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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Ⅰ - 정신의 지도를 그리다 1856~1915 문제적 인간 8
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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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굉장히 매끄럽고 우아하게 작동하지만, 그것의 배후 즉 작동방식이나 기원이 잘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 가령 우리는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고급스러운 스테이크를 먹으면서도 사실은 그 고기가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런 일은 사상사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특정 학파의 사상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정교해지고, 고급스러워지고, 또 권위도 더 생기는 법이지만, 실제 그것이 탄생했던 맥락과 배경은 점차 잊혀지기 마련이다.


<프로이트 I - 정신의 지도를 그리다>는 프로이트 사상의 배후를 그린 책이다. 저자인 피터 게이는 사상사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대학교수. 사상사라는 게 그렇지만 그것의 역사를 다루려면 일단 그 사상이 어떤 건지 제대로 이해하는 게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전공자인 나도 아직 헤메고 있는 분야를 역사학자 입장에서 이렇게까지 노련하게 요리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프로이트는 왜 하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주제에 빠지게 됐던 걸까? 그는 왜 색광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성과 섹스에, 그리고 동성애라는 주제 같은 것에 심취했던 것일까. 그는 왜 그많은 정신병리 중 신경증이라는 범주에 그토록 매료됐던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사실 교과서에도 나와 있다. 당시의 기독교적이고 억압적인 시대문화가 신경증이라는 시대적 질환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억압의 배경에서 성과 섹스가 탐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억압의 기원을 쫓아내려가다보면 성이 다른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가 원형으로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피터 게이는 이런 사상으로서의 사상의 계보를 파헤치는 방향을 택하기보다, 프로이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사상사를 재조직해나간다. (물론 아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그는 오이디푸스라는 구성물이 사실은 프로이트의 자기분석 안에서, 즉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던 그의 어머니와 그 사이에 존재했던 모호한 성적 긴장의 과거력에서 탄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법관 슈레버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투사(projection)라는 개념을 발견하는 과정을 다룬 부분은 특히나 압권이다. 프로이트는 편집증(혹은 피해망상)에 시달리던 법관 슈레버의 사례를 충분히 연구한 뒤 이렇게 결론 내린다. "남자의 편집증에서 갈등의 핵심은 남자를 사랑한다는 동성애적인 소망 환상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일까.


정신의학 교과서에 보면 피해망상의 정신분석학적인 원리가 나오는데, 읽을 때마다 납득이 안 가던 부분이 있다. 피해망상은 투사에서 생기는데, 거기서 투사되는 것이 동성애적 함축을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왜? 교과서에서는 만족스러운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저자는 프로이트와 그의 학문적 동반자들 사이에 있었던 미묘한 동성애의 역사들을 상세히 다룬다. 특히 플리스(Fliess)와의 관계는 독특한데, 프로이트는 그에게 단순한 친구나 동반자 이상의 감정을 경험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프로이트는 후기에 그 스스로도 그것이 '동성애'였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 관계의 양상은 상당히 독특한 것이어서 프로이트의 일생에 걸쳐 대상을 바꾸며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가령 융(Jung)과의 관계 같은 것이 그렇다.


신경증도 마찬가지다. 프로이트가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분석해놓은 것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나 많은 신경증자들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를 분석한 그의 논문을 보면, 신경과민에 가끔 기절에 발작까지 하는 그의 모습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우아한 모습과 상당히 달라 좀 놀랍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여기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필자는 사실 책을 읽기 전까지 프로이트가 그렇게 기절을 많이 했던 사람인지 몰랐다. 그것은 특히 그가 감정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던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나타났는데, 실제로 융과 함께 있었을 때는 상당히 여러번 기절을 하거나 발작을 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런 자기 경험이 신경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았을까.


