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행동 북극곰 무지개 그림책 86
재클린 우드슨 지음, E. B. 루이스 그림, 김선희 옮김 / 북극곰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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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행동!

보자마자 그림책 제목에 먼저 꽂혔습니다.


언제부턴가 친절한 행동을 자연스레 베풀어도 되는 상황에서도 먼저 생각부터 하게 되더군요. 내 행동이 과연 내 의도대로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받아들일지, 아니면 그냥 오지랖으로 받아들이거나 오히려 불편하게 받아들일지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드니 말이에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친절한 행동을 자연스레 하기 있다기보다는 이성적이라는 명목하에 이런저런 잡생각들이 오히려 더 많이 떠오른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친절한 행동의 '친절한'이란 단어가 조금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림책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묘한 슬픈 모습으로 서있는 아이의 모습이 때문에 오히려 더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림책 [친절한 행동]의 이야기는 한겨울 미국 변두리의 시골 학교처럼 보이는 곳에 마야라는 여학생이 전학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삭막한 도시의 배경도 아니고 여유롭고 순수한 시골의 조그마한 학교의 모습 때문일까요? 그곳에서의 아이들은 무조건 순수할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클로이와 반 친구들은 전학생 마야에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좀 차갑고 냉냉하네요. 마야의 낡고 해진 옷들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기존의 다른 친구들의 시선 때문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어디나 텃새는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이유든 저런 이유든, 이런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 해보고자 고분군투하는 마야의 모습이 엄마의 마음으로 너무나 짠하게 느껴지더군요.

과연 클로이는 클로이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야의 마음을 잘 알아봐 주었을까요?

그림책의 제목이 [친절한 행동]이니 말이에요.

......

그런데 조금 쓸쓸하고 우울해 보이는 그림책 표지가 자꾸 걸리는 건 왜일까요?


클로이의 모습을 보니 유치원 때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너무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그 녀석 까만 얼굴과 그 얼굴에 있는 까만 점,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그 녀석이 싫었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답니다. 저를 특별히 괴롭힌 친구도 아닌데 말이지요. 그 아이는 그저 제가 짝꿍이었기 때문에 잘 지내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 아이 얼굴에 있는 까만 점이 유독 보기 싫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요. 그래서 그랬는지 소풍 갈 때 손잡는 것도 거부하고 그와 하는 모든 활동을 거부하며 짜증을 냈던 감정들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유치원을 졸업하여 그와 헤어질 때까지 단 한 번도 그 아이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제 기억 속에 남아있어 저를 부끄럽게 부끄럽게 만듭니다. 너무 어려서 그럴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귀가 살짝 빨개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클로이의 모습과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니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도 특별한 큰 이유 없이 싫다고 느껴지는 친구들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처럼 친구의 외모에서, 클로이처럼 친구의 옷차림이나 혹은 주변 분위기가 그러하니 그냥 외면해 버리는 암묵적 동조로 인해서 등, 해당 그 순간에는 여러 이유들을 댈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비겁하고 부끄러운 행동과 그에 대한 찝찝한 마음은 가슴 한편에 여전히 남아 있고, 나아가 용기가 없다면 사소하더라도 친절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런저런 사소한 변명들이 작은 친절을 베푸는 데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저희 아이들은 저보다는 빨리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순간입니다.


"친절이란 이런 거란다. 작은 친절이 물결처럼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지."

......

"작은 친절이 조금씩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단다."

[친절한 행동 ]


그림책 [친절한 행동]으로 인해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클로이와 그녀의 친구들이 마야를 대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직접적인 부정적 감정이 들지 않더라도 혹여나 집단의 암묵적 동조와 침묵으로 용기 내지 못하는 상황에 속해 있는 건 아닌지 세밀하게 제 주변을 둘러보게 되네요.

