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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과잉존재
김곡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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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최근 주변 친구들, 지인들, 심지어 환자들 중에서도 이 책 (혹은 이 책에서 발췌된 문구들과 연관된) 을 언급하는 경우들이 많아서 한 번 훑어볼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어떤 오랜 친구는 “김곡이 ~~라 하던데, 설마 나도 ADHD인 거 아니야?”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며칠 전 어떤 환자분은 내게 찾아와 “어디서 글을 보니 제가 조울증인 것 같던데요?”라고 묻기도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한 친구가 이 책의 타당성과 관련해 나의 의견을 구해왔다. 그래서 이왕 정리해보는 김에 글로 써보기로 했다. 책을 펼치고 4장까지는 어떻게 참고 읽어봤는데, 그 이후로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어서... 그만 덮어버리고 말았다.

최소한 서론~4장에 이르기까지 (5장부터는 도대체 얼마나 더 풍부한 논의가 진행되는지는 알 수 없는 바이지만)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면 이런 것이다 : 과거의 주체들은 따라야 할 기준, 지켜야 할 기준점이나 경계선들이 있었으나,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경우 사회의 요구에 의해) 경계가 흐려지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런 경계의 소거 때문에 현대적 주체들은 과잉된 것들을 추구하게 된다. 이것이 현대의 병리고, 그것이 ADHD, 공황장애, 우울증 등등의 정신병리를 야기한다!

사실 근대 이후 기준이나 한계가 사라졌다는 건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 남근이고 상징이며, 시쳇말로 절대주의적인 윤리나 규범 혹은 ‘으르신 말씀’이라면, 현대 사회에서 그런 것이 부재하고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현대에서는 고전적 히스테리나 강박증이 사라지고 있다고 이야기한 저자의 지적(이런 지적은 이미 해묵은 이야기여서 사실 새로울 것은 없지만)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다. 게다가 저자가 ‘현대인들은 과잉에 노출되어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건 너무 당연하게도 맞는 말이고, 우리 모두 그게 뭘 의미하는지 직감적으로 안다.

내가 다만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은, 저자가 본인의 저서를 철학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정작 철학이 할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심각한 지적 태만을 보이고 있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 부분을 보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측면에서 지적 태만이 관찰된다는 것일까? 몇 가지로 크게 정리해서 일별해보고자 한다.

1. ‘과잉’이라는 개념의 애매모호함.

저자가 ‘과잉’이라는 말로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저 무언가 양적으로 많은 느낌을 주면 ‘과잉’인 것인가? 그는 현대의 노동자가 과로를 할 때 일을 ‘많이’ 해서, 나르시시즘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충동구매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품들’을 구매한다고 해서, 폭식증 환자가 ‘많이’ 먹는다고 해서, 이것들이 모두 ‘과잉’의 문제라고 퉁쳐버린다.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그렇다면 근대적인 히스테리의 구조에서는, 도덕의 억압과 상징적 대타자들의 압력이 지나치게 많으니까 그것도 ‘과잉’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저자는 ‘많다’, ‘뭐든지’ 같은 술어가 양적 과잉을 지시한다는 면에서 곧바로 그것들이 ‘과잉’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결론내버린다. 그러나 뒤에서 다루겠지만, 표면상 과잉의 문제로 드러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동일한 문제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저자가 이야기하는 ‘과잉’은 특수한 종류의 과잉, 즉 테크놀러지적인 현대 시대에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범람하는 이미지들, 혹은 시뮬라크르 같은 것을 의미하는 그런 과잉만을 이야기하는 거라구욧!”라고 변호하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좋다. 거기까지만 이야기하는 거라면 뭐 뻔한 이야기고,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다. 문제는 저자가 그 단어에 꽂혀서 과잉이라는 술어를 매개하는 온갖 질병(ADHD, 우울증, 나르시시즘, 편집증, 정신증...)들을 다 자기가 설명하고자 하는 사태 속에 때려박는다는 것이다.

2. ‘과잉’의 필연성

저자는 현대인들에게 기준점이나 한계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갑자기 ‘그러므로 현대인이 과잉을 맞딱뜨린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기준이나 한계의 부재가 무조건 과잉으로 이어지는가? 여기에는 알게 모르게 저자의 개인적인 (근거 없는) 주장이 끼어들어간다. 어째서 ‘A의 부재’가 ‘과잉’으로 귀결되는가? 저자는 어떻게든 말이 되어보게 만들어보려고 멜라니 클라인까지 동원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현대인에게는 하나의 기준 (하나의 남근) 이 없으니까, 마치 하나의 남근 아래로 모든 것들이 질서잡히는 성인과 대비되는 유아의 수준에서처럼, 세계는 하나의 질서로 묶이지 않고 무분별한 부분대상적인 투사물들로만 점철되어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클라인은 부분대상 개념을 (부분 대상은 아직 대상이 되지 않은 파편들을 의미함) ‘과잉’이라는 개념과 연결지은 적이 없다.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다. 다만 대상으로의 통합이 부재한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대상의 통합 이전에 ‘무’가 있는지, ‘과잉’이 있는지(그리고 심지어 저자는 그 ‘과잉’이라는 게 ‘전체의 부분’들의 과잉인 건지, ‘전체가 전제되지 않은 미분적인 것들의 과잉’인지도 구별하지 않는다) 의 문제 자체가 바로 철학적 탐구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데, 저자는 이런 부분은 그냥 얼렁 뚱땅 넘어가버린다.

3. 경계의 부재는 원인인가 결과인가?

저자는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기준(경계)의 부재가 과잉을 동반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 고정된 규범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혹은 무엇이 리얼한 것이고 무엇이 시뮬라크르적인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그렇다면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이것 저것 구분 없이 무한정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것이 과잉에 대한 추구를 낳는다는 것이다. 저자가 하도 논리 없이 이야기해서 이 부분이 좀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는데, 사실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가령 프랑스 계통의 정신분석학에서는 도착증 구조를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 상징(남근)의 도입이 불완전하게 일어나니까, 그걸 보상하려고 자신을 처벌하는 심급(agent)를 인위적으로 무한정 도입시킨다는 것이다. 자신을 적절히 처벌하고 적절한 죄의식을 전해줄 초자아가 부재하니까, 억지로 초자아를 만들려다보니 여기저기서 처벌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기준의 부재가 과잉을 야기한다는 논리가 말이 된다.
그런데 또 어떤 부분에서 저자는 과잉주체가 그 스스로 기준들을 와해시킨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과잉 주체는 “자아의 경계를 허물려는 인간”이고, “경계가 싫기 때문”에 경계를 허물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기준의 존재와 과잉 사이의 인과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기본적인 논의조차 제대로 규정하지 않는 책이 철학 저서라고 버젓이 나와 있는 게 우스꽝스러울 따름이다.