이외에도 프로이트가 왜 그토록 <토템과 터부>라는 연구 주제에 몰두했는지 (그는 융과의 학문적 경쟁에서 자신의 우위를 입증하고 싶었다), 왜 그가 그토록 <늑대인간> 사례에 골몰했는지 (그는 이 사례를 신속하게 발표하면 융이나 아들러와 자신의 이론이 차이난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미묘한 역사적 배경들이 드러나는데, 이런 숨은 역사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는 못 하겠다. 일단 본문 내용만 600여 페이지에 이르는데, 결코 가볍게 며칠 안에 읽을 수 있는 양은 아니다. 사실 다 읽는 데 거의 1주일이 걸렸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도 이럴진대, 초보자라면 더 걸리지 않을지. 게다가 겨우겨우 힘들게 읽고 나서 뿌듯함을 느껴보려 하는 찰나, 이 책이 장장 2권에 걸친 시리즈 중 첫 번째 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했다. 다음 책도 시간 내서 읽을 수 있을까? 일단 보류하는 것으로...


여담 : 만약 누군가 이 책의 내용을 짧은 다큐로 만들어 유튜브나 넷플릭스에 올려준다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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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M-5 평가문항집
필립 머스킨 지음, 강진령 옮김 / 학지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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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번역이 너무 엉망입니다... 좀 심각할 정도입니다. 이 좋은 책을 왜 이렇게 번역하셨는지... 개정판 등을 내주셨으면 좋겠네요.


간단히 사례 몇 개만 말씀드리자면... 25페이지 정도 되는 범위에 이 정도 번역 오류가 섞여 있습니다.


"이 진단에 적합하지 않다. 이 환자는 지난 2년간 계절성 관계 동반 삽화 2가지가 확실히 있었고, 이 기간에 비계절성 삽화는 없었기 때문이다."

-> "이 진단에 적합하지 않다. 이 환자는 지난 2년간 계절성 관계 동반 삽화 2가지가 확실히 있었어야 하고, 이 기간에 비계절성 삽화는 없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She does not qualify for this diagnosis: the patient must have had two episodes with a seasonal relationship in the past 2 years and no nonseasonal episodes during that period)"


"분노발작과 그 사이에 발생하는 지속성 과민성이 있는 아동들에 대해서는 파괴적 기분조절부전장애 진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 "분노발작과 그 사이에 발생하는 지속성 과민성이 있는 아동들에 대해서는 파괴적 기분조절부전장애 진단을 내려야 한다. (For children with outbursts and intercurrent, persistent irritability, the diagnosis of disruptive mood dysregulation disorder should be made)"


"월경통 증상은 초경과 함께 시작되는 반면, 정의에 의하면 월경전불쾌감장애의 증상은 초경 이전에 시작되며,월경의 첫 며칠간 지속된다."

-> "월경통 증상은 월경과 함께 시작되는 반면, 정의에 의하면 월경전불쾌감장애의 증상은 월경 이전에 시작되며,월경의 첫 며칠간 지속된다. (Symptoms of dysmenorrhea begin with the onset of menses, whereas symptoms of premenstrual dysphoric disorder, by definition, begin before the onset of menses, even if they linger into the first few days of menses.)"


"뚜렷한 정서적 적응성" -> "뚜렷한 정서적 불안정성(Marked affective lability)"



긍정문을 부정문으로 바꾸는 일도 부지기수고, mense를 '초경'으로 맘대로 번역을 해버려서 내용을 완전 꼬아놓기도 하고... 하아...


번역하시느라 물론 수고는 많이 하셨겠습니다만... 그래도 좀 심하긴 한 것 같습니다.


책 사서 보실 분들은 꼭 원서를 따로 사서 같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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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 사회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극단주의의 실체
김태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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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 김태형 지음 / 을유문화사