그림책의 여운이 깊어 재클린 우드슨 작가님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답니다. 사실 저는 처음 작가님의 이름을 처음 접했거든요. 찾아보니 이미 미국 청소년 문학계에서는 유명하신 작가님이시더군요. 또한 작가님이 흑인이시라는 점도 눈길이 갑니다. 그림책을 보는 내내 클로이는 흑인 아이로, 마야는 백인 아이로 나온다는 점이 흥미로웠거든요. 클로이의 친구들도 백인뿐만 아니라 동양인도 섞여 그려져 있는 부분 역시 참 인상적이었답니다. 이제는 정말 인종과 피부색을 넘어 보다 더 넓은 관점으로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해 볼 수 있는 시대가 온 것 같네요 (여전히 인종차별도 존재하지만 말이지요)


재클린 우드슨 작가님의 책들을 더 살펴보고 싶어졌습니다. 아마도 더 찾아 살펴보게 될 것 같네요.


[친절한 행동]을 만나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출판사로부터 그림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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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서, 그림책 읽기
김장성 지음 / 이야기꽃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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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뭐예요?"



책육아로 인해 엄마인 저에게도 삶의 긍정적인 변화를 느끼게 된 후 여기저기 그림책에 대한 애찬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가 많은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이라는, 나아가 "그림책"이라는 물성을 함께 즐기고는 있는데 유독 "그림책"이라는 단어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저 역시 "그림책"이라는 단어를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습니다.



"...동화책 아니었나요?"



하지만 그림책은 동화책과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습니다. 동화책에 들어있는 삽화보다는 그림이 가지고 있는 비주얼 텍스트의 힘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그래서 그런지 요즘에는 글, 그림 따로 작업한 그림책보다는 글/그림을 함께 작업하는 작가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아 보여요. () 어떤 그림책 출판사 편집장님께서도 그림책은 글 작가가 있더라도 그림 작가가 새롭게 예술로 탄생 시키는 분야라고 말씀하셨으니 분명 그림책은 동화책과는 구분되는 영역인 것 같습니다. 독자들은 그 구분이 쉽지 않지만 말이죠.



그래서 그럴까요? 그림책 모임을 하고 있는 저에게도 많은 멤버분들이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그림이 너무 어려워요."

"그림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저부터 잘 모르겠어요."



맞아요, 어느새부터인가 그림(Visual Text) 영역이 확장되면서 글로만은 이해할 수 없는 그림책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예 글이 없는 그림책, 그림으로만 서사가 진행되는 그림책들도 많이 나오고 있으니 말이죠. 아이와 함께 읽었는데 엄마조차 '? 그래서 이 그림책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 '이게 뭐지?' 하는 그림책들로 당황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독자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많은 그림책들이 글과 그림의 사이를, 그리고 그림책과 독자 사이를 독자 스스로 읽어내고 느끼고 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졌으니 말이죠.



그림책은 '사이'의 예술이다.

글과 그림의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 관념과 표현 사이, 내용과 형식 사이,

어른과 아이 사이, 상상화 현실 사이.... 그림책은 그 사이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책은 읽는 일은 사이를 읽는 일이다.

사이를 직관하여 의미에 닿는 일이며, 사이를 통찰하여 의미를 분석하는 일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삶의 표피보다는 본질에 주목하게 되며,

답을 얻기보다는 질문을 품게 된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가...?

[사이에서, 그림책 읽기] , 김장성 그림책 이야기, 이야기꽃



실제로 저 또한 김장성 작가님의 [민들레는 민들레] 그림책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약 5년이란 시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첫째 아이가 유독 좋아했던 [민들레는 민들레]. 당시 아이에게 책을 읽어 줄 때는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그냥 입으로만 읽어 주었죠. 그랬던 [민들레는 민들레]가 다시 큰 의미로 저에게 다가온 것은 둘째에게 다시 읽어 주었을 때였습니다. 그제서야, "! 작가가 이걸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나?"라고 쿵 하고 다가오더군요!.