4. 개념의 무한정한 혼용

저자가 과잉 주체를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본인이 개념의 과잉 속에서 길을 헤매는 느낌이다. 도대체 정신의학이나 정신분석학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은 있는 상태에서 글을 쓴 건지도 모르겠다. 지적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몇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첫째는 저자가 나르시시즘의 문제와 경계성 장애, 편집증, 심지어 정신증까지도 동일한 수준에서 다루어버린다는 것이다. “모든 과잉주체는 나르시시스트다. 편집증자이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방귀같은 소리인가?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나도 알겠다. 중심적 남근이 부재하니까, 마치 클라인적 유아의 정신구조처럼, 현대인들은 세계를 온갖 부분대상적 투사물들로 과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투사한다는 면에서 편집증적이라는 것이고, 대상이 없다는 면에서 나르시시즘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순전히 말장난이다. 어디 가서 나르시시즘이나 정신증이나 둘 다 대상이 없는 거니까 똑같은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면 정말 바보 소리 듣는다. 정신증은 정신 내적인 것들이 온전히 투사물들로서의 현실을 구성하는 상태를 말한다. 쉽게 말해 깨어 있으면서도 꿈 꾸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조현병 환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꿈에서 경험할 만한 일들 (ex. 국정원 직원이 나를 감시하고 있다, 나더러 죽으라는 말을 누군가 계속 한다) 을 현실 속에서 경험한다. 현실적 대상이 없는데도 마치 현실적 대상이 자신에게 말을 하듯이 환청을 들으니 당연히 ‘대상이 부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에서 대상이 부재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건 현실적 대상과 꿈 속 대상을 구별 못 해서 환각이나 망상에 시달리는 사태가 아니라, 타자를 독립된 인격으로 간주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확장체처럼 여기는 사태다. 존중받는 독립적 타인이 계속 부정되기 때문에 진정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 꽂혀서 나르시시즘이나 편집증이 비슷하다고 이야기한다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둘째로 저자는 “양극성”이라는 개념을 여기 저기 아무데나 갖다 붙인다. 도대체 그는 “양극성”이라는 개념으로 무엇을 규정하고 싶은 것일까? 저자는 때로는 “분열과 해리”를, 때로는 감정이 두 극단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거짓 자아와 참 자아가 분열되는 것을, 대상이 이상화와 평가절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양극성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용법을 끌어들인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저자가 참 친절하게도 Bipolar라고 영문까지 기재해주고 있는 양극성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흔히 조증과 우울증이라고 부르는 감정적 상태를 지칭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양극성의 개념을 경계성 성격(분열, 해리, 이상화와 평가절하)을 설명할 때도 갖다 쓰고, 나르시시즘(False self와 true self의 분열)을 설명할 때도 갖다 쓴다. 심지어 사랑과 섹스가 인스턴트 식으로 바뀐 현대인을 보고는 “원나잇 섹스와 대인기피증이라는 양극단만을 진동하는 양극성 장애 환자”라고 부른다.

이런 개념의 오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현대인이 겪는 다양한 문제들 (경계성 성격, 나르시시즘, 양극성 장애) 은 서로 각각 다른 원인들과 맥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과잉에 둘러싸여 공허감을 느낀다고 하면서, 그런 ‘공허감’을 양극성 상태라는 하나의 상태로 퉁쳐서 설명하려고 한다. (심지어 저자는 공황장애 환자들도 공허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공허감이라는 것은 경계성 혹은 수줍은 형태의 자기애성 성격에서 나타나는 감정적 상태를 지칭한다. 경계성 성격에서는 자기 정체성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공허감이 나타나고, 그래서 그들은 자기 신체의 경계를 확고히 하려고 자해를 하기도 한다. 폭식 문제도 이런 공허감을 채우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수줍은 형태의 자기애성 성격에서는 거짓 자기(false self)가 발달하다보니 진짜 자기 자신이 뭔지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항상 완벽하고 우월한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뒤편에서는 계속해서 공허감을 느끼게 돼 있다. 양극성 장애 환자들은 조증 삽화 이후 우울 삽화를 경험하곤 하는데, 이 우울삽화는 일반적 우울삽화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것을 굳이 ‘공허함’이라고 따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공황장애의 경우 뒤에서 따로 설명을 하겠다.

게다가 저자는 참 친절하게도 DSM 진단체계까지도 레퍼런스로 달아가면서, 양극성 장애 환자를 진단하는 진단 기준 중 하나가 “과도한 사업투자”라고 하면서, 그것이 ‘과도’하니까 ‘과잉’아니겠냐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저자 말을 따르자면, 조증 같은 것도 결국 과잉 주체가 겪는 질환이고, 결국 미디어와 매체의 범람이 만들어낸 현대적 질환이라는 건데, 도대체 맞는 말이 하나도 없다. 일단 조증(mania)이라고 이야기하는 상태가 이미 19세기에 규정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게다가 저자는 조증이라는 걸 현실에서 한 번이라도 봤는지 의문이다. 조증은 그냥 기분이 좋고 들떠서 이것저것 사들이는 어떤 감정상태가 아니다. 그건 일반적인 사람들이 느끼는 붕 뜬 그런 느낌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조증은 우울증 같은 정동 장애랑 유사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과 의사들은 조현병과 양극성 장애를 감별하는 것을 가장 어려워한다. 그만큼 심각한 질환이고, 생물학적 원인이 큰 병이다. 그래서 정동장애 중에서는 유전성도 높고, 심리학적 원인이 없이도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약물치료가 상당히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보고 “과잉 사회가 만들어낸 주체다”라고 한다고? 거참... 어떻게 변호를 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증상이 풀로 나타난 상태로 병원에 오는 양극성 장애 환자들은 조현병과 잘 구별도 되지 않아서, 대부분 일상 생활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한다. 컴퓨터고 SNS고 나발이고 그런 거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조증을 겪으면서 병원에 온다는 뜻이다.

5. 공황장애는 불안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공황장애 환자는 불안이 너무 커서 방향감각을 잃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불안의 대상을 특정할 수 없어서 방향을 상실한다” 이건 도대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러니까 저자 말은 이런 거다. 대부분 공황장애가 무슨 공포증 처럼 특정한 대상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본인 생각에는 그런 게 아니라 경계 없이 모호한 무엇, 혹은 경계가 없어지는 것 자체에 의한 불안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것을 또 ‘과잉’이라고 연결짓는다.

저자가 불안이라는 개념의 올바른 규정이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저자는 공황장애의 불안이 막연하기 때문에 불안이 아니라고 보는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불안의 정의다. 불안은 위험한 대상이 명시적으로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자가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글로 배우는 정신의학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공황장애는 생물학적으로도, 정신역동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정신역동학적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불안’이다. 공황장애는 흔히 신경증적인 차원의 사람들에게서 발생한다. 말하자면 남근을 받아들이고, 상징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생긴다는 뜻이다. 어린 아동이 공황장애 생긴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물론 가끔 본인 자녀가 공황장애라고 오인하고 데리고 오는 경우는 있다) 그런데 저자의 의견에 따르자면, 공황장애도 과잉주체가 겪는 증상이기 때문에, 이는 결국 클라인적 유아적 주체, 즉 경계가 흐려진 주체가 겪는 증상인 것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ADHD, 경계성 성격, 나르시시즘 같은 것과 동일한 수준에 놓이게 된다. 도대체 하나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들의 잔치다. 그리고 저자 말에 따르면 “공황장애는 ADHD의 숨겨진 반쪽“이라서, ADHD의 동반질환으로 공황장애 같은 것이 많아야 할것이다. 그렇지만 도대체 어떤 임상 현장에서, 어떤 교과서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지 묻고 싶다.

게다가 저자는 공황증상에서의 호흡곤란, 붕 뜨는 감각 등을 그 문자적 뉘앙스가 유사하다는 이유로 ‘공허함’이라는 개념과 연관짓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뭔진 뭘라도 ‘붕 뜬다’는 건 뭔가 공허하다는 것 같으니까 그것이 경계성 성격이나 자기애성 성격에서의 공허함이나 대동소이하지 않겠냐 뭐 이런 말인데... 하아... 이쯤 되면 도저히 구제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6. ADHD는 과잉주체의 병이다?

“오늘날 ADHD는 병리학적 원인을 가져야만 하는 특정 질환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상태나 패턴이 되었다”, “오늘날 ADHD는 전염병이다” 이런 말로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간단하다. 현대의 과잉에 둘러싸인 주체는,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과잉된 자극들에 노출되다보니 ADHD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현대적 주체가 과잉 자극에 노출된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 도데체 거기에 상관도 없는 ADHD는 왜 끌어들이나. 저자의 주장은 이렇다.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말에 그렇게 자신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ADHD는 특정 자극에 집중을 못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만 군데에 죄다 주의를 기울여서” 생기는 거란다. 그러니까 각성이 과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ADHD를 ‘일 중독’에도 비유한다. 일 중독이 되는 사람은 ADHD나 다름 없는 것이란다. 도대체 하나도 맞지도 않는 이 말에 몇 가지 비판을 제기해보겠다.