최근 들어 극단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그만큼 극단주의에 빠진 사람이나 집단이 많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깝게 한국 안의 여성(혹은 남성) 혐오 집단에서부터 멀게는 서양의 뿌리깊은 이슬람 혐오까지. 저자는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나서 기존 심리학에 대한 회의로 학계를 떠난 뒤 현재는 '심리연구소 함께'라는 장소를 운영중인, 소위 '재야고수'류의 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극단주의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배타성, 혐오, 광신, 강요가 그것이다. 네 가지 요소가 모두 합쳐졌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병리적이라고 일컫는 극단주의라는 개념이 성립하게 된다. 그는 기존의 심리학 이론들을 종합하며 이 네 가지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다. 배타성이란 사람들이 외집단과 내집단을 구분하고, 외집단을 배척하려고 할 때 나타난다. 이처럼 외집단을 배척하려는 동기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는데, 이 두려움이 혐오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 나와 다른 것에 대해 사람들은 혐오를 표현할 확률이 높다. 광신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합리성이 결여된 신념이나 믿음을 말한다. 저자는 나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직면할 때에야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부정이 결국 광신을 야기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처럼 배타성과 광신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기 혼자만 그러한 믿음에 빠져 있다면 극단주의라고 보기 힘들다. 저자는 자신의 그릇된 신념을 타인에게도 강요하는 과정이 관여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여기까지 보면 이 책이 단순히 기존의 심리학 이론을 먹기 좋게 요약해 놓은 책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의 진짜 목적은 현대의 주류 심리학계가 극단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주류 심리학을 인지주의(혹은 인지-행동주의) 심리학이라고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인지주의 심리학이란 "인간을 본질적으로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로 간주하는 ... 즉 인간을 '지적 능력이 있는 동물', '머리에 컴퓨터가 달려 있는 동물'로 바라보는 인간관"(85p)이다. 인지주의 심리학은 집단 극단화라는 이론으로 극단주의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 이론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해보자면, "사람은 서로 생각이 같은 집단 속에 들어가면 극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진다"(90p)는 것이다. 한 사람의 신념이나 감정, 성향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인지주의적 관점에 걸맞게) 정보의 편중화가 극단화를 더욱 가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집단 구성원들이 서로 편향적인 정보를 주고 받는 행위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줌으로써 기존의 성향을 더욱 강화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 따르면 극단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사람이 보다 많은 접촉을 할 수 있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집단 극단화 이론은 여러 가지 난점을 가진다. 첫째는 그것이 극단이라는 개념을 질적이 아닌 양적인 차원으로만 바라본다는 것이다. 나쁜 사람들끼리 모이면 나쁜 신념이 확산되는 만큼, 좋은 사람들끼리 모이면 좋은 신념이 확산될 확률도 그만큼 크기 때문에 단순히 양적 확산을 가지고만 설명하는 것에는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지주의 심리학이 지나치게 정보의 편중화에만 치중한다는 것이다. 정보라는 것은 실제로 기존의 감정과 신념 등에 영향을 받아 구성되고, 어떤 경우에는 감정이 정보의 가치를 결정하기도 하는데, 집단 극단화 이론은 이러한 감정적인 차원의 역할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접촉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반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름을 지나치게 강조한 다문화 교육의 실패 사례, 정당의 다양화 또는 이분화가 오히려 사회 분열과 정쟁을 야기함으로써 통합을 방해하는 등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오히려 사회에 필요한 것은 통합과 "공유된 목표"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책은 이렇게 전반부를 지나가면서 비로소 저자가 진정 하고싶은 주장을 향해 간다. 저자는 왜 이런 심리학의 조류가 발달하게 됐다고 생각할까? 그는 심리학이 기본적으로 민중 혐오를 촉발시킨 기폭제로 역할했다고 하면서 나름의 계보학적 분석에 따라 이를 논증하고자 한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서구 사회는 지배층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피지배층을 광신적인 집단으로 규정해야만 했고, 이로 인해 극단적인 집단이라는 심리학적 개념이 발달하게 된다. 멀리는 독일 농민 전쟁과 프랑스 혁명, 노예 해방운동과 여성 해방운동에서부터 가깝게는 반이슬람주의에 이르기까지, 지배층은 언제나 피지배층을 예속화하고, 분열시킴과 동시에 그들을 수동적이고 무력한 인간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저자는 심리학의 발달이 인간의 주체성을 폄하한 역사들로 점철돼 있다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은 인간을 본능과 욕동의 노예로, 따라서 초자아라는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무력한 인간 존재로 바라본다. 이는 정신분석학을 극복하고자 했던 인지심리학도 마찬가지다. 그는 밀그램의 복종 실험과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등을 언급하면서, 이 모든 이론이 권력과 시스템 앞에서 무력하고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관을 양상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관은 필시 민중의 예속화를 정당화하고, 민중으로 하여금 그런 것을 자발적으로 내면화하게 만든다.