민들레가 단순히 길거리에 핀 꽃 한 송이가 아니라 나 같기도 하고, 또 우리 아이들 모습일 것 같기도 한 모습에서 한동안 민들레에게 꽂혀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였어요. 혼자서 민들레에 관련한 그림책 습작?? 비스므레한 것도 만들어 보고 말이죠. 그렇게 [민들레는 민들레]라는 그림책은 저만의 인생 그림책으로 올려지기도 했었죠. 그리고 그 후로 더욱더 겸손한 독자가 되도록 자세를 달리 가졌던 것 같아요. 내가 설령 마음에 와닿지 않는 그림책이라도 그 사이는 작가가 남기고 싶은 메시지라던가 의도가 분명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하지만 여전히 모든 그림책의 사이를 이해하진 못합니다. 저 역시 어떤 그림책의 사이는 읽히나, 어떤 그림책의 사이는 잘 읽히지 않는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는 것 같아요. 이럴 때는 그림책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참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나의 시야를 넓히기도 하고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림책 모임을 한다는 것인 쉬운 일이 아니죠. 각자의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죠. 그렇다면 그림책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그림책 사이를 한번 엿보는 것은 어떨까요?



작가의 눈으로 그림책을 바라보고 계셔서 그런지 몰라도 그 사이의 눈이 살짝 매서운 것도 같습니다. 보통 저는 그림책을 볼 때 나의 이야기, 즉 개인의 나에게까지 그치는 경우가 많거든요. 하지만 김장성 작가님은 그림책과의 사이를 통해 개인을 넘어 사회 이야기까지 관통하는 눈까지 가지고 계시니 말이죠. 그림책을 읽어 내려가는 그 사이에서 사고의 범위가 이렇게까지 깊게 확장할 수 있구나를 통해 살짝 부끄러워지기도 하더군요.



요새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소위 말하는 글밥?을 늘려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좀 더 문장이 긴 동화를 읽어주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이를 읽어 내어야 하는 그림책에 다소 소홀해진 것도 사실입니다하지만, [사이에서, 그림책 읽기]를 통해 왜 계속 그림책을 읽어야 하는지, 놓으면 왜 안되는지 다시금 다시금 깨닫습니다. 커가는 아이가 글 서사가 긴 문학적인 책을 주로 찾아 읽더라도 저 만큼은 그림책을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지요. 결국 그림책은 어린이들만이 읽는 책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그림책 사이를 읽어야 하는 주 독자층은 우리 어른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지요. 그림책에 담겨있는 그 사이를 통해 나는 왜 존재하는지, 누구인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내 세계뿐만 아니라 내 주변까지 돌아보며 계속 생각하고 사는 것은 중요한 일인 것만 같습니다.



그림책 사이를 읽어내고자 하는 어른 독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겸손한 독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아는 만큼 보이고, 알고 보이는 만큼 우리 아이들에게 전달할 것들이 많아지겠지요. 다음 세대인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전달해 줘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림책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해보는 건 어떨까요?



[사이에서, 그림책 읽기]는 그림책 사이를 어려워하는 다 큰 어른이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림책은 이런 책이라고 친절히 설명해 주면서 말이지요.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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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맘대로 크는 아이 - 두뇌진료 20년차 한의사가 알려주는 뇌 균형 건강법!
노충구 지음 / 보민출판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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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가 태어나고 커가면서 아이들의 발달 진행 단계 관련한 정보를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거예요. 신체적 변화와 더불어 정서적 변화 역시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또 그에 따라 부모는 어떤 양육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사실 수많은 육아서에 많이 언급되었죠. 하지만 이미 많은 부모들이 느끼고 있을지도 몰라요. 

육아서에서 나온 수많은 정의와 방법들이 왜 현실에서는 온전히 잘 적용되기가 힘든지 말이지요. 산 넘어 산이라고 잘 풀렸다 싶으면 또 다른 고비들이 펼쳐져 있으니 말이죠.


사실 전 며칠 전 신기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여전히 저의 첫째 아드님께서는 8살이 되었음에도 통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에 꼭 한 번씩은 깨어나요. 또 피부가 많이 건조하기도 하죠. 더 크면 좋아지겠지 좋아지겠지 했었는데, 뭔가 잘 좋아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니 초조해지더군요. 안되겠다 마음먹고 뭐라도 한 해보자는 생각에 집 앞 어린이 한의원을 찾았어요.

(사실 제가 둘째를 낳고 몸이 너무 안 좋아 비염을 달고 살았는데 한의원에서 약 3개월 한약 복용과 꾸준한 치료를 받은 후 너무 몸이 좋아짐을 느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도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아이 손을 잡고 한의원을 갔답니다.)