첫째는 일중독과 ADHD의 유사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저자는 ‘일중독’에 빠진 사람들도, 어쨌든 노동이 ‘과잉’됐으니까 똑같이 과잉주체의 문제에 빠진 것이 아니냐고 본다. 뭐 구구절절 다른 설명들도 늘어놓기도 한다. “순간을 권장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 같은 시간 분절 없이 무한정한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무한한 노동을 행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게 마치 순간적 자극들에만 충동적으로 노출되는 ADHD 환자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간단하게만 생각해봐도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ADHD 환자가 일 중독이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오히려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병원에 온다. 일 중독이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하니까 병원에 오고, ADHD 진단을 받는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과로사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너무 하나의 일에만 집중해서 그런 문제를 겪는 것이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사는 사람들이다. 사회에서 낙오되면 안 되니까, 경제적으로 한국 평군은 되어야 하니까, 노후를 대비할 수 있어야 하니까, 자녀에게 물려줄 조그만 재산 정도는 남겨두어야 하니까, 오히려 ‘순간’인 현재를 내버려두고 계속 행복을 미래로 미루어가면서 그런 부채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삶은 자극에 집중하지 못하는 ADHD의 삶과 확연히 다르다.

둘째는 ADHD의 병인과 관련해 저자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나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ADHD가 과도한 각성 때문에 생긴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불면도 생긴다는 희한한 논리를 펼친다. 그런데 우리는 ADHD를 치료하기 위해서 각성제를 쓴다. 그래서 의대생들은 처음에 수업을 들을 때 이 논리적 모순 때문에 곤혹을 치른다. 겉으로 보기에 각성되어 보이는 아이들에게 안정제가 아닌 각성제를 쓴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의 각성과 신체의 각성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교과서나 임상의학자들은, 흔히 ADHD의 병태생리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든다. 머리가 각성되어 있지 않다보니, 필요한 각성의 정도를 끌어들이기 위해 몸이 과다하게 보상적으로 각성해서 과다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ADHD는 무조건 과잉되고 각성된 것으로 퉁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각성이 떨어짐으로 인해서 보상적으로 과다한 각성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성제를 주면 오히려 전체적인 각성의 정도가 떨어지는 희한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셋째는 ADHD가 가진 생물학적 차원을 지나치게 무시한다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대부분 환자들을 볼 때, 특정한 증상이 생물학적인 지분을 크게 갖는지 혹은 심리학적인 지분을 크게 갖는지 구분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야 치료 방식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지분이 큰 질환들은 유전성이 높고, 약물 치료나 행동 치료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 상담하고, 말 들어주고, 통찰을 증진시켜주는 것으로는 치료가 안 되니까, 약물 같은 물질이나, 행동 요법 같은 것으로 실제 물리적인 신체를 구조화하는 치료를 쓴다는 뜻이다. 그런데 저자는 희한하게도 ADHD에서 행동치료를 한다는 것이 곧 그것이 사회적 질병이라는 것을 뜻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런데 ADHD는 전체 정신질환 중에서도 유전성이 꽤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나 형제가 ADHD를 갖고 있으면 최대 8배까지도 더 많이 발생하며, 입양된 아이들이 ADHD로 진단될 때는 그 생물학적 부모가 똑같이 ADHD로 진단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ADHD로 온 아이의 부모가 똑같이 ADHD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라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ADHD는 어떤 특별한 질병이 아니라 증상에 따라 나타나는 증후군적 진단이기 때문에, 지적장애, 발달장애, 학습장애, 심지어 유전병을 가진 아동들에게서 상당히 많이 병발하는 특성을 보인다. 게다가 남자 아이들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 건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저자는 이런 맥락들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쏙 빼놓은 채 자기 입맛에 맞게 개념을 갖다 쓰고 있다.
저자가 진정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저 “현대인은 ADHD다!”라고 하나마나한 주장을 할 일이 아니라, 그 근거를 탐색했어야 한다. 말하자면 도대체 왜 요즘 사회에서는 ADHD라는 사태에 그리들 관심이 많은가? 이 부분을 더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것을 탐구하는 상황에서 ‘일중독’과 ‘ADHD라는 증후군’이라는 사태의 관계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현대 사회가 일중독을 권고하기 때문에, 오히려 ADHD라는 것이 더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떠오르는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도대체 이런 기초적인 분석마저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철학을 합네라고 이야기하는 저자의 노력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결론

저자의 노력을 나름 변호해보려는 의견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전문 정신의학자는 아니니, 전문적인 지식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전문적인 지식이 부재한다는 것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념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인상비평적으로 근거도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는 점을 비판하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현대 사회의 병리와 관련해서 제대로 된 논의는 하나도 살펴보지 않으면서, 고작 클라인이나 프로이트 혹은 비온이나 위니캇 (게다가 이런 사람들의 개념들을 인용한 방식도 하나도 맥락에 맞지가 않는다) 같은 오래된 학자들의 문구 몇 개만 입맛에 맞게 끼워넣으면서, 거기에 DSM의 진단 기준 따위나 덧붙여서 뭘 설명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최소한 현대의 병리와 관련해 요즘 학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참조 정도는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자신의 의견이 그것들과 어떤 부분에서 상응하고 어떤 부분에서 다른지 크게 위치 정도는 지어줘야 제대로 된 논의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이건 뭐 읽으면 읽을수록 그냥 독서 동호회에서 자기가 읽은 철학책을 개인적으로 해석한 것 정도로만 느껴질 뿐이다.

게다가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대중을 상대로 뭔가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하려는 목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여기 저기 감상평들을 쓰고 있는 독자들을 보고 있다보니 속이 너무 답답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결국 그런 정보를 가지고 와서는 ‘유명한 저자가 이런 말을 했던데’라면서 의사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 본인과 보호자들에게 돌아간다. 그 책임은 도대체 누가 질 건가? 왜 똥은 부주의한 나르시시스트 작가가 싸고, 결국 애궂게 환자들 돌보는 의사가 치워야 하는가?

정신의학적 개념들, 임상 증후군들이 매력적인 주제라는 것 나도 안다. 그런 개념을 이용하는 게 대중에게 잘 먹히고, 호소력도 많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개념 응용이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야기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것 자체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들뢰즈도 여기저기에 분열증 어쩌구 하고 떠들지 않았나. 그러나 들뢰즈 ‘빠’라고 볼 수 있는 나조차도 들뢰즈의 그런 태도에 대해서는 좀 의구심이 든다. 수많은 독서 모임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분열증적 사고는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심히 충격을 먹었던 적이 있다. 도대체 분열증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소리인가? 그 분열증 때문에 자살을 할 정도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본 적이나 있는 건가? 분열증이라는 주제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그 것을 겪는 사람의 고통이지, 그것의 개념적 유용성 (가령 이접적 종합에서 ‘나는 남자이고 여자이다’가 ‘남자이면서도 여자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유방식) 이 아니다. 물론 그런 건 개념을 오독하는 독자 잘못이지 저자인 들뢰즈 잘못은 아니지 않냐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본인이 대중을 상대로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본인이 구가하는 개념이 사람들을 어떻게 현혹시킬 수 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고려하고 글을 써야 한다. 그 정도 기본 양심은 갖춰야 하는 것 아니겠나.

게다가 설사 철학적 논의를 위해서 개념을 이용한다고 해도, 제발 저자처럼 안일한 방식으로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저자가 개념을 사용하는 방식은 가령 이런 것이다. 엇? 사회 현상을 관찰해보니 사람들이 자극에 ‘과잉’ 노출됨으로써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보이네? 그런데 최근에 유행하는 정신질환들 목록을 보다보니 ‘ADHD’가 ‘과잉(과다행동)’ 혹은 ‘집중 부재’라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잖아? 아! ADHD라는 질환과 요즘 사회 현상이 비슷한 데가 있구나! 그러니까 이것을 ADHD로 규정해서 설명해보자!