사실 책의 전반부는 내용을 쉽게 정리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그렇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책은 점차 자의적이고 다소 지엽적인 분위기를 띤다. 자연스럽게 이론적인 엄밀성이 떨어지게 되고, 내용이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흐르게 되는데, 이것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부분에 이르면서 극에 달한다. 그래, 극단주의가 뭔지 알겠고 그것의 배후에서 누가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있는지 나는 알겠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본소득제를 도입하고, 자녀에 대한 학대를 금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국가 차원의 공동체를 재구성함으로써 다양한 집단 간에 피상적인 아닌 의미 있는 관계와 연결들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지면이 많이 할애되지 않아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해결책이랄 것이 결국 문제제기를 또다시 번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앞서 '재야고수'라는 단어를 언급했는데, 이게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다보면 마치 선생님이 자신만의 언어로 쉽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주변의 구체적인 사례들이 나열되고, 말하는 사람의 주장에 강세가 놓인다. 그러나 학교 선생님의 강의라는 게 그런 것처럼, 과장이 섞여 있으며 학문적 엄밀성은 다소 부족해보인다. 가령 정신분석학이 인간을 단순히 동물적인 존재로 보았다거나 심리학이 정보의 개념에만 편중한다고 말하는 부분은 좀 걸러서 읽을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심리학 특유의 개념주의적이고 인지주의적인 관점(심리학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가령 유럽의 철학적 전통의 사유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책에서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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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러시아 1891~1991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조준래 옮김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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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혁명의 러시아 1891-1991

 

OOO로 돌아가자! 라는 구호에는 항상 모종의 리스크가 따른다. 초기 교회로 돌아가자는 교구의 외침에, 프로이트에게 돌아가자는 라깡의 선언에, 맑스에게로 돌아가자는 수많은 좌파 인사들의 주장에는 모두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굳이 멀리서 예를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연애 초기의 설렘으로 돌아가자는 연인들에게서, 2002년으로 되돌아가자는 국민의 함성 속에서도 비슷한 부담의 하중을 경험한다. 그러나 동일한 것을 반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언제나 실패하는 법. ’동일한 것의 반복이 필연적으로 실패일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들뢰즈를 참조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반복을 몸소 체험하고 있고, 그러한 반복의 천명이 예고하는 실패와 좌절, 그리고 위험을 이미 삶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러시아 1891-1991>이러한 반복에 대한 하나의 사례집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러시아의 반복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 역사적 사실로서의 이야기다. 스탈린, 후르쇼프, 푸틴 모두 저마다의 방식대로 '레닌에게 돌아가기'를 꾀한다. 러시아의 근대사는 레닌에게 복귀하고자 하는, 레닌을 반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서의 역사다. 필자는 책을 읽는 내내 이것이 한 국가의 역사라기보다는 한 가문의 역사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마치 영화 <대부>에서 돈 꼴레오네를 반복하는 마이클 콜레오네의 모습을, 그리고 그러한 반복 속에서 실패의 굴레 속으로 점차 침잠해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분명 역사서이고, 따라서 사건들을 나열하며 서술되어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책의 내용을 파악할 때 특정한 개인들을 중심으로 계열을 형성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많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사실 책은 은연 중에 독자로 하여금 그렇게 특정한 개인들, 즉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흐루쇼프 (독자에 따라 이 계열을 형성하는 개인들은 다소 다르게 선별될 수도 있을 테지만)를 따라 내용을 계열화시킬 수 있게 인도한다. 만약 역사서가 성공적인지 여부를 그것이 독자로 하여금 저마다 용이하게 계열을 형성할 수 있게, 하나의 지도를 그릴 수 있게 해주는 지의 여부에 따라 판단한다면, 이 책은 분명 성공적인 역사서라고 볼 수 있다. 필자의 계열화에 따르면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레닌의 시기에 대한 이야기이며 두 번째는 스탈린의 시기, 세 번째는 스탈린 이후의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레닌의 시기1891년 대기근에서부터 시작한다. 러시아의 봉건주의가 최후의 단계로 치닫게 되면서 로마노프 황실의 무능함이 드러난다. 그러한 무능함은 1905년의 피의 일요일에서 극한에 다다른다. 레닌은 이 피의 일요일에서부터 시작된 일련의 저항과 봉기를 ’1차 혁명이라 간주하면서 그 혁명의 정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고자 한다. 191710월 혁명을 기점으로 레닌을 중심으로 한 소련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한다. 레닌은 지도자들 중에서도 다소 강경하고 극단적인 편에 속했다. 그는 소수의 무장한 볼셰비키 당원을 중심으로 한 혁명을 주장했다. ’무장화‘, ’다른 당의 배제는 그의 통치 방식의 중심을 이룬다. 레닌에 의한 소비에트 권력의 확립 과정에서 자주 뒤따랐던 것은 부르주아소유 재산의 몰수였다. 레닌은 지역의 볼셰비키 지도자들로 하여금 일종의 복수에 의한 사회정의 실현의 형태로서 약탈자들에 대한 약탈을 조직하도록 독려했다.”(155p) 이런 과정에서 쿨라크라는, 볼셰비키가 만들어낸 자본주의적 농민이라는 유령같은 계급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허수아비에 대한 공격과 억압을 통해 레닌은 자신의 통치 기반을 강화했는데, 스탈린은 훗날 이런 전략을 받아들여 그 유명한 대숙청을 진행시키기에 이른다.

