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콜스 - 영화 [몬스터콜] 원작소설
패트릭 네스 지음, 홍한별 옮김, 짐 케이 그림 / 웅진주니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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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말로 쓰는 게 아니다. 삶은 행동으로 쓰는 거다. 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네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255)


지난 시간을 되뇌어 볼 때, 내가 과거에 무엇을 생각했나 보다는, 내가 과거에 무엇을 행했나를 상기한다. 물론 이런 생각으로, 저런 생각으로라도 떠오른다. 그러나 생각은 옅어지고 행동이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


내가 한 행동이 결과를 낳는다. 그 결과는 내 삶에 한 획을 긋는다.


학생일 때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이러한 노력의 행동을 통해 좋은 점수를 얻었다. 좋은 점수라는 결과가 나는 우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나는 노력이라는 행동을 했고 좋은 점수라는 결과를 얻었다, 지속적으로.

지속적인 좋은 결과는 내가 우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타인들이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나는 공모전에 도전했다. 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좋은 점수라는 결과에 공모전 금상이라는 결과가 더해졌다. 사람들은 나를 공부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재다능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난 공모전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그래서 내가 입상한 공모전의 분야에서 가장 좋은 대학에 무난히 들어갔다. 나의 쾌감 중추가 충족되고 있다. 그 쾌감을 위해 나는 노력의 행동을 더했다. 그리고 현재 내가 머무는 곳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나는 좋은 대학이라는 배경, 대학에서의 좋은 성적, 그리고 타인의 인정과 추종을 얻었다. 나는 내 분야를 활용해 사업을 시작했다. 그 분야를 잘 알았고, 함께 하겠다는 이들이 있으니 나는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사업은 오르고 혹은 내려가며 노력의 행동을 지속했다. 그리고 작지만 좋은 결과를 하나둘 내기 시작했다. 작은 결과는 좋더라도 구성원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좋은 결과는 명백히 어제의 좋은 결과보다 좋았다. 결과는 점층적으로 커졌으며 좋은 결과였기 때문에 우리 조직을 인정하는 힘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자각되었다. 우리는 한 분야에서 힘이 있는 회사가 되었다. 우리를 믿어주는 고객도 늘어났다. 고객층이 안정화되면서 매출도 안정화됐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하기로 결심했다. 안정적 매출로 투자 여력이 생겼으므로, 변화하는 시장 상황을 리드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노력의 행동을 쌓았고, 작은 것부터 좋은 결과를 얻었다. 우리의 철칙은 어제보다 나은 좋은 결과였다. 그것으로 성공했으므로.


만일,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함에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첫째 생각은, 이 공부를 어디에 활용할까? 적분과 미분이 나의 생활에서 직접적으로 활용될까? 둘째 생각은, 나는 학생이므로 내가 최선을 다할 일은 공부이다. 그러므로 공부에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첫째 생각으로 나에게는 틈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 틈에 쾌락 중추를 자극하고 충족할 일이 새어 들어왔었을 수도 있다. 열심히 하려는 의지와 쾌락의 달콤함 사이에서 나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 주었을까? 이렇게 두 가지 생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나는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다. 쾌락을 잊지 못했다면 삶의 과정에 무수히 많은 절충을 시도했을 것이다. 10분 동안만 쾌락 중추를 채우면 휴식이 되어 나의 열정은 더 불타오를 수 있다. 쾌락은 열정에 불을 더하는 연료와도 같다. 이런 절충이 수도 없이 시도됐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미래는 나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생각에 얽매이기보다 행동을 했을 것이다. 나의 인생을 그리며 필요한 행동이 무엇인지에 집중했을 것이다. 이럴 때 깨닫는 과정은 생각의 범주 내다. 깨달아야 행동을 할 수 있다. 인식하고 자각해야 행동에 옮길 수 있다. 아무 생각이 없더라도 행동할 수 있다. 학생이 되면서 공부를 하고, 공부를 일상처럼 하루도 누락하지 않고 수행할 수 있다. 그런 행운의 존재가 나는 될 수도 있었다.