선생님께서 아이를 진맥하지고 난 후 아이에 대한 성향, 기질 등을 얘기해 주시는데, 웬걸... 순간 전 '나 점집에 왔나?'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하시는데 정말 1도 거의 틀림없이 다 맞추시더군요. 체질적으로 긴장감이 높고 4기통의 엔진을 달고 있는, 스포츠카 급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아이이기 때문에, 이러한 신체적인 상태가 아이의 수면이나 체열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하시면서, 아이에게 현재 필요한 것은 달릴 땐 달리더라도 쉴 땐 긴장을 이완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하셨지요. 일반적인 발달 센터가 아니라 한의원을 갔다 온 후 아이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된 기분이었고 이 때문에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너그러움 마음이 드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죠.


이 경험 때문이었는지 한의학적으로 뇌성장을 풀어 놓은 [뇌맘대로 크는 아이] 책이 더욱 끌렸는지도 모르겠어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책의 저자이신 노충구 한의사님은 아이가 발산하는 성격, 성향 등은 뇌 발달과 크게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이었어요. 만약 부모로서 느끼고 있는 부족한 아이의 상태가 있다면, 이는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기 본연의 자질이라고 치부하기보단  만약 그 부분이 아이가 사회인으로 자람에 있어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으면, 잘 자랄 수 있도록 뇌 발달의 균형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이죠.


"아이가 성장 과정에서 특별히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된 적이 없는데도 아이가 지나치게 예민하다면 성격이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보다는 뇌 불균형 문제가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 합니다." (p163)

"인간의 뇌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불균형하게 발달합니다.

생리적인 범주 내에서 드러나는 뇌의 불균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격으로 발현되지요. ......

하지만, 뇌의 불균형이 심해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아이의 정서나 행동에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p164)

- [뇌맘대로 크는 아이] 中


[뇌맘대로 크는 아이]에서는 노충구 한의사님이 치료하신 다양한 사례들이 나오는데 학습, 정서, 건강, 발달로 총 4가지 측면으로 다뤄지고 있어요. 다양한 아이들의 사례를 통해 많은 아이들이 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뇌가 전폭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그 과정을 감당해 내지 못한 아이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사실 많은 육아서에 부모의 태도에 따라 아이가 만들어진다면서 어느 부분에서는 부모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하지 않나요?)


"아이가 제대로 크지 못하는 것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부모들이 아이들의 뇌에 대해 알지 못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p11)

- [뇌맘대로 크는 아이] 中


아이를 대할 때 심리적인 측면 이외에도 아이의 두뇌 발달 측면에서도 한 번씩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 영유아 시기에는 *눈 맞춤 시간이 충분한가 / *소리에 민감한가 / *운동신경이 제때 발달하고 있는가 / *공감 소통이 잘 되는가 등을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특히 인지가 발달하면 말이 많아진다고 하신 부분에서 항상 말이 많은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렸는데요, 가끔 귀에 피가 날 것 같아 조용히 있었으면 하는 바람들이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리고 더욱더 아이들의 말에 충분한 공감과 대응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언어 능력이 좋아지려면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무조건 늘어나야 돼요. 지금 말이 늘고 있는 아이한테 왜 그렇게 이상하게 말하느냐, 어법에 맞게 말하라고 지적하는 것은 아이의 언어 발달을 방해하는 것이 될 수 있어요. 그러니 그냥 들어주세요. 들으면서 아이가 말을 많이 하도록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세요 (p262)


"인간이 사고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생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합니다. 아이가 좀처럼 말이 없다는 것은 생각이 깊은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이의 뇌에서 보고 느끼는 인지 활동이 충분히 일어나지 않는 것이지요." (p266)

- [뇌맘대로 크는 아이] 中


그리고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아이의 뇌가 잘 발달한다는 것은 아이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독립성이 강화되는 것이기에 부모인 나의 생각대로 행동하거나 따라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뇌가 발달할수록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점점 명확해지는 것이니 아이를 의사를 존중하여 서로의 의견을 취합해 나가는 방향으로 아이를 대해줘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제 점점 더 사회 속의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단순히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아이의 행동 뿐만 아니라 아이의 두뇌 속에서의 발달 역시 고려한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아이도 지금 성장하느라 고생하는구나라고 생각하니 무한 격려도 해주고 싶네요. 잘 크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다고요!