제발. 부탁인데 제발 이런 안일한 태도로 철학을 하지는 말자. 본인이 진정 학자라면, 최소한 이렇게 개념을 갖고 장난질하는 행동은 안 했으면 좋겠다. 게다가 그게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환자들을 만들어내는 ‘질환’이라면, 더더욱 그 개념을 이용하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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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최근 주변 친구들, 지인들, 심지어 환자들 중에서도 이 책 (혹은 이 책에서 발췌된 문구들과 연관된) 을 언급하는 경우들이 많아서 한 번 훑어볼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어떤 오랜 친구는 “김곡이 ~~라 하던데, 설마 나도 ADHD인 거 아니야?”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며칠 전 어떤 환자분은 내게 찾아와 “어디서 글을 보니 제가 조울증인 것 같던데요?”라고 묻기도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한 친구가 이 책의 타당성과 관련해 나의 의견을 구해왔다. 그래서 이왕 정리해보는 김에 글로 써보기로 했다. 책을 펼치고 4장까지는 어떻게 참고 읽어봤는데, 그 이후로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어서... 그만 덮어버리고 말았다.

최소한 서론~4장에 이르기까지 (5장부터는 도대체 얼마나 더 풍부한 논의가 진행되는지는 알 수 없는 바이지만)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면 이런 것이다 : 과거의 주체들은 따라야 할 기준, 지켜야 할 기준점이나 경계선들이 있었으나,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경우 사회의 요구에 의해) 경계가 흐려지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런 경계의 소거 때문에 현대적 주체들은 과잉된 것들을 추구하게 된다. 이것이 현대의 병리고, 그것이 ADHD, 공황장애, 우울증 등등의 정신병리를 야기한다!

사실 근대 이후 기준이나 한계가 사라졌다는 건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 남근이고 상징이며, 시쳇말로 절대주의적인 윤리나 규범 혹은 ‘으르신 말씀’이라면, 현대 사회에서 그런 것이 부재하고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현대에서는 고전적 히스테리나 강박증이 사라지고 있다고 이야기한 저자의 지적(이런 지적은 이미 해묵은 이야기여서 사실 새로울 것은 없지만)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다. 게다가 저자가 ‘현대인들은 과잉에 노출되어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건 너무 당연하게도 맞는 말이고, 우리 모두 그게 뭘 의미하는지 직감적으로 안다.

내가 다만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은, 저자가 본인의 저서를 철학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정작 철학이 할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심각한 지적 태만을 보이고 있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 부분을 보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측면에서 지적 태만이 관찰된다는 것일까? 몇 가지로 크게 정리해서 일별해보고자 한다.

1. ‘과잉’이라는 개념의 애매모호함.

저자가 ‘과잉’이라는 말로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저 무언가 양적으로 많은 느낌을 주면 ‘과잉’인 것인가? 그는 현대의 노동자가 과로를 할 때 일을 ‘많이’ 해서, 나르시시즘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충동구매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품들’을 구매한다고 해서, 폭식증 환자가 ‘많이’ 먹는다고 해서, 이것들이 모두 ‘과잉’의 문제라고 퉁쳐버린다.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그렇다면 근대적인 히스테리의 구조에서는, 도덕의 억압과 상징적 대타자들의 압력이 지나치게 많으니까 그것도 ‘과잉’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저자는 ‘많다’, ‘뭐든지’ 같은 술어가 양적 과잉을 지시한다는 면에서 곧바로 그것들이 ‘과잉’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결론내버린다. 그러나 뒤에서 다루겠지만, 표면상 과잉의 문제로 드러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동일한 문제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저자가 이야기하는 ‘과잉’은 특수한 종류의 과잉, 즉 테크놀러지적인 현대 시대에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범람하는 이미지들, 혹은 시뮬라크르 같은 것을 의미하는 그런 과잉만을 이야기하는 거라구욧!”라고 변호하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좋다. 거기까지만 이야기하는 거라면 뭐 뻔한 이야기고,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다. 문제는 저자가 그 단어에 꽂혀서 과잉이라는 술어를 매개하는 온갖 질병(ADHD, 우울증, 나르시시즘, 편집증, 정신증...)들을 다 자기가 설명하고자 하는 사태 속에 때려박는다는 것이다.

2. ‘과잉’의 필연성

저자는 현대인들에게 기준점이나 한계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갑자기 ‘그러므로 현대인이 과잉을 맞딱뜨린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기준이나 한계의 부재가 무조건 과잉으로 이어지는가? 여기에는 알게 모르게 저자의 개인적인 (근거 없는) 주장이 끼어들어간다. 어째서 ‘A의 부재’가 ‘과잉’으로 귀결되는가? 저자는 어떻게든 말이 되어보게 만들어보려고 멜라니 클라인까지 동원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현대인에게는 하나의 기준 (하나의 남근) 이 없으니까, 마치 하나의 남근 아래로 모든 것들이 질서잡히는 성인과 대비되는 유아의 수준에서처럼, 세계는 하나의 질서로 묶이지 않고 무분별한 부분대상적인 투사물들로만 점철되어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클라인은 부분대상 개념을 (부분 대상은 아직 대상이 되지 않은 파편들을 의미함) ‘과잉’이라는 개념과 연결지은 적이 없다.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다. 다만 대상으로의 통합이 부재한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대상의 통합 이전에 ‘무’가 있는지, ‘과잉’이 있는지(그리고 심지어 저자는 그 ‘과잉’이라는 게 ‘전체의 부분’들의 과잉인 건지, ‘전체가 전제되지 않은 미분적인 것들의 과잉’인지도 구별하지 않는다) 의 문제 자체가 바로 철학적 탐구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데, 저자는 이런 부분은 그냥 얼렁 뚱땅 넘어가버린다.

3. 경계의 부재는 원인인가 결과인가?

저자는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기준(경계)의 부재가 과잉을 동반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 고정된 규범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혹은 무엇이 리얼한 것이고 무엇이 시뮬라크르적인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그렇다면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이것 저것 구분 없이 무한정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것이 과잉에 대한 추구를 낳는다는 것이다. 저자가 하도 논리 없이 이야기해서 이 부분이 좀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는데, 사실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가령 프랑스 계통의 정신분석학에서는 도착증 구조를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 상징(남근)의 도입이 불완전하게 일어나니까, 그걸 보상하려고 자신을 처벌하는 심급(agent)를 인위적으로 무한정 도입시킨다는 것이다. 자신을 적절히 처벌하고 적절한 죄의식을 전해줄 초자아가 부재하니까, 억지로 초자아를 만들려다보니 여기저기서 처벌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기준의 부재가 과잉을 야기한다는 논리가 말이 된다.
그런데 또 어떤 부분에서 저자는 과잉주체가 그 스스로 기준들을 와해시킨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과잉 주체는 “자아의 경계를 허물려는 인간”이고, “경계가 싫기 때문”에 경계를 허물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기준의 존재와 과잉 사이의 인과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기본적인 논의조차 제대로 규정하지 않는 책이 철학 저서라고 버젓이 나와 있는 게 우스꽝스러울 따름이다.

