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탄생 120주년 전면개정판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위 도서는 한길사( @hangilsa )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책이 과거의 기록에만 머무는 책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책은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다루지만, 읽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지금의 사회로 데려온다. 역사 속 한 전범의 재판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오늘의 언어, 오늘의 조직, 오늘의 복종을 생각하게 된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오래된 책이면서도 낡지 않았다.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자주 인용되지만, 읽고 나면 그 말의 무게를 조금 다르게 느끼게 된다. 아이히만은 스스로를 대단한 악인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끝까지 명령과 의무를 말했다. 그는 잔혹한 확신의 언어를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너무 익숙하고 사무적인 말 속에 머물렀다. 그래서 더 서늘했다. 악은 언제나 거창한 신념이나 노골적인 폭력의 얼굴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 책은 집요하게 보여준다.

책을 읽는 동안 한국 사회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자주 떠올랐다. 특히 계엄을 둘러싼 긴장과 혼란 속에서 반복되던 말들, 책임을 개인이 아니라 체계로 넘기고 판단을 위가 대신해주길 바라는 태도들. “나는 시킨 일을 했을 뿐이다”라는 식의 문장은 언제나 위험하다. 거대한 잘못은 소수의 악의만으로 생기지 않고, 생각하기를 멈춘 다수의 평범함 속에서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이 책은 다시 확인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은 남을 비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를 자기 자리로 데려온다. 나는 회사에서, 사회에서, 인간관계 안에서 얼마나 자주 내 판단을 남에게 맡기고 있는가. 나는 편한 쪽으로만 이해하고, 익숙한 세계 안에서만 옳고 그름을 결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하지만 아렌트의 책은 바로 그 어려운 태도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번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함께 읽은 일이 특히 좋았다. 각자 읽은 문장이 다르고, 불편했던 지점도 달랐지만,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아렌트가 당시 얼마나 큰 비난을 받았는지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는 누구보다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 점이 불편했겠지만, 동시에 그 점이 이 책의 가치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도 비슷하지 않을까.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멈추지 않는 자세 말이다.

이 책은 뚜렷한 결론을 주기보다 오래 남는 질문을 준다. 생각하지 않는 삶은 얼마나 쉽게 타인의 언어를 반복하게 되는가. 나는 얼마나 쉽게 확신하고, 얼마나 늦게 의심하는가. 넓게 본다고 믿으면서도 사실은 아주 좁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무거운 책이지만, 그래서 더 필요한 책이었다. 내 판단을 점검하게 만들고, 생각하는 일이 결국 시민의 기본이라는 사실을 다시 배우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