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건축학적 방법론이라기보다는 사회공간을 궁리하는 계획론과 설계 태도의 진전, 또는 공급방식의 새로운 모색이라는 담론적 차원에서 공적 주택공급 계획·관리 체제의 변환이 필요하다. 네덜란드나 일본의 경우처럼 새로운 주거건축 실험을 공공이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커지는 시점이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산층이든 서민층이든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평수끼리 모여 있기를 원하며 크고 작은 평수의 아파트가 뒤섞여 있는 단지 구성은 사회심리적 환경조성에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고 나타났다.

자연 경관을 가로막는 정도를 줄이기 위한 취지로 탑상형(tower) 건축물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다양한 심의기준이나 조례로 조망을 위한 통경축(通景軸, visual corridor)의 확보와 개방감 확대를 강제하기도 한다

지속적인 용도지역 상향 조정과, 이로 인한 용적률 증대와 초고층아파트의 공급 확대,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의 건설 등은 다른 처방을 무력하게 만든다. 특히 민간 건설업체를 염두에 둔 ‘사업성 확보’가 모든 판단의 준거가 되는 현실에서는 백약이 무효한 실정이다.

한국 최초의 아파트가 무엇인가를 두고 논란이 여전히 분분하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건설된 조선총독부 철도국 합동관사

건립년도가 1930년으로 알려진 서울 회현동의 미쿠니 아파트

충정로의 토요다 아파트

1935년에 서울 내자동에 지어진 미쿠니 아파트

해방 이후로는 1956년에 건설되었다고 알려진 서울 주교동의 중앙아파트

1957년 혹은 1958년 등으로 건립 연대가 다소 혼동되는 종암아파트

아파트는 1973년의 건축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3층 이상의 건물로, 대지의 전부와 계단·복도·설비의 일부 또는 전부를 공동으로 사용하여 각기 독립된 주거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공동주택"이라는 법정 용어로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파트의 근원을 어디에서부터 다시 추적해야 할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일제강점기의 조선 최초의 아파트를 찾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아파트’라는 용어가 한반도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아파트라는 용어는 1925년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의 「건축잡보」(建築雜報)란에 ‘동윤회의 아파트먼트’라는 제목으로 3층 콘크리트 아파트 건설계획이 실린 기사를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다.

일본에서 아파트먼트 하우스의 시초가 된 동윤회 아파트의 특징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결국 프랑스의 도시주택이 미국으로 유입되었고, 그곳에서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유입되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파리의 아파트가 가지는 도시주택으로서의 경쟁력 확보 요인은 세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첫째, 파리는 독특한 도시로서 나무가 무성한 주요 가로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둘째, 아파트 건물의 최고 높이가 65피트(20미터)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천정의 높이를 가정할 경우 6층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세 번째는 오늘날에는 종종 간과하는 특성인데, 호화로운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파트 건물들은 거주자들의 사회경제적 혼합을 가능하게 하여 폭넓은 소득계층의 거주자들을 수용

일본 동윤회 아파트의 특징이 ①가로를 의식한 건물배치의 묘수(妙手, 디자인) ②가족세대·독신자의 혼합 거주 ③다양한 단위주택(住戶, unit) 타입 ④공유시설의 설치로 정리된다는 점에서, 그 뿌리는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의 아파트라는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미국 역시 최초의 지역지구제를 시행한 후 아파트를 "세 가구 혹은 그 이상의 가구가 각각 독립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며, 토지 혹은 건축물 안에서 요리 등을 할 수 있는 거주형식"으로 정의한다.

우리나라의 아파트는 일본인 토요다(豊田種松)에 의해 1930년 서울 충정로에 건설된 4층짜리 유림 아파트가 그 처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4층이던 유림 아파트는 1979년 이전에 5층으로 증축되었으며, 1979년의 충정로 확장에 따라 가로변의 일부가 헐린 채 오늘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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