4. 개념의 무한정한 혼용

저자가 과잉 주체를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본인이 개념의 과잉 속에서 길을 헤매는 느낌이다. 도대체 정신의학이나 정신분석학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은 있는 상태에서 글을 쓴 건지도 모르겠다. 지적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몇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첫째는 저자가 나르시시즘의 문제와 경계성 장애, 편집증, 심지어 정신증까지도 동일한 수준에서 다루어버린다는 것이다. “모든 과잉주체는 나르시시스트다. 편집증자이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방귀같은 소리인가?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나도 알겠다. 중심적 남근이 부재하니까, 마치 클라인적 유아의 정신구조처럼, 현대인들은 세계를 온갖 부분대상적 투사물들로 과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투사한다는 면에서 편집증적이라는 것이고, 대상이 없다는 면에서 나르시시즘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순전히 말장난이다. 어디 가서 나르시시즘이나 정신증이나 둘 다 대상이 없는 거니까 똑같은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면 정말 바보 소리 듣는다. 정신증은 정신 내적인 것들이 온전히 투사물들로서의 현실을 구성하는 상태를 말한다. 쉽게 말해 깨어 있으면서도 꿈 꾸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조현병 환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꿈에서 경험할 만한 일들 (ex. 국정원 직원이 나를 감시하고 있다, 나더러 죽으라는 말을 누군가 계속 한다) 을 현실 속에서 경험한다. 현실적 대상이 없는데도 마치 현실적 대상이 자신에게 말을 하듯이 환청을 들으니 당연히 ‘대상이 부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에서 대상이 부재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건 현실적 대상과 꿈 속 대상을 구별 못 해서 환각이나 망상에 시달리는 사태가 아니라, 타자를 독립된 인격으로 간주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확장체처럼 여기는 사태다. 존중받는 독립적 타인이 계속 부정되기 때문에 진정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 꽂혀서 나르시시즘이나 편집증이 비슷하다고 이야기한다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둘째로 저자는 “양극성”이라는 개념을 여기 저기 아무데나 갖다 붙인다. 도대체 그는 “양극성”이라는 개념으로 무엇을 규정하고 싶은 것일까? 저자는 때로는 “분열과 해리”를, 때로는 감정이 두 극단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거짓 자아와 참 자아가 분열되는 것을, 대상이 이상화와 평가절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양극성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용법을 끌어들인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저자가 참 친절하게도 Bipolar라고 영문까지 기재해주고 있는 양극성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흔히 조증과 우울증이라고 부르는 감정적 상태를 지칭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양극성의 개념을 경계성 성격(분열, 해리, 이상화와 평가절하)을 설명할 때도 갖다 쓰고, 나르시시즘(False self와 true self의 분열)을 설명할 때도 갖다 쓴다. 심지어 사랑과 섹스가 인스턴트 식으로 바뀐 현대인을 보고는 “원나잇 섹스와 대인기피증이라는 양극단만을 진동하는 양극성 장애 환자”라고 부른다.

이런 개념의 오용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현대인이 겪는 다양한 문제들 (경계성 성격, 나르시시즘, 양극성 장애) 은 서로 각각 다른 원인들과 맥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과잉에 둘러싸여 공허감을 느낀다고 하면서, 그런 ‘공허감’을 양극성 상태라는 하나의 상태로 퉁쳐서 설명하려고 한다. (심지어 저자는 공황장애 환자들도 공허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공허감이라는 것은 경계성 혹은 수줍은 형태의 자기애성 성격에서 나타나는 감정적 상태를 지칭한다. 경계성 성격에서는 자기 정체성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공허감이 나타나고, 그래서 그들은 자기 신체의 경계를 확고히 하려고 자해를 하기도 한다. 폭식 문제도 이런 공허감을 채우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수줍은 형태의 자기애성 성격에서는 거짓 자기(false self)가 발달하다보니 진짜 자기 자신이 뭔지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항상 완벽하고 우월한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뒤편에서는 계속해서 공허감을 느끼게 돼 있다. 양극성 장애 환자들은 조증 삽화 이후 우울 삽화를 경험하곤 하는데, 이 우울삽화는 일반적 우울삽화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것을 굳이 ‘공허함’이라고 따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공황장애의 경우 뒤에서 따로 설명을 하겠다.

게다가 저자는 참 친절하게도 DSM 진단체계까지도 레퍼런스로 달아가면서, 양극성 장애 환자를 진단하는 진단 기준 중 하나가 “과도한 사업투자”라고 하면서, 그것이 ‘과도’하니까 ‘과잉’아니겠냐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저자 말을 따르자면, 조증 같은 것도 결국 과잉 주체가 겪는 질환이고, 결국 미디어와 매체의 범람이 만들어낸 현대적 질환이라는 건데, 도대체 맞는 말이 하나도 없다. 일단 조증(mania)이라고 이야기하는 상태가 이미 19세기에 규정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게다가 저자는 조증이라는 걸 현실에서 한 번이라도 봤는지 의문이다. 조증은 그냥 기분이 좋고 들떠서 이것저것 사들이는 어떤 감정상태가 아니다. 그건 일반적인 사람들이 느끼는 붕 뜬 그런 느낌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조증은 우울증 같은 정동 장애랑 유사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과 의사들은 조현병과 양극성 장애를 감별하는 것을 가장 어려워한다. 그만큼 심각한 질환이고, 생물학적 원인이 큰 병이다. 그래서 정동장애 중에서는 유전성도 높고, 심리학적 원인이 없이도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약물치료가 상당히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보고 “과잉 사회가 만들어낸 주체다”라고 한다고? 거참... 어떻게 변호를 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증상이 풀로 나타난 상태로 병원에 오는 양극성 장애 환자들은 조현병과 잘 구별도 되지 않아서, 대부분 일상 생활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한다. 컴퓨터고 SNS고 나발이고 그런 거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조증을 겪으면서 병원에 온다는 뜻이다.

5. 공황장애는 불안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공황장애 환자는 불안이 너무 커서 방향감각을 잃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불안의 대상을 특정할 수 없어서 방향을 상실한다” 이건 도대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러니까 저자 말은 이런 거다. 대부분 공황장애가 무슨 공포증 처럼 특정한 대상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본인 생각에는 그런 게 아니라 경계 없이 모호한 무엇, 혹은 경계가 없어지는 것 자체에 의한 불안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것을 또 ‘과잉’이라고 연결짓는다.

저자가 불안이라는 개념의 올바른 규정이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저자는 공황장애의 불안이 막연하기 때문에 불안이 아니라고 보는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불안의 정의다. 불안은 위험한 대상이 명시적으로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자가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글로 배우는 정신의학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공황장애는 생물학적으로도, 정신역동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정신역동학적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불안’이다. 공황장애는 흔히 신경증적인 차원의 사람들에게서 발생한다. 말하자면 남근을 받아들이고, 상징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생긴다는 뜻이다. 어린 아동이 공황장애 생긴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물론 가끔 본인 자녀가 공황장애라고 오인하고 데리고 오는 경우는 있다) 그런데 저자의 의견에 따르자면, 공황장애도 과잉주체가 겪는 증상이기 때문에, 이는 결국 클라인적 유아적 주체, 즉 경계가 흐려진 주체가 겪는 증상인 것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ADHD, 경계성 성격, 나르시시즘 같은 것과 동일한 수준에 놓이게 된다. 도대체 하나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들의 잔치다. 그리고 저자 말에 따르면 “공황장애는 ADHD의 숨겨진 반쪽“이라서, ADHD의 동반질환으로 공황장애 같은 것이 많아야 할것이다. 그렇지만 도대체 어떤 임상 현장에서, 어떤 교과서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지 묻고 싶다.

게다가 저자는 공황증상에서의 호흡곤란, 붕 뜨는 감각 등을 그 문자적 뉘앙스가 유사하다는 이유로 ‘공허함’이라는 개념과 연관짓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뭔진 뭘라도 ‘붕 뜬다’는 건 뭔가 공허하다는 것 같으니까 그것이 경계성 성격이나 자기애성 성격에서의 공허함이나 대동소이하지 않겠냐 뭐 이런 말인데... 하아... 이쯤 되면 도저히 구제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6. ADHD는 과잉주체의 병이다?