 

스탈린의 시기1924년 레닌의 사망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강체추방시키고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다. 그리고 그에 이어 러시아에는 피비랜내 나는 살육의 역사와 모든 자유 및 인권에 대한 탄압의 대서사시가 펼쳐진다. 필자는 세계사에 대한 지식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 사실 스탈린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하게만 알고 있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느끼게 된 건... 그는 정말이지 무자비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앞서 스탈린이 레닌의 공포통치의 전략을 받아들여 대숙청을 일으켰다고 묘사한 바 있다. 그런데 저자는 레닌의 가혹함을 설명하면서도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짓는다. 그는 레닌의 통치에 대해 말하면서, 첫째로 보다 적은 인명이 희생됐다는 것, 둘째로 당 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했다는 것, 셋째로 당 동료들을 정치적 견해로 살해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 넷째로 농민에 대한 정책 수립시 보다 농민 친화적이고 관용적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스탈린이 분명 더 가혹한 인물이었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스탈린 통치 시기 대체 얼마나 많은 인명이 강제노동소로 추방되고, 살해되었는지 파악하는 것이 어려울 지경이라고 말한다.

 

사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스탈린의 시기’, 혹은 다른 말로 대숙청의 시기에 집중이 잘 됐다. 아마도 정신과 의사 특유의 호기심이 스탈린의 광기와 편집증Paranoia에의 이끌림을 야기한 게 아닌가 싶다. 도대체 그것들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이 질문은 사실 히틀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절대다수의 민중이 어떻게 한 개인의 광기를 그런 지경까지 방관하고, 또 유지하게끔 만들 수 있었던 것인가? 책의 저자는 나름의 이유에 대해 책의 이곳 저곳에서 그 이유들을 분석하고 있다. 필자가 사견을 조금 붙여 그 원인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앞서 말한 대숙청, 그리고 그로부터 연원하는 민중들의 공포심으로 일련의 결과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스탈린의 통치 시기 그 누구도 자신의 소리를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숙청 시기 매일 평균 1500명 가량이 총살당했”(283p)으며, “스탈린은 한 명의 첩자를 잡기 위해 수천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체포”(286p)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밀고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웃을, 가족을, 심지어 연인을 먼저 밀고하기에 급급했다. “대숙청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동료, 이웃, 친구에 대해 밀고했”(292p),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시민으로서 본연의 책무를 하고 있다는 진정한 확신에 불타 맹렬한 고발장을 써댔다. ...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를 비난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비난하려고 서둘렀다.”(293p) 공포는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적국들에 대항해 소련의 단합을 야기하는 기능을 보이기도 했다. 스탈린은 국민들이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경우 그들을 체포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지부조화에 의한 것이다. 인지부조화란 인간 심리가 자신이 부정되어야 할어떤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고 개선되기보다는 차라리 해당 사건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편을 택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가령 흡연자는 폐암 환자의 사진이 걸린 담배갑을 보고 금연에 이르기보다는 차라리 나는 폐암에 걸릴 리가 없다며 태도를 수정하기에 이른다. 