♣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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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는 어떻게? 손을 깨끗하게 씻어 줄까 - 건강한 생활 습관에 숨은 과학 알이알이 과학그림책 1
마들라인 헤이즈 지음, 스리말리 바사니 그림, 조연재 옮김 / 현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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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 정말 더욱더 철저하게 위생을 관리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생긴 것 같아요.

외출 후 무조건 손을 씻는 습관부터 아이들에게 일려주고, 저 역시 꼭 지키고 있거든요.

그리고 손을 씻을 때는 무조건 "비누"를 이용하고요.

하지만 이 비누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세균을 물리치는지,

그 원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데도 말이지요.

단순하게 비누로 씻어야만 깨끗하다는 사실만 일방적으로 알려줬는데,

이번에 현북스에서 나온 새로 나온 과학 그림책 [비누는 어떻게 손을 깨끗하게 씻어 줄까]를 통해 비누의 원리에 대해 저 또한 알게 되었답니다.


보통 건강한 생활 습관!을 떠올리면 "손 씻기"라는 기본적으로 떠올리실 거예요.

하지만 그거 아셨나요??

비누가 세균을 없애고 죽이는 게 아니라, 비눗방울 속에 세균을 담아 흘러 보냈었던 사실을요!!!


이미 유치원에서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웠던 내용이라 다소 식상할 수 있는 주제를

새로운 지식과 함께 재미있는 그림들을 통해 다시 책을 들쳐보게 만들어져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재채기를 할 때의 댑 댄스 자세는 저와 아이들의 웃음을 빵 터트렸어요!!!

계속 따라하게 만드는 그림의 매력이라고나 할까요..^^


단순히 손 씻기에만 국한한 그림책은 아니에요.

포괄적으로 우리가 건강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습관을 이야기하면서

바이러스, 면역 이야기를 포괄적으로 다루면서 우리 스스로 이겨내는 힘을 기르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어요.

단순히 딱딱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 숨어있는 과학 원리를 찾아내어

아이의 시선으로 읽어 주니 아이들 귀에도 쏙쏙 들어가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저의 눈길을 훅~! 끈 실험 방법이 뒤에 있더군요!

후추를 통해 비누의 원리를 알아보는 실험!!!

너무나 간단한 실험이라 아이와 함께 진행해 보았어요.

정말 간단하고, 쉽고, 신기하고, 재밌었는지 아이는 계속 한번 더!를 외쳤답니다.


마지막으로 비누의 원리를 생각하며, 손씻기 단계와 그 중 가장 중요한 단계는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어요~.

정리를 해서인지 비누의 수소성 개념도 머리에 콕콕 박힌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에도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두 번 부르며 손을 씻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아이!

자신의 몸을 챙기는 아주 작은 습관이 오래 지속되길 바래 봅니다!



* 출판사로부터 그림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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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날 - 어느 날 고래가 우리에게 왔다 꼬마도서관 12
코르넬리우스 지음, 토마소 카로치 그림 / 썬더키즈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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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고래가 주는 신비한 느낌이 있습니다.
고래 자체뿐만 아니라, . .라는 그 글자가 왠지 모르게 영적인 느낌을 주는 것만 같거든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자꾸 사라져 간다고 해서 그런 걸까요?
고래가 없어진다면 정말 큰 재앙이 떨어질 것만 같거든요.

그래서 저는 '고래'와 관련된 그림책들은 반사적으로 손이 가게 되더군요.
픽션, 논픽션 장르를 가르지 않고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도서관에서 처음 [고래의 날] 그림책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쳤습니다.

이번에는 '고래'가 주는 분위기뿐만 아니라 오직 연필, 데생으로만 그려진 점 역시 눈길을 끌었답니다. 그리고 고래가 헤엄쳐 다니는 곳은 저 깊은 바닷속이 아니라 뉴욕인 듯한 모습의 도시 빌딩 속을 유영하는 표지를 보니 어찌 된 사연인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겠더라고요.