“오늘날 ADHD는 병리학적 원인을 가져야만 하는 특정 질환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상태나 패턴이 되었다”, “오늘날 ADHD는 전염병이다” 이런 말로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간단하다. 현대의 과잉에 둘러싸인 주체는,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과잉된 자극들에 노출되다보니 ADHD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현대적 주체가 과잉 자극에 노출된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 도데체 거기에 상관도 없는 ADHD는 왜 끌어들이나. 저자의 주장은 이렇다.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말에 그렇게 자신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ADHD는 특정 자극에 집중을 못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만 군데에 죄다 주의를 기울여서” 생기는 거란다. 그러니까 각성이 과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ADHD를 ‘일 중독’에도 비유한다. 일 중독이 되는 사람은 ADHD나 다름 없는 것이란다. 도대체 하나도 맞지도 않는 이 말에 몇 가지 비판을 제기해보겠다.

첫째는 일중독과 ADHD의 유사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저자는 ‘일중독’에 빠진 사람들도, 어쨌든 노동이 ‘과잉’됐으니까 똑같이 과잉주체의 문제에 빠진 것이 아니냐고 본다. 뭐 구구절절 다른 설명들도 늘어놓기도 한다. “순간을 권장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 같은 시간 분절 없이 무한정한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무한한 노동을 행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게 마치 순간적 자극들에만 충동적으로 노출되는 ADHD 환자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간단하게만 생각해봐도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ADHD 환자가 일 중독이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오히려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병원에 온다. 일 중독이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하니까 병원에 오고, ADHD 진단을 받는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과로사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너무 하나의 일에만 집중해서 그런 문제를 겪는 것이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사는 사람들이다. 사회에서 낙오되면 안 되니까, 경제적으로 한국 평군은 되어야 하니까, 노후를 대비할 수 있어야 하니까, 자녀에게 물려줄 조그만 재산 정도는 남겨두어야 하니까, 오히려 ‘순간’인 현재를 내버려두고 계속 행복을 미래로 미루어가면서 그런 부채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삶은 자극에 집중하지 못하는 ADHD의 삶과 확연히 다르다.

둘째는 ADHD의 병인과 관련해 저자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나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ADHD가 과도한 각성 때문에 생긴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불면도 생긴다는 희한한 논리를 펼친다. 그런데 우리는 ADHD를 치료하기 위해서 각성제를 쓴다. 그래서 의대생들은 처음에 수업을 들을 때 이 논리적 모순 때문에 곤혹을 치른다. 겉으로 보기에 각성되어 보이는 아이들에게 안정제가 아닌 각성제를 쓴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의 각성과 신체의 각성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교과서나 임상의학자들은, 흔히 ADHD의 병태생리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든다. 머리가 각성되어 있지 않다보니, 필요한 각성의 정도를 끌어들이기 위해 몸이 과다하게 보상적으로 각성해서 과다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ADHD는 무조건 과잉되고 각성된 것으로 퉁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각성이 떨어짐으로 인해서 보상적으로 과다한 각성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성제를 주면 오히려 전체적인 각성의 정도가 떨어지는 희한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셋째는 ADHD가 가진 생물학적 차원을 지나치게 무시한다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대부분 환자들을 볼 때, 특정한 증상이 생물학적인 지분을 크게 갖는지 혹은 심리학적인 지분을 크게 갖는지 구분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야 치료 방식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지분이 큰 질환들은 유전성이 높고, 약물 치료나 행동 치료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 상담하고, 말 들어주고, 통찰을 증진시켜주는 것으로는 치료가 안 되니까, 약물 같은 물질이나, 행동 요법 같은 것으로 실제 물리적인 신체를 구조화하는 치료를 쓴다는 뜻이다. 그런데 저자는 희한하게도 ADHD에서 행동치료를 한다는 것이 곧 그것이 사회적 질병이라는 것을 뜻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런데 ADHD는 전체 정신질환 중에서도 유전성이 꽤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나 형제가 ADHD를 갖고 있으면 최대 8배까지도 더 많이 발생하며, 입양된 아이들이 ADHD로 진단될 때는 그 생물학적 부모가 똑같이 ADHD로 진단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ADHD로 온 아이의 부모가 똑같이 ADHD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라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ADHD는 어떤 특별한 질병이 아니라 증상에 따라 나타나는 증후군적 진단이기 때문에, 지적장애, 발달장애, 학습장애, 심지어 유전병을 가진 아동들에게서 상당히 많이 병발하는 특성을 보인다. 게다가 남자 아이들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 건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저자는 이런 맥락들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쏙 빼놓은 채 자기 입맛에 맞게 개념을 갖다 쓰고 있다.
저자가 진정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저 “현대인은 ADHD다!”라고 하나마나한 주장을 할 일이 아니라, 그 근거를 탐색했어야 한다. 말하자면 도대체 왜 요즘 사회에서는 ADHD라는 사태에 그리들 관심이 많은가? 이 부분을 더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것을 탐구하는 상황에서 ‘일중독’과 ‘ADHD라는 증후군’이라는 사태의 관계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현대 사회가 일중독을 권고하기 때문에, 오히려 ADHD라는 것이 더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떠오르는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도대체 이런 기초적인 분석마저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철학을 합네라고 이야기하는 저자의 노력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결론

저자의 노력을 나름 변호해보려는 의견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전문 정신의학자는 아니니, 전문적인 지식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전문적인 지식이 부재한다는 것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념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인상비평적으로 근거도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는 점을 비판하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현대 사회의 병리와 관련해서 제대로 된 논의는 하나도 살펴보지 않으면서, 고작 클라인이나 프로이트 혹은 비온이나 위니캇 (게다가 이런 사람들의 개념들을 인용한 방식도 하나도 맥락에 맞지가 않는다) 같은 오래된 학자들의 문구 몇 개만 입맛에 맞게 끼워넣으면서, 거기에 DSM의 진단 기준 따위나 덧붙여서 뭘 설명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최소한 현대의 병리와 관련해 요즘 학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참조 정도는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자신의 의견이 그것들과 어떤 부분에서 상응하고 어떤 부분에서 다른지 크게 위치 정도는 지어줘야 제대로 된 논의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이건 뭐 읽으면 읽을수록 그냥 독서 동호회에서 자기가 읽은 철학책을 개인적으로 해석한 것 정도로만 느껴질 뿐이다.

게다가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대중을 상대로 뭔가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하려는 목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여기 저기 감상평들을 쓰고 있는 독자들을 보고 있다보니 속이 너무 답답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결국 그런 정보를 가지고 와서는 ‘유명한 저자가 이런 말을 했던데’라면서 의사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 본인과 보호자들에게 돌아간다. 그 책임은 도대체 누가 질 건가? 왜 똥은 부주의한 나르시시스트 작가가 싸고, 결국 애궂게 환자들 돌보는 의사가 치워야 하는가?

정신의학적 개념들, 임상 증후군들이 매력적인 주제라는 것 나도 안다. 그런 개념을 이용하는 게 대중에게 잘 먹히고, 호소력도 많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개념 응용이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야기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것 자체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들뢰즈도 여기저기에 분열증 어쩌구 하고 떠들지 않았나. 그러나 들뢰즈 ‘빠’라고 볼 수 있는 나조차도 들뢰즈의 그런 태도에 대해서는 좀 의구심이 든다. 수많은 독서 모임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분열증적 사고는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심히 충격을 먹었던 적이 있다. 도대체 분열증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소리인가? 그 분열증 때문에 자살을 할 정도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본 적이나 있는 건가? 분열증이라는 주제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그 것을 겪는 사람의 고통이지, 그것의 개념적 유용성 (가령 이접적 종합에서 ‘나는 남자이고 여자이다’가 ‘남자이면서도 여자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유방식) 이 아니다. 물론 그런 건 개념을 오독하는 독자 잘못이지 저자인 들뢰즈 잘못은 아니지 않냐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본인이 대중을 상대로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본인이 구가하는 개념이 사람들을 어떻게 현혹시킬 수 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고려하고 글을 써야 한다. 그 정도 기본 양심은 갖춰야 하는 것 아니겠나.

