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싸움 애지시선 48
박일환 지음 / 애지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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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은 얇지만 재미가 없으면 다 읽기 쉽지 않다. 금방 다 읽혔다. 박일환의 이번 시집, 좋다. 그의 시를 읽으니 부끄럽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참 부드럽고 치열한 삶 여전하다. 중학교 국어선생으로 아이들 가르치기도 만만찮은 일인데, 그 일만도 벅차서 옆도 안 돌아보는 선생들 많은데, 이 분은 온 나라 곳곳 의로운 싸움, 고통스런 이웃의 삶의 현장에 늘 함께 있었다. 용산 남일당, 부산 한진중공업, 삼성백혈병, 두리반식당, 밀양 송전탑 , 강정 구렁비...

 

이렇게 소개한다고 그의 시가 거칠고 불편한 투쟁시라고 오해해선 안 된다. 그의 섬세하고 예민한 촉수가 세상 곳곳 아프고 슬픈 사람들을 얼마나 부드럽고 간절하게 감싸 안는지 모른다. 목소리 높은 구호가 아니라 깊은 슬픔 고요한 시선으로 이 시대를 바라본다. 그의 시는 자의식 과잉의 관념들, 분열증적인 현란한 언어로 독자를 곤혹스럽게 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시는 독자들을 부끄럽게 한다.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 왔는가.

 

 또 그의 시는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처럼 맑고 고요해서 마음 정갈한 묵상으로 이끈다. 장난기 벗지 못한 소년처럼 재밌는 시편들도 많아서 빙그레 웃게도 한다.  치열함과 고요함, 꼿꼿함과 부드러움, 진지함과 유쾌함을 고루 갖춘 시집이다.

 

 

도마뱀붙이

 

 

도마뱀붙이를 길러볼까 해요

도마뱀 사촌쯤 된다는데

발가락에 빨판이 붙어 있어

벽이나 천장에도 맘대로 매달릴 수 있대요

 

나도 천장에 붙어서 방바닥을 내려다보면

재미있을 거 같아요

 

공사장 비계에 매달려 일하다

철근더미 위로 떨어져 죽은 아빠

방바닥에 죽은 듯이 누워만 있다

아예 땅 밑으로 꺼져버린 엄마

 

꽃잎처럼 혹은 낙엽처럼

대책 없이 아무렇게나 떨어져 내리는 것들을 보면

참을 수가 없어요

악착스레 매달리지 못한 죄를

누가 사해 줄 수 있나요

 

도마뱀붙이를 길러 볼까 해요

피붙이가 없는 나는

무엇보다 붙이라는 말이 좋아요

도마뱀붙이와 붙어살며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떨어지지 않는

아귀힘을 길러볼까 해요.

 

 

마니차를 돌리며

 

 

마니차를 한 번 돌리면

경전을 한 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하니

경전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도

마니차를 돌리면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겠다

 

사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원통으로 된 마니차를 돌리며 지나가고

손길이 닿을 때마다 마니차는

제 몸에 새겨진 중생들의 지문을 기억하리라

 

행렬은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지만

돌리는 일은 거룩한 일

나무아미타불을 외듯 마니차를 돌리는 동안

지구 역시 조용히 돌고 있을 테니

 

나고 죽는 일만큼이나

쉼 없이 이어지는 발걸음을 받아 안으며

지구는 얼마나 묵묵히 제 몸을 돌리고 있었던 걸까?

 

머나먼 길을 걸어

이곳 몽골 사원에서 마니차를 돌려보니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이

저 단순한 묵묵함에 깃들어 있다는 걸 알겠다.

 

- 박일환 시집, 『지는 싸움』 (애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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