그러면서 바로 '코르넬리우스'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림은 '토마소 카로치'라고 적혀있는데 글 없는 그림책임에도 불구하고 '코르넬리우스' 이름이 먼저 적혀진 것을 보면 이 분이 기획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코르넬리우스'라는 이름은 평소 좋아서 즐겨보던 그림책 작가'다비드 칼리'의 또 다른 필명이더군요. 왜 갑자기 다른 필명을 사용하시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고래의 날] 작품부터 필명을 사용하셨는지 정말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



빽빽이 빌딩으로 가득 찬,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세계에 고래 떼가 몰려옵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마치 원래 자신의 세계인 듯한 모습으로 고래 떼들은 유유히 헤엄쳐 갑니다. 아니 어쩌면 자신들이 살아갈 삶의 터전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르죠.



신기한 건 고래들은 인간들의 놀란 모습과 당황한 모습에는 관심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고래들의 평화로운 모습은 인간 세계에 조금도 해가 되지 않아 보여요.
어떠한 건물도 무너지거나 사람들도 다치지 않으니 말이죠.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갈 길을 갈 뿐인 것 같았어요.


. . . 우리 인간들은 이 기이한 현상을 그저 바라볼 수는 없었나 봅니다.
분명 무언가 있을 것이라 의심하고 우리 존재에 해를 끼친다고 판명 내리니 말이죠.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상황인데도 말이지요.



[고래의 날]이라는 이름 역시 아마도 인간의 이기적인 관점에서 지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그림책을 보고 난 후 [고래의 날]이라고 불러보는 그 이름의 소릿값은 씁쓸하기만 합니다이건 정말 [고래의 날]이 맞나?라는 생각이 드니 말이에요.
분명한 건 고래들을 위한 날은 아니니 말이죠.



단순히 환경 그림책이라고 보기에는 숨어 있는 인간의 뒤틀린 욕망이 너무나도 부끄럽게만 보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는 배척하고 정복할 대상으로 보는 인간의 욕망이요.고래들은 정말 인간에게 아무런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요.
오히려 정복했다고 믿고 그것을 기념해대는 인간의 행동이 결국 우리 인간의 삶을 조금씩 스스로 파괴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 보여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믿도록 누군가가(위에서, 정부? 군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결국 고래의 의미는 겉으로는 멸종 위기에 처해있는 고래 자체였을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나와 다른 존재들... 나와 다른 너였던 것이었던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너무 앞서나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래의 날] 그림책을 통해 전쟁, 유대인 학살, 언론 플레이 등이 키워드로 떠오르게 되더군요.



그리고 누군가 이렇게 우리의 세계를 이기적으로 끌고 간다 하더라도 그것에 휘말려 소신껏 나의 목소리를 내는 용기가 한 번쯤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네요. 개인의 소리가 모여 다수가 되고, 결국에는 세상을 상생하며 공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길을 조금이라도 틀어 줄 수 있을 테니 말이죠.



[고래의 날]의 리뷰를 마칠 때가 되니, 왜 다비드 칼리가 코르넬리우스라는 필명을 [고래의 날] 그림책부터 사용하셨는지 조금이라도 이해가 됩니다. (물론 저만의 해석이지만요.)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코르넬리우스 가문은 유대인에게만 포교되는 초기 최조 그리스도교에서 최초로 이방인을 신자로 인정한 가문이라고 해요. 만약 코르넬리우스가 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처럼 유대인들 사이에서만 믿어지는 종교로 남았을지 모른다고 하네요. (출처: 나무위키)



나와 다른 존재, 나와 다른 이방인들 역시 그들의 삶이 있고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이해하고자 하면 폭력과 이기심이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론 수많은 논쟁과 토론이 있겠지만요. 하지만 평화롭게 우리 인류가, 또 나아가 우리 지구 생명들이 오래도록 상생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다비드 칼리, 아니 코니멜리우스와 토마소 카로치는 그 점을 [고래의 날]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출판사로부터 그림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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