저자에 따르면 러시아의 민중들은 스탈린의 통치 내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고, 자신의 의혹을 억누르거나 소련 체제에 대한 믿음의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의심을 합리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297p)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틀을 유지하고자했다는 것인데,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러시아인들 특유의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 정신을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봉건시대의 차르는 러시아인들에게 일종의 아버지와 같은 것이었다. 레닌과 스탈린은 이러한 우상화를 이용했고, 더 강화시켰으며, 그런 전략이 실제로 성공했다. 쉽게 말해 러시아인들은 그들의 역사 내내 아버지는 언제나 옳아야만 한다는 무의식적 압박을 받으며 성장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망상의 발전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스탈린의 심리적 기제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미숙한 단계의 정신구조일수록 투사Projection’의 방어기제를 주로 사용하며, 따라서 타인에 대해 편집증적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개인은 성숙한 정신 구조에 이르렀다가도 크나큰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 경우 일시적으로, 또는 굉장히 오랫동안 편집증적인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책을 통해 스탈린이 특히나 더욱 더 편집적이 되는 시점들을 마주치게 되는데, 그런 시점들의 공통점은 모두 스탈린이 외부로부터 위협을 느끼거나 국가가 위태로울 때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스탈린은 그 스스로의 정신 상태 자체가 매우 취약했던 것이 아닌가, 따라서 굉장히 쉽게 편집증적 상태로 전환되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편집증적 상태는 사람들 사이에 매우 쉽게 전염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편집증을 보이는 가장의 자녀가 종종 동일하게 편집증을 보이는 것에 대해 유전이다라고 한 마디로 결정내리는 것만큼 바보같은 짓도 없다. 한 가정의 부모의 영향력이 그러할진대, 한 국가의 지도자가 편집증적일 경우는 도대체 어떨 것인가. 게다가 여기에 덧붙여 망상의 표면화라는 측면도 있다. 국가 지도자가 적절한 규범을 제시하는 경우 망상체계는 표면화되지 않고 음지로 숨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의 망상 환자들은 병원이나 치료시설에로 수렴한다. 그러나 망상이 정치적으로 허용되는 상황에서는 이것들이 정정당당하게자신의 발언권을 얻으면서 표면화된다. 가령 자신들 안의 모든 부정적인 찌꺼기를 흑인멕시코인이라는 외부의 대상들에게로 투사하기에 급급한 현재 미국인들의 정신구조를, 트럼프라는 보호자의 승인 아래 자신들의 망상을 정정당당하게 설파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행태를 보라.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 러시아인들 내부에 자리잡았던 근거없는 공포와 편집증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스탈린의 시기에 뒤이어 스탈린 이후의 시기를 기술하며 책을 끝맺는다. 스탈린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사망하게 되면서 소련체제의 지도부는 스탈린이 저지른 만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한다. 고심 끝에 지도자 흐루쇼프는 모든 사실을 폭로하고 당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폭로는 신뢰의 회복을 야기하기는커녕 오히려 소련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만 키운다. 이후 소련체제는 갑자기 몰락의 길을 걷는다. 이후 책에서는 고르바초프와 옐친 등을 거쳐 푸틴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러시아 통치자들에 대한 간략한 역사가 서술된다.

 

여기서 필자는 소련체제 붕괴 이후 러시아의 대처에 대한 부분이 많이 와닿았다. 이상주의자인데다가 민주적이기까지 했던 고르바초프의 통치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던 볼셰비키 강경론자들이 쿠데타를 감행하지만 실패하고, 이 틈을 타 민중의 세력에 힘입은 옐친이 등장한다. 그는 러시아 내 소련공산당의 활동을 중지하는 법령을 발표”(419p)하고, 19927, ‘러시아판 뉘른베르크심리가 열리게 된다. 과거 소련 공산주의자들이 법정 앞으로 불려오게 되고, 스탈린 통치 아래 그들이 휘둘렀던 만행과 범행들이 낯낯이 고해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1945년의 나치에 대한 재판과 달리, 범죄 행위로 기소된 피고가 한 명도”(425p) 나오지 않는다. “13명의 판사들 가운데 12명이 과거에 공산주의자들이었”(426p)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누구를 처벌한다는 것인가? 자신들의 과거를 더럽힌 범법자들에 대한 안일한 대처는 결국 러시아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엄밀하게 평가할 기회를 박탈하고 만다.

