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
폴 클리브 지음, 백지선 옮김 / 서삼독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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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가끔은 테이크 아웃 잔을 빌어 마음을 내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다정한 일상의 표면 아래,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암호 같은 타인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다면 어떨까. 폴 클리브의 소설 『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는 그 엽서 같은 일상의 뒷면을 칼날로 도려내어 우리 눈앞에 들이민다. 주인공 ‘조’는 그 절개된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악취 나는 진실의 화자다.




'나'라는 이름의 가장 완벽한 알리바이

정유정 작가의 소설 『종의 기원』에서 주인공 한유진이 자신의 포식자적 본능을 '피의 운명'이라는 비극적 탐미주의로 장식하며 독자를 압도했다면, 폴 클리브의 '조'는 철저하게 자신을 '평범함'이라는 익명성 뒤로 은폐한다. 1인칭 시점은 독자를 주인공의 머릿속에 가두는 가장 강력한 장치다. 유진의 문장이 날카로운 메스처럼 독자의 심장을 직접 겨눈다면, 조의 문장은 눅눅하고 곰팡이 핀 지하실의 공기처럼 서서히 독자의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문에는 검은색 글자로 내 이름이 새겨진 작은 금색 명패가 걸려 있다. 조. 성은 없다. 이니셜도 없다. 그냥 ‘조’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조. 그게 나다. 평범하고 흔한 조.


조는 끊임없이 자신을 '평범함'으로 규정한다. 그는 자신이 사이코패스가 아니라고 강변하며, 단지 '관점의 문제'로 살인을 행한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소름 끼치는 질문과 마주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평범함'이라는 기준은 얼마나 허약한가. 누군가에게 평범함은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대지이지만, 조에게 평범함은 자신의 피비린내를 세탁하는 가장 투명한 세제일 뿐이다. 그는 사회가 부여한 '느린 조(모자란 청소부)'라는 가면을 쓰고, 그 뒤에서 타인의 생사를 유희처럼 주무른다.



결핍이 빚어낸 괴물

집에서 키우는 두 마리의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며 조가 느끼는 '신이 된 기분'은 그의 자아가 얼마나 지독한 결핍 위에 서 있는지를 반증한다. 낮에는 경찰서의 오물을 치우며 그림자처럼 존재하고, 심지어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에게조차 한 명의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하는 존재. 그런 그가 선택한 권력의 방식은 생명을 거두는 '크라이스트처치 카버'가 되는 것이었다.


먹이를 조금 뿌려주고 녀석들이 수면으로 올라와 먹이를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 녀석들을 보고 있으면 무한한 애정이 샘솟는 동시에 신이 된 기분이 든다. 내가 누구든 무슨 일을 하든 금붕어는 나를 우러러본다.


이 문장은 조라는 인간의 본질을 관통한다. 그는 누군가와 동등한 눈높이에서 대화할 능력이 없다. 오직 자신을 우러러보거나, 자신의 발아래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대상만을 인식한다. 악은 거창한 악마적 철학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증명받지 못한 자가, 타인을 나보다 못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 할 때 악은 비로소 구체적인 형체를 갖춘다. 조가 모방범을 찾아 나선 이유는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유일한 권력이자 자부심인 '연쇄살인'마저 누군가에게 침범당했다는 소인배적인 질투 때문이다.



전복되는 포식자

소설의 중반, 조의 오만함은 자신보다 더 강력하고 잔혹한 존재인 멜리사와 마주하며 처참하게 무너진다. 조는 자신이 이 도시의 유일한 '감독'인 줄 알았다.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는 내가 정한다'라고 호언장담하던 그의 세계는, 자신을 놀잇감으로 삼은 또 다른 포식자의 등장으로 송두리째 흔들린다.


이 지점에서 조가 느끼는 공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대한 결벽증적인 분노에 가깝다. 그는 자신을 모방한 자를 응징하려 하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어설픈 아마추어였는지를 폭로당한다. 타인을 도구화했던 자가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의 비참함. 작가는 조의 찌질하고 비겁한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우리가 '악'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경외심이나 카리스마를 비웃는다.


악은 세련된 것이 아니다. 그저 더 강한 힘 앞에 비굴해지는 비겁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크라이스트처치, 낙원 그 뒷면의 진실

작가 폴 클리브는 자신이 나고 자란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를 소설의 배경을 넘어 하나의 살아있는 '어두운 캐릭터'로 구축한다.


크라이스트처치. 여긴 ‘천사의 도시’ 따위가 아니다. 뉴질랜드는 평온함과 양과 호빗으로 유명하고 크라이스트처치는 공원과 폭력으로 유명하다. 공중에 본드 한 봉지만 던져보시라. 백 명이 서로 밀치고 넘어지면서 그 냄새를 맡으려고 달려들 것이다.


관광객이 열광하는 아름다운 풍광 뒤에서 조와 같은 포식자들이 배회한다. 조가 사냥하는 대상은 본인 보다 약한 자들이다. 작가는 조의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낙원'이라 믿으며 고개를 돌리는 사이, 그늘진 곳에서 어떤 얼룩들이 지워지고 있는지를. 묘지가 다시 자연의 손에 내맡겨지는 것을 슬퍼하던 샐리의 시선과, 그 묘지 사이를 사냥터로 삼는 조의 시선이 교차할 때, 도시는 비로소 인간성의 시험대가 된다.



타인의 대상화

조는 시종일관 오만하다. 자신은 짐승이 아니며, 나름의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인간성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다. 타인을 나와 같은 무게를 지닌 '당신'으로 인정하는 순간 살인은 불가능해진다. 조가 끝내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신도 나처럼 아프고, 나처럼 살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평범한 진리는 아닐는지.


우리의 일상에서도 '조'의 그림자는 발견된다. 타인을 나의 편의를 위한 수단으로 보거나 특정 집단을 혐오의 대상으로 규정하여 그들의 인격을 지워버리는 행위는, 조가 저지른 살인의 심리적 전초 단계와 닮아 있다. 조가 경찰서 청소부로 일하며 완벽하게 범죄의 흔적을 지우듯, 우리 역시 무의식 중에 타인의 고통을 '어쩔 수 없는 일' 혹은 '관점의 문제'로 치부하며 깨끗이 닦아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라는 문장이 가닿아야 할 곳은

조는 여전히 자신이 똑똑하며, 결국 '가끔은 악당이 이긴다, 그게 인생이다'라며 냉소한다. 하지만 소설은 조의 승리를 응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의 1인칭 시점 틈새로 보이는 주변인들의 선의—비록 조가 '멍청하다'고 비웃는 그 선의—가 얼마나 단단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인생은 조의 표현처럼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흙길로 빠지는 고속도로'와 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흙길 위에서도 누군가는 멈춰 서서 길 잃은 이의 안부를 묻는다. 조가 '느린 조'로 연기하며 받아냈던 동료들의 동정과 친절은 조에게는 기만할 대상이었겠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조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진정한 '인간의 문장'이지 않았을까.




조가 흩뿌려 선혈로 진해진 밑줄들을 덮으며, 다시금 나와 당신 사이에 놓인 이 문장들의 온기를 가늠해 본다. 우리가 서로를 도구가 아닌 존재로 읽어낼 때, 비로소 우리 곁을 배회하는 '조'의 지하실 문은 닫힐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승리는 영원할 것 같아 보여도 결국, 무덤가에 자라난 잔디를 걱정하는 마음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 그것이 이 잔인하지만 흡입력 넘치는 소설을 읽으며 끝내 놓지 말아야 할 사유의 끝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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