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의 계절 - 귀주대첩, 속이는 자들의 얼굴
차무진 지음 / 요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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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명백한 거짓부렁이다. 다만, 나는 동굴에 들어가 홀로 웃는다. 이 서사가 사실이라고 믿는다. 끊기고 정렬되지 못한 기록의 공간이 넓고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기에. 그래야 내 상상이 빛을 발할 것이기에. - '작가의 말' 중


우리가 평생에 걸쳐 읽고 쓰는 모든 문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진실을 기록한 문장일 수도 있겠으나,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공백을 채우기 위해 내가 스스로 믿기로 선택한 문장일지도 모른다. 차무진 작가의 장편소설 『여우의 계절』을 덮고 난 후 나는 책의 본문이 아닌 '작가의 말'에 그어진 이 밑줄을 오랫동안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명백한 거짓부렁이다.'라는 도발적인 선언으로 시작된 이 문장은, 단순한 팩션(Faction)을 넘어선 한 작가의 깊은 문학적 사유를 관통한다. 작가는 이 말을 통해 독자에게 역사적 사실과 스토리텔링의 경계를 흐리는 것을 넘어, 인간이 가진 믿음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내가 쓰는 이 글이 『여우의 계절』을 조명하는 이유이자, 나아가 '나와 당신의 문장은'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새롭게 정의할 단초이다.



작가 차무진과 그의 '위대한 거짓말'

차무진 작가는 한국 장르문학계에서 대중성과 문학성을 고루 갖춘 보기 드문 이력의 소유자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슬픔 뒤의 악함, 반전 속 유머, 서정이 깃든 공포 등 이율배반적인 요소들을 능숙하게 교합하며 끊임없이 독자의 예상을 뒤집는다. 이는 그 서사 자체가 고정된 규칙이나 정답을 거부하며,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온 현실의 이면을 들춰내는 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여우의 계절』은 고려의 가장 극적인 승리였던 귀주대첩이 벌어지기 직전, 스무날 동안 구주성(귀주성) 안팎에서 벌어진 미스터리한 사건을 다룬다. 노쇠한 대원수 강감찬을 중심으로, 갑자기 사라진 최강 기마부대 '대마신군'의 행방, 군영 내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 그리고 미래를 보는 신력을 가진 설죽화와 살인병에 걸린 동생 설매화의 존재가 얽히며, 이야기는 역사 스릴러와 환상소설의 경계를 넘나 든다.


이 소설의 핵심은 역사의 공백을 미스터리와 오컬트로 채우는 대담한 상상력에 있다. 우리는 흔히 강감찬을 문인 출신이었으나 나라를 구한 천재적인 전략가로 기억하지만, 이 소설 속의 강감찬은 원숭이탈을 쓰고 노쇠한 몸을 간신히 가누며 심지어 귀신의 힘이라도 빌려 전쟁을 이기려 하는 듯한 기행을 보인다. 역사적 기록은 귀주대첩이라는 결과만을 적어두었겠으나, 작가는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 즉 인간의 불안, 광기, 그리고 절박한 믿음의 순간들을 재창조한다.



공백의 미학이 주는 통찰

작가의 말엔 작가가 스스로 자신의 소설이 '명백한 거짓부렁'이라 칭하면서도, 동시에 '이 서사가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역설을 담고 있다.


모든 역사는 결국 기록된 것만을 사실로 인정하는 제한적인 문장들의 집합체다. 기록은 언제나 끊기고 정렬되지 못한 공간을 남긴다. 강감찬이 거란 10만 대군을 구주벌로 끌어들이기까지의 숨겨진 20일 동안, 구주성 안에서 어떤 불안이, 어떤 암투가, 어떤 인간의 원초적 공포가 들끓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작가는 바로 이 기록이 침묵하는 넓은 공간을 향해 상상력이라는 빛을 쏘아 올린다. 살인사건, 예지력, 토속신앙의 주술, 환각을 일으키는 약초 '쓰리나리' 등, 이 모든 것은 작가가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기에' 과감하게 심어 넣은 요소들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은 삶의 본질을 관통한다. 우리의 삶 역시 과거의 행동, 타인의 시선, 사회적 평가라는 기록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기록들 사이에는 언제나 해명되지 않은 공백이 존재한다. 우리는 종종 이 공백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남이 쓴 평가와 통념에 갇혀 스스로의 본질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여우의 계절』은 가장 절박한 순간에 승리라는 '사실'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냉철한 계산이 아니라, 미친 듯이 그 승리를 '사실이라고 믿는' 강렬한 서사적 의지라는 것을 이야기와 문장으로 건넨다. 노쇠한 강감찬이 외형적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미스터리와 오컬트까지 이용해 빅 픽처를 완성하려는 모습은, 자신의 삶을 걸고 필요한 거짓말(서사)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웅장한 투쟁을 상징한다.


결국 '끊기고 정렬되지 못한 기록의 공간이 넓고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기에'라는 문장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공백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가장 아름답고 용감한 문장으로 그 공백을 채우라고 독려하는 것과 같다.



나와 당신의 문장은

결국 『여우의 계절』은, 기록된 역사 속 인물들이 실은 얼마나 인간적이고 복잡한 존재였는지를 드러낸다. 그들은 신의 영역을 넘보고, 주술에 기대고, 때로는 잔혹함을 감수하면서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를 향해 나아간다. 비록 그들의 진심은 역사책에 남지 않았지만,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가장 강렬한 빛을 발하며 되살아난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내가 나를 어떤 존재로 규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일이지 않을까. 타인의 눈에 비친 나의 과거는 정렬되지 못한 기록의 조각들일 수도, 때로는 명백한 거짓부렁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성찰은 바로 그 순간, 동굴 속에서 홀로 웃으며 '나는 이 서사가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선언하는 내면의 용기에서 시작된다.


『여우의 계절』에서 길어 올린 나와 당신의 문장은, 세상이 인정한 객관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간절히 믿기로 선택한 진실의 형태다. 혼돈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해명되지 않은 과거의 공백이나 남의 시선을 탓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언제든 새로운 문장을 쓸 수 있으며, 그 문장을 믿는 순간 비로소 상상과 의지가 미래를 향해 빛을 내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여우의 계절』이 천 년의 강을 건너 오늘의 우리에게 전하는 뜨겁고도 독특한 깨달음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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