 

이에 대해 저자는 독일과 러시아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독일과 달리 1세기의 3/4가량을 소비에트 체제의 지도 하에 있었던 그들의 상황 상 엄밀한 자기비판이 불가능했음을 보인다. 소련에게 공산당이라는 것은 단순한 당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많은 국민들은 ... 공산주의의 상실에 대해 ... 도덕적 공백을 느”(431p)끼기 했다.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역사가 현대에까지 내려오면서 푸틴과 같은 정치가가 당선되기에 이른다. 푸틴은 조국의 소비에트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오래된 세대에게서 인생의 의미를 빼앗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432) 말하며, “소련 시기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표현했다고 판단되는 교과서”(433p)들을 퇴출시키기에 이른다. 20073개도시(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울리야노프스크)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탈린 치하의 집단 탄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반면에, ... 이들 응답자 중 3분의 2는 스탈린이 조국에 긍정적이었다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 (434p)

 

과거사에 대한 러시아의 대처를 보면서 묘하게 대한민국의 역사가 겹쳐지는 것을 느낀다. 해방 당시 우리의 태도는 어땠는가? 우리는 정말 제대로,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던 것일까? 또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체제로부터 도덕적 기준을 부여받았던 러시아인들의 역사를 보면서, 현재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했다. 위대한 수령님의 미세한 동작 하나 하나의 변화에도 지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 세뇌된 북한 국민들에게서 그들의 도덕적 기준이 박탈되는 그날이 찾아온다면 어떤 일이 벌이질 것인가? 훗날 북한의 붕괴 이후 북한의 역사에 대해 이런 책이 발간될 날이 온다면, 그 책 속에서 김정은은 어떻게 평가되고 있을까. 필자는 책을 덮으면서 이런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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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1
이토 준지 지음, 오경화 옮김, 다자이 오사무 원작 / 미우(대원씨아이) / 2018년 11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포 만화 작가로 유명한 이토준지가 <인간실격>을 출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 뜨악!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대체 무슨 조합인지 모르겠지만 묘하게도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면서 기대가 되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기대감이 생기면 그에 합당한 만족감이 수반되기는 참 어려운 편이다. 그렇지만, 단언하건대, 이토 준지의 이 작품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편에 속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묘하게도 잘 어울린다는 그 느낌을 말로 풀어보는 것이다. 나는 두 가지 면에서 이 어울림을 설명해보고 싶다. 첫 번째는 내용의 측면과 관련되고, 두 번째는 만화라는 매체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성과 관련된 것이다. 첫 번째 측면을 다루기 위해서는 소설의 내용이 이토 준지라는 작가에 의해 어떻게 소화되었으며, 그것이 왜 이러한 결과물을 도출했는지 알아봐야 한다.

 

이토 준지의 기존 작품들에 항상 등장하는 것이 있다. 혼령이나 괴물,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저주다. 이 저주라는 건 꼭 어떤 영적 존재가 희생자에게 내리는 그런 종류의 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차라리 여기서 말하는 저주라는 것은, 힘 없는 인간 군상이 그에 따를 수밖에 없고 그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비참하고도 잔혹하며 기괴한 운명 같은 것을 말한다. 만화 <인간실격>에서도 이런 저주의 테마가 나타난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살아가지 못한 요조의 뒤에는 언제나 아버지의 망령이 뒤따른다. 요조가 관계한, 그리고 그러한 관계로 인해 파멸을 맞은 수많은 여인들의 망령들은 만화 중간 중간 계속해서 튀어나와 요조를 괴롭힌다.

 

우리는 어릿광대짓이라는 단어 하나로 원작 속의 요조가 겪었던 수많은 고뇌와 불행을 설명할 수 있다. 요조는 끊임없이 내가 가져야 할 모습내 진짜 모습사이의 분열 속에서 신음한다. 생일 선물로 책을 받고 싶었음에도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던 그의 모습이나, 여성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말재간을 부리던 요조의 모습 속에는 메꿔질 수 없는 깊은 분열의 심연이 있다.

