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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본 것 - 나는 유해 게시물 삭제자입니다
하나 베르부츠 지음, 유수아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우리가 본 것」, SNS와 커뮤니티 중독자인 저는 읽으면서 무척 섬뜩했습니다. 2021년에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으로 선정된 소설입니다. 네덜란드에서만 65만 부가 판매되었다고 해요.
172쪽으로 얇은 책이라 금방 읽히는 데, 여운은 길어요.
부제인 '나는 유해 게시물 삭제자입니다'로 알 수 있듯이, 주인공 케일리는 '헥사' 라는 회사에서 유해 게시물 삭제자로 일합니다. 소설은 스티틱 이라는 사람에게 주인공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요. 술술 읽히는 대화체입니다. 마치 케일리를 인터뷰하고 있는 기분이죠.
사실 수많은 커뮤니티, 웹사이트, 유튜브, SNS 등에 '유해하다'고 느낄만한 게시물이 상당히 많이 올라와 있잖아요. 잠깐 스치듯 봐도 하루종일 깨름칙한 이야기, 사진, 영상 들이요.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는 중에 이 책을 알게 되어 흥미로웠어요.
문제는 그 유해성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인데요. 종교적, 정치적 이념이 개입되지 않을 수 있는지. 과연 모두가 납득할 만한 유해함의 기준은 어느 선인지.
이 소설에서는 꽤나 까다롭고 구체적으로 그 선을 명시하고 있는데요. 의아한 대목이 더 많습니다. 실제로 유튜브만 봐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영상에 노란딱지가 붙는 일이 허다하고, '신고'를 거듭하는데도 여전히 공개되어 있는 콘텐츠도 많아요.
잘못 삭제했다가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삭제를 요청한 기업의 견해가 개입될 수 있다는 것.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
그동안 '유해하다'고 내가 판단한 것들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유해 게시물에 노출된 우리는 안전할까요? 소설 속 주인공은 유해 게시물을 뚫어져라 보면서 점점 달라집니다. 자극적인 콘텐츠에 무뎌지고, 공격성과 폭력성이 자기 안에 자리잡아요.
어쩌면 지금의 제 모습입니다. 이제 어지간히 자극적이지 않으면 놀라지도 않으니까요. 그리고 알게 모르게 저의 기분을 좌우하고,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생각을 바꿔요. 그러다.. 인격이,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거죠.
유해 게시물을 검토하고 삭제하는 일을 하는 헥사의 직원들은 모두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소설에도 나와있듯이 충격적인 이미지에 대한 장기적인 노출은 우울증과 불안, 강박적 사고를 유발할 수 있죠.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상당히 인상적인데요. 주인공이 유해 게시물 속으로 들어간 모습이랄까요. 시사하는 바가 큰 소설이라 책장을 다 덮고도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랐어요. 그동안 제가 봐온 것들, 뇌리에 박힌 장면들이 다시 재생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책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영상을 볼 때 시간이 더 잘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부정적인 기분이 들 때면 자극적인 콘텐츠에 더 깊이 빠져들곤 하고요. 제 안에 쌓여가는 유해함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책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면, 혹은 더는 망가지고 싶지 않다면 숏츠 보다는 시 한 편을, 영상 보다는 소설 한 편을 봐야겠다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