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mere life’을 ‘진정한 삶real life’과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며,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자자손손 보존되기를 매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다.

우리가 뭔가 인위적으로 단절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인식은 어떤 불길한 행위자가 우리를 항상 위협하고 있다는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편집증적 전망에서 테러와 테러리스트들은 ‘추상화’된다. 즉 구체적인 사회적·이데올로기적 네트워크에서 분리된다. 그리고 사회 환경을 환기시키는 모든 설명은 은밀하게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기각된다.

"현실의 충격은 자유주의적이고 관용적인 태도와 텍스트성 중심의 문화연구라는 고립된 탑을 무너뜨렸다."

‘문명의 충돌’ 전도사들의 주장과는 달리, 사실 미국 내에서 ‘근본주의’의 위협은 오히려 내부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가난한 제3세계에 대한 책임과 죄의식을 갖는 대신에 미국의 선택은 ‘이제 우리가 피해자다!’라는 자의식을 갖는 것이었다

미국은 전 세계의 경찰이라는 예외적인 역할을 강력하게 재단언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미국에 대한 원한이 미국이 지닌 힘의 과잉 때문이 아니라 결여 때문에 빚어지기라도 했다는 듯이.(『실재의 사막』, 73쪽)

정신분석에서 행복은 ‘욕망의 배반’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일단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완벽하게 충족되어선 안 된다. 과도한 소비는 불행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씩 바닥나는 물건도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조건은 일이 잘못됐을 때 비난할 수 있는 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하지만 결코 덜 중요하진 않은 조건으로 ‘다른 장소other place’의 존재를 들 수 있다. 동유럽인들에겐 소비 천국으로서 서구가 그 다른 장소였다

주체가 자기 욕망의 불일치 안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행복의 대가이다."(『실재의 사막』, 89쪽)

즉 실제로는 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체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우리는 타자를 우리의 적으로, 거짓 지식의 소유자 등으로 환원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그녀의 안에는 항상 다른 사람의 헤아릴 수 없는 절대적 심연이 들어 있다.(『실재의 사막』, 99쪽)

바디우는 ‘타자에 대한 존중’이 자주 유해하며 악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편다. 특히 ‘주관적으로는 정당한 행동’일 때 그렇다.

"누군가 인류의 진정한 단 하나의 적을 죽인다면, 그는 인류 전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실재의 사막』, 100쪽)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면, 냉소주의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면서도 한다"이다.

"지배이데올로기를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단지 우리에 대한 그 지배를 강화하고 있을 뿐이다"(『실재의 사막』,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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