게다가 설사 철학적 논의를 위해서 개념을 이용한다고 해도, 제발 저자처럼 안일한 방식으로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저자가 개념을 사용하는 방식은 가령 이런 것이다. 엇? 사회 현상을 관찰해보니 사람들이 자극에 ‘과잉’ 노출됨으로써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보이네? 그런데 최근에 유행하는 정신질환들 목록을 보다보니 ‘ADHD’가 ‘과잉(과다행동)’ 혹은 ‘집중 부재’라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잖아? 아! ADHD라는 질환과 요즘 사회 현상이 비슷한 데가 있구나! 그러니까 이것을 ADHD로 규정해서 설명해보자!

제발. 부탁인데 제발 이런 안일한 태도로 철학을 하지는 말자. 본인이 진정 학자라면, 최소한 이렇게 개념을 갖고 장난질하는 행동은 안 했으면 좋겠다. 게다가 그게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환자들을 만들어내는 ‘질환’이라면, 더더욱 그 개념을 이용하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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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국가 강의 - 정의롭고 좋은 삶에 관한 이야기
이종환 지음 / 김영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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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좋은데 왜 이렇게 본인의 정치적 입장을 끌어들이시는지... 좀 불편하긴 하네요. 박정희 박근혜가 악마고 문재인이 천사라고 생각하시는 건 저자의 자유이고, 또 굳이 그걸 반박할 생각도 없습니다만, <국가>를 설명하기 위해 굳이 거의 챕터마다 그런 내용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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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의 연구 -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 이화학술총서
한자경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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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실체의 연구>, 한자경

 

평소에는 잘 안 보다가 시험을 준비하게 될 때마다 찾게 되는 책들이 있다. 나에게는 한자경 선생님의 책이 그렇다. 석사 입학 준비를 할 때, 특히 칸트와 관련해 답안 작성 연습을 해야 할 때 한자경 선생님의 책들을 많이 찾아봤던 것 같다.

 

이 분은 개념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설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지 않으신가 싶다. 이 분의 책을 읽다 보면 개념들을 정리하기 위해 적절한 도표와 등식들이 차용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걸 보다 보면 미국 혹은 일본 사람들이 쓴 개론서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들 특유의 어떤 자습서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자습서라고 하니까 좀 부정적인 뉘앙스로 들릴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식의 자습서적 정리는 과도한 일반화 혹은 동일시의 오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서로 다른 맥락에 있는 개념인데 억지로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등등. 그래서 이런 책을 쓸 때는, 가능한 한 그런 오류를 최소화하면서도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능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실체의 연구>가 그 중간 지점에서 잘 균형을 맞추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과도한 일반화와 동일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원전도 봐야 하고 다른 디테일한 연구서도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가끔은 이런 자습서적인 정리가 한 번씩은 꼭 필요하지 않나 싶다. 어떤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공부할 때는 큰 눈과 작은 눈이 동시에 필요하다. 가끔씩은 개념에 파고 들어가서 문장 자체를 파고들어가야 하지만, 또 가끔씩은 그 문장들 밖으로, 책 밖으로 나와서 이것들이 무슨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철학사적으로는 어떤 맥락에 속하는 것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책의 구성을 한 번 살펴보자. 책은 실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플라톤부터 들뢰즈까지 14명의 철학자들을 다룬다. 사실 실체대신 존재론이라는 말을 써도 될 것 같다. 철학자들이 실체에 대해 가졌던 관점을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철학자의 존재론적인 구도를 소개하는 기능도 하기 때문이다.

 

한 철학자 당 적게는 20페이지에서 30페이지까지 배당돼있는데, 결코 긴 분량이라고 볼 수 없다. 전체 페이지수는 참고문헌 목록까지 450페이지 정도 되는데,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떻게 500페이지도 안 되는 공간에 14명의 철학자들의 존재론을 담을 수 있나? 사실 말이 안 되는 건데, 한자경 선생님은 그걸 나름의 방식으로 해내고 있다!

 

그 나름의 방식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살펴보기 위해 한 챕터만 예를 들어보자. <칸트> 챕터 같은 경우 워낙 저자분의 주전공분야이기도 하고 하니까 일단 제외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저자의 주 전공은 아니면서, 아직은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지 않은 현대 철학자를 예로 드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래 그럼 <들뢰즈> 파트를 살펴보도록 하자.

 

시중에는 들뢰즈 연구서들이 상당히 많다. 국내 연구자들이 내놓은 것들도 많고, 영미 계통 연구자들이 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들도 상당히 많다. 근데 그런 책들을 읽다보면 양이 너무 많아서일까, 정작 중요한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대충 들뢰즈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개념들의 위계가 어떻고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와 관련해 상당한 혼돈이 뒤따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국내에 들뢰즈가 수용된 맥락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듣기로 들뢰즈는 (라깡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정통 형이상학의 맥락에서라기보다는 그것의 외부 맥락에서 수용된 측면이 많단다. 그러다보니 아마도 그를 정신분석학에 반대한 사람, 유목적 리좀을 주창한 사람, 기계 개념을 이야기한 사람 등등으로 수용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그의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에 대한 분석이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 덜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추정도 해본다. 그래서인지 나는 들뢰즈와 관련해 영화, 문학, 정신분석, 심지어 과학이나 수학과 관련된 문헌은 상당히 많이 봤음에도 들뢰즈와 칸트, 고대철학, 근대철학의 관계를 다룬 문헌은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다.

 

사람들의 취향 문제인 탓도 좀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차이와 반복> 이후 들뢰즈가 과타리를 만나면서부터 그의 철학이 제대로 꽃피웠다고 본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과타리가 들뢰즈를 망쳐놨다고 말한다. 나는 망쳐놨다는 말이 너무 심한 건 아닌가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후자의 입장 쪽을 많이 따르는 편이다.

 

나는 <시네마>, <안티 오이디푸스>, 심지어 마조히즘에 대한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개념적 이해를 위해서 자꾸만 <차이와 반복>으로 돌아오게 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들뢰즈의 모든 개념적 뿌리가 <차이와 반복>에 가장 잘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체의 연구>는 이 <차이와 반복>을 주 레퍼런스로 삼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쓸데없는 이야기는 다 걷어내고 철학사적 맥락에서의 존재론과 개념에 대한 부분만 다루게 된다. 가령 저자는 그냥 평범하게 들뢰즈는 생성의 철학자요, 차이의 철학자입니다!’를 반복해서 주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념’, ‘강도’, ‘차이소’, ‘주름’, ‘시간’, ‘잠재성’, ‘역량’, ‘일의성같은 개념들을 소개하는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특히 라이프니츠와 칸트를 연결시켜 개념을 정리하는 부분은 정말 일품이다. (물론 이런 설명들은 이미 들뢰즈 본인의 책에도 다 나와 있다. 중요한 것은 저자분이 이것들 중 딱 포인트가 될 만한 것들만을 선별해서 짧은 지면에 효과적으로 배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론서들 중에는 가끔 강도를 이야기하면서 칸트의 맥락을 완전히 누락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혹은 그것은 내공이기에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한다고 하거나) 그 맥락이 없고서는 왜 그런 개념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저자는 칸트의 분석론에서 잠시 언급되고 지나간 내포량 개념이 어떻게 강도 개념의 탄생을 이야기했는지 기술한다.