 

그런데 이 심연이라는 것은 그것에 메꿔지지 않고 강화될수록 계속해서 요조에게 일종의 부채를 남긴다. 요조는 아버지로부터, 츠네코로부터, 시즈코로부터, 넙치로부터 도망가면서 계속해서 자신 안의 부채를 회피하지만, 그러한 회피 안에서 부채는 점점 커질 뿐이다. 사실 소설 속에서는 그러한 부채가, 요조가 스스로 자책하는 대목이라든지 고통에 신음하는 장면 속에서 은연 중에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이 만화로, 그것도 이토 준지라는 작가의 내러티브 안에 위치하게 되면서 부채는 망령의 모습,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들의 모습으로 주인공 요조를 쫓는다. 거기에 이토 준지 작품의 강점이자 재미가 있다. 다시 말해, 이토 준지의 만화는 이 분열이라는 심연을 망령의 저주라는 형식을 빌려 효과적으로 시각화해서 보여준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에 대한 두 번째 측면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만화의 장점은 시각화에 있는데, <인간실격>에서 이런 장점은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처리하는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특히 여성들의 시선이, 이토 준지 특유의 작화에 따라 공포스럽게 묘사되는데, 이것은 극중 요조가 느끼는 여성에 대한 공포감을 매우 극적으로 표현해주는 역할을 한다. 가령 자신을 발로 짓밟고 떠난 요조를 끝까지 따라다니는 나에코의 시선이나, 죽은 뒤 혼령의 모습으로 끝까지 요조를 괴롭히는 셋짱과 아네사, 그리고 츠네코의 원망스러운 눈빛이 그렇다. 이 모든 시선들, ‘세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그 시선들은, 분열이 심화되고 부채가 늘어날수록 요조를 더욱 옭죄는 요조 안의 타인의 시선이다. 만화는 이러한 시선으로 인한 공포감을 극대화시킨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실격>을 만화화하는 것은 한편으로 묵직한 원작에 일종의 B급 정서를 가미하는 효과를 갖기도 하는데, 이게 쏠쏠한 재미거리를 준다. B급 정서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테지만,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그것은 영화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 또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잔혹극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저질스럽고 더러운 개그 코드를 말한다. 가령 이토 준지는 원작에서 나에게는 그 백치나 미치광이 같은 매춘부들에게서 마리아의 원광을 본 밤도 있었습니다.”라고 쓰인 문장을 책의 양면을 할애해가면서 그대로 묘사하는데 여기에서 필자는 푸학 하고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원작에는 나오지도 않는 타케이치와 나에코의 사망 사건을 끼워넣고서는 그들의 망령이 나타날 때마다 혼비백산하는 요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럴 때마다 이토 준지 특유의 그 저급한(이건 비하하는 말이 아니다) 개그 코드를 경험할 수 있다.

 

고로 이 B급 코드가 잘 맞지 않는 사람은 만화 <인간실격>이 다소 거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필자도 가끔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거북해서 책을 덮어버리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특히 요시코가 다른 남자에게 범해지는 장면이 그랬다. 원작에서는 상대방 남자를 묘사하는데 상대방 남자는, 나에게 만화를 부탁하고 약간의 돈을 놓고 가는 30세 안팎의 무식한, 그리고 조그마한 상인이었습니다.”라고 짧은 지면을 할애할 뿐이다. 그러나 이토 준지는 이 장면을 더 불쾌하게 만들기 위해 상대방 남자로 깔끔하고 모던한 출판사 직원을 등장시키고, 요시코를 계속해서 음흉하게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반복해 묘사하는가 하면, 요시코가 범해지는 그 장면을 마치 포르노물에나 나올 법한 식으로 그려냄으로써 요조가 느꼈을 구역(嘔逆)을 노골적으로 전달한다. 게다가 심지어 원작과 다르게 요조는 그 장면을 보고 마스터베이션을 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로 장점이 많은 작품이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이토 준지의 작화나 묘사 방식에 거북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비추하는 바다. <인간실격>을 소설만으로 보고도 구역감을 느꼈다던 내 친구에게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일본이 낳은 두 작가의 이종교배의 산물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괴물이 그 혐오스러운 몰골 너머로 방출하고 있는 마력(魔力)을 제대로 경험해보고 싶다면, 정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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