 통과하는 사람들. 그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삶이 어른스러움의 본질이라고 믿은 듯하다.



어른은 - 지켜야 할 마음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사람

돌아보면,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며 줄곧 한 사람을 말해왔지만 사실은 한 사람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김장하라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어른의 표정을 떠올리고 싶었다.


어른이라는 말이 너무 가볍게 쓰이거나, 반대로 너무 무거워 아무도 쓰지 못하는 시대. 그 속에서 진짜 어른은 어떤 사람인가 묻고 싶었다.


어른은 단지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지켜야 할 마음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사람이다.
그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영향력이고, 훈계가 아니라 울림이지 않을까.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마음을 건네고 있는가.
나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어른이라 불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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