 

차이소혹은 미분적인 것’, 그리고 미세지각을 라이프니츠와의 연관 하에 다루는 부분도 깔끔하다. 들뢰즈가 말하는 dx는 라이프니츠의 미분적인 것, 혹은 모나드와 관련해 어떤 부분에서 비슷하고 어떤 부분에서 다른가? 독자들이 원하는 궁금증은 이런 것인데, 저자는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해주려 노력한다. 들뢰즈가 좋아했던 파도소리의 비유를 제시하면서 그 비유 하나로 강도’, ‘무의식’, ‘미세지각’, ‘수동적 종합’, 나아가 명석-혼잡판명-애매의 개념을 명확히 설명하는 부분은 정말 일품이다. 이 모든 개념의 설명이 단 두 세 페이지 안에서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한편으로 저자분은 가려운 부분을 파악하는 능력도 상당하지 않으신가 추정된다. 가령 나는 이념개념을 항상 이해하기 어려워했고, 특히 그것의 세 가지 측면 (미규정성, 규정가능성, 규정성)을 어려워해서 항상 그 부분은 그냥 대충 넘어갔던 적이 많았다. 또한 다양한 주름 개념 (막주름, 안주름, 밖주름) 들을 정확히 다른 개념들에 대응시키지 못해서 혼동을 경험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한자경 선생님이 딱 그 부분들을 단 몇 페이지만을 할애해 설명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쓸데 없는 것 다 말고 딱 그 설명만 필요했었는데 말이다.

 

종종 나 자신이 이미 철학사에 어느 정도 통달했고, 해당 철학자에 대해 내공이 쌓였기 때문에 더 이상 개론서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제 그런 기본 개념들에 대해 명석(clear)하고도 판명(distinct)한 지식을 갖추고 있기에, AB가 무엇인지도, AB가 어떻게 다른지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설사 어떤 것을 명석하게 안다고, 그래서 그것에 대한 전체 그림은 명확히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그 안의 세부개념들이 어떻게 서로 distinct하게 나뉘는지는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있다. 반면 세부적인 사항들의 구별에는 통달하고 있지만 그것의 전체 개념에 대해서는 명석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들뢰즈의 말마따나 명석한 것은 그 자체로 혼잡하고, 판명한 것은 그 자체로 애매하다. 그래서 때로는 주름을 펼쳐야 할때도, 주름을 다시 접어 넣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나는 한자경 선생님의 <실체의 연구>가 그런 주름 운동을 도와주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총평을 내려본다. 개론서의 성격이 강하다보니 디테일한 측면에서는 다소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숲과 나무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일품이다. 또한 설사 본인 내공이 상당해 지식적인 것을 얻을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어떻게 필요한 말만 하면서 짧은 지면에서 효과적으로 철학적 개념을 소개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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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괴지대
이토 준지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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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환괴지대>, 그 과잉과 반복의 공포

 

이토 준지의 만화에는 그것만의 매력이랄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이 어떤 가속(acceleration)과 과잉의 요소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만화의 상당수는 이런 요소들에서 나오는 공포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가속과 과잉이 나타나는 방식의 한 예를 들면 이렇다 - 소용돌이와 유사한 문양을 쳐다보게 된 한 사람이 계속해서 그와 유사한 상징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 상징은 점차 명확해지고, 강렬해지며, 더 큰 양과 질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간다. 결국 그것은 상징을 넘쳐날만큼 과잉에 이르러 인간은 그것에 의해 잠식되고 만다...

 

이런 요소가 독특한 점은, 그것이 (가령 과거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봉천역 귀신> 처럼) 갑자기 깜짝 놀라게 하는 ‘jump scare’의 요소라든지 (러브크패프트 식의) 불가해한 미지의 실체라든지, 혹은 미국식 공포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살인마나 괴수를 주된 요소로 등장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토 준지의 작품이 기존 공포물의 서사구조와 갖는 공통점도 있다. 어떤 불가해한존재를 등장시키되, 그것을 일상적 요소 안에서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많은 공포물들은 이렇게 일상적인 것이 비일상적이고 불가해한 것으로 전환되는 곳에서 공포를 유발한다. 그 중에서도 서양 공포물에서 클리셰로 자주 반복되는 스토리는 가령 이런 것이다 : 가족들이 단란하게 살던 저택이 점차 귀신들린 장소로 변해가고, 그 안의 구성원들이 점차 미쳐간다... (<엑소시스트>, <아미티빌의 호러>, <폴터가이스트> 등등)

 

그렇지만 이토 준지가 일상적 요소 안에서 불가해한 차원을 끌어들이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먼저 그는 일상의 사소하고 무의미한 요소가 평소보다 살짝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이런 점을 눈치채고, 거기에서 불안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주인공의 눈에는 그 살짝다르게만 느껴졌던 것이 점차 증폭되면서 과잉된 양으로 지각되기 시작하고, 그것은 결국 주인공과 주변 사람들의 정신을 파멸로 이끌게 된다...

 

<환괴지대>에 묘사된 이야기들에서도 그런 구성방식이 나타난다. <곡녀 고개> 편에서 주인공 남녀 커플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좀 과하게우는 곡녀 (상가집에서 대신 울어주는 여자) 를 보게 된다.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여주인공이 슬픈 드라마를 보거나, 감정적 동요를 느끼면 평소보다 좀 과하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눈물의 양은 점차 많아지고, 더 빈도도 잦아지는데, 그에 따라 남주인공의 불안도 점차 심해져간다.

 

결국 이 커플은 자신들이 전에 보았던 곡녀에 의해 뭔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를 따라 이승이 아닌 다른 차원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주인공을 그렇게 계속 울게 만들었던 원흉을, 어떤 영혼을 만나게 된다. 그 원흉은 가장 위대한 곡녀로 추앙받는 한 여성의 혼인데, 그 혼은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온 몸의 수분이 빠져나가 몸이 거의 시체처럼 변해버린 상황이다. 이 여성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주인공을 자신들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지만 이들은 그곳을 도망나오게 되고, 결국 위대한 곡녀의 혼은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자신의 과잉된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온 몸이 산산이 분해되고 만다...

 

<아오키가하라의 영류>에서도 비슷한 테마가 발견된다. 지병을 앓고 있는 남자는 여자친구와 함께 산으로 캠핑을 갔다가 우연히 어떤 동굴 속에서 들려오는 (우오오오~~ 하는) 괴음을 듣는다. 남자는 그 소리의 근원을 파악하고 싶어하지만, 여자는 두려움에 먼저 하산한다. 남자친구가 돌아오지 않자 여자는 걱정이 돼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데, 거기에서 신체가 다소 변형된, 그러나 평소보다 훨씬 건강해보이는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남자친구가 말하길, 동굴에서 밤마다 영류靈流(영혼의 물줄기)가 흘러나왔는데 거기에 몸을 맡겨보았는데 몸이 아주 개운해지고, 심지어 앓던 병마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매일매일, 점점 더 많이, 더 자주 영류에 몸을 씻는 행위를 하고, 그럴수록 그의 몸도 점차 변형되어간다. 그는 여자친구에게도 그것을 권하지만 그녀는 뭔지 모를 불쾌감에 제안을 거절한다. 대신 남자친구를 계속 관찰해보기로 한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겁쟁이라고 욕하며 그녀를 수치스럽게 만드는데, 여자친구는 모욕감을 참지 못해 영류의 중심부 즉 동굴의 중심부로 몸을 던져넣고 만다. 남자는 크게 놀라 여자를 찾아가는데, 거기에서 자신보다 더 과잉되고 더 집적된 양으로 영을 흡수시킨 (이미 심각하게 변형되어버린) 여자친구의 영을 마주하게 된다...

 

다시 정리하자면 이토 준지는 분명 일상적 요소 속의 불가해한 것을 다룬다는 면에서 다른 공포물들과 공통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러나 그는 상징이나 기호를 갑자기 등장시켜 놀라게 만들거나 (jump scare), 기호 너머 기호화되지 않는 존재를 등장시키거나 (불가해한 존재자에 대한 공포), 혹은 친숙한 기호가 괴상한 기호 (괴물, 귀신들린 사람)로 변질되는 과정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사소하고 보편적인 기호가 하나, 둘 반복되고 그러한 반복 속에서 점차 그 스스로 힘을 얻어 결국은 스스로 증폭과 과잉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세계를 잠식하게 만든다. 기호는 지나치게 과잉되고, 결국 기호의 과잉이 그 자체로 기호화되지 않는 불가해한 실재를 만든다. 기호들 사이로 실재가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의 증폭과 과잉이 실재를 마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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