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계의 비판과 탈비판 논쟁에 대해서는 각주 하나로 간단히 언급하고 말지만, 건축계의 논쟁보다 더 일반적이고 사상적인 차원에서 탈비판적 논리의 핵심을 파고드는 글이다. - P183

‘아름다움의 찬미‘는 비판을 소거하는 구실로 곧잘 작동하는 유미주의 - P183

‘정동의 긍정‘은 비판적 이성의 대안처럼 제시되곤 하는 후기구조주의 - P183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는 정치적 비판성을 미학적 감각의 문제로 재설정하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 P183

‘일반 지성 general intellect에 대한 신뢰‘는 마르크스가 기계류에 붙인이름인 ‘일반 지성’ - P183

무엇보다도 포스터가 가장 초점을 맞추는 것은 ‘비판에 대한 비판자’로서 가장 예리한 논리를 보여주는 브뤼노 라투르와 자크 랑시에르인데, 반페티시즘도 페티시즘이라고 비판하는 그들의 메타비판조차도 페티시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을 지적한다. - P183

비판과 탈비판을 다루는 이 글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주제는 ‘페티시즘’과 ‘반페티시즘’이다. - P184

페티시즘은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이 만든 상상적 물신에 대한 미신이고, 여기서 물신적 대상은 유사-주체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주체와 대상의 위상을 전도시킨다. - P184

그런 부정적 모순의 실재를 드러내는 게 반페티시즘적 비판이라면, 그런 비판을 부정하는 탈비판이나 메타비판은 모순을 봉합하려는 페티시즘일 수밖에 없다. - P184

라투르와 랑시에르의 메타비판이 비평가를 페티시스트로 비판할 때, 메타비평가인그들 역시 페티시스트가 되는 모순에 빠진다. 그렇게 자기모순에 빠진두 철학자의 페티시즘을 지적하는 게 이 글에서 가장 어렵지만 흥미로운 부분일 것이다. - P184

페티시즘이 주체와 대상의 위상을 뒤집어 거리를 만드는 도착적인 ‘신비감 만들기‘ - P184

라면, 반페티시즘이 추구하는 ‘신비감 깨기‘는 주체와 대상 간의 거리를 허물어 아우라의 해체를 시도 - P184

하지만 이런 ‘거리의 소멸‘이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진리처럼 신비화될수록 또 하나의 페티시가 되어 반페티시스트를 모순에 빠뜨리게 된다. - P184

비판은 모순이 감지될 때 작동하고, 모순은 합리성이 실패하는 지점인 논리적 ‘간극’에서 발생하며, 간극은 필연적으로 ‘거리‘를 상정한다. - P185

결국 페티시를 벗어나는 비판은 얼마나 ‘정확한 거리‘를 두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 P185

포스터가2015년에 펴낸 『불길한 새 시절』이라는 책 제목은 ‘좋았던 옛 시절good old days‘이란 말을 반대로 뒤집은 표현이다 - P185

즉 포스터가 바라보는 2010년대는 1920년대와 유사한 면이 있다. - P186

1920년대는 양차대전 사이에 낀 소위 ‘좋았던 옛 시절‘로 회자되지만, 사실 그 재즈 시대의 풍요는 곧 경제공황의 폭탄을 맞게 될 폭풍전야와 다름없었다. - P186

당시 유럽 예술의 이러한 다양성은 시대적혼란의 증거이자, "비상사태가 예외적이기보다 정상적인 상태가 되던상황의 증거였다. - P186

시대 변화에 따른 거리 소멸이 마치 탈비판적 조건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긴박하게 떠밀며 밀착하는 시대의 혼란은 또 다른 간극들을 쉴 새 없이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모순은 계속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 P186

전자의 봉합적 환상에 도취하는 건 페티시즘이지만, 후자의 실재적 모순을 들여다보는 건 비판의 몫이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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