나는 나의 고려와 분석과 검토를 믿었다. 수많은 가능성을 상정하고 지금에 최선이 무엇일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내가 쾌락 중추의 만족에 이렇게 흔들리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쾌락 중추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다. 쾌락 중추가 조금만 움직여도 절충이 시도됐다. 그 달콤함을 알면서는 더욱더 절충의 과정이 당연시되었다. 그리고 쾌락 중추가 요구하는 행동을 했을 때 나는 인생이란 살아볼 만하다는 것을 느꼈다.


만일 쾌락 중추가 달성의 기쁨에만 작동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전에 나의 쾌락 중추는 달성의 기쁨 전용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쾌락 중추의 강력함을 인지하지 못했다. 나의 꿈을, 목표를 뒤흔들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줄 몰랐다. 이것은 현재의 결과에 대해 어떠한 영향력도 없는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렇게 벼랑으로 몰릴 때면 언제나 쾌락 중추를 변명으로 삼는다. 그리고 휴식도 없이 숨 가쁘게 달려왔어야 했냐고 어리광까지 부린다. 이렇게 진실과 사실을 외면한 채 자신을 외부의 혹은 나 자신의 질타로부터 보호하려고만 했다. 쾌락 중추의 유혹에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내가 안팎의 질타로부터 과연 나를 보호할 수 있을까?


‘이랬으면 지금 이러지 않았을 거야.’

‘저랬으면 지금 이러지 않았을 거야.’


이것은 단지 생각들뿐이다. 지나간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나 자신을 설득하지 못해 노력의 행동으로 전환시키기 못한다면 내 현재는 반복될 뿐이다. 


‘이랬으면 지금 이러지 않았을 거야. 늦었어.’

‘저랬으면 지금 이러지 않았을 거야. 늦었어.’


이것은 진실도 사실도 아니다. 단지 더 이상 노력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과거에 살고 있다. 미래를 기준으로 보면 과거에 살고 있다. 그러니 과거는 살릴 수 있다. ‘늦었어’라고 말하기 전에, 저지르지 않을 과오를 떠올린다. 그리고 한 발 내딛는다. 어제는 실망에 웅크리고 있었다면, 한 발 내디딘 오늘은 어제보다, 작지만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탓하며 ‘이젠 시간이 없어’라며 미래를 없애버리기 전에 한 발 더 내딛는다. 그럼 우리는 두 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실망이 발을 붙잡는다고 해서 원하지 않는 결과로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것 이상 편안한 것도 없다. 우리는 쾌락 중추의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된다.


오히려 쾌락 중추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작은 것이라도 달성했을 때 얻은 달성감이 기쁘다는 것을 느끼도록 노력한다. ‘마쳤다’로 완결하지 않고 ‘마쳐서 좋아’라고 생각하자. 지금 이만큼 좋으니 더 좋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 더 큰 달성을 정하고 또 한 발을 내딛는다. 목표에 집중한다. 시선을 고정한다, 내 마음의 흔들림이 멈출 때까지. 좋은 결과를 낼 때마다 쾌락 중추가 충족의 팡파르를 울리도록 훈련한다. 


삶은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 가장 편안하다. 이미 쾌락 중추의 달콤함을 경험한 후에는 다시 돌리기가 쉽지 않다. 쥐 실험에서 먹이통으로 갈 때마다 쾌락 중추를 전기로 자극했더니 결국 굶어 죽었다는 결과도 있다. 우리가 쾌락 중추에 달콤함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 달콤함을 만들어낼 능력을 잃는다. 스스로 설 수 없다. 그러나 작은 결과를 얻었을 때의 기쁨으로 쾌락 중추를 전환한다면, 그 어렵지만 해야 할 일을 한다면 우리는 지속적인 노력의 아픔을 달성의 쾌락으로 씻어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달콤해 한 인생 속에 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지속적인 노력의 행동을 하자. 그리고 작은 결과부터 얻고, 다음엔 더 큰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의 행동을 하자. 그러면 신기하게도, 행동과 목표 설정의 반복적 연쇄 작용으로 인해, 자신이 원했던 인생의 퍼즐이 하나둘 맞아 들어가는 것을,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퍼즐이 맞춰지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내 쾌락 중추는 이럴 때 충족이 된다.


‘이젠 늦었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한 발 내딛자’라고 생각한다. 그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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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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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여 

당신이 상어를 물리칠 무기, 충분한 양의 물, 혹은 거대한 물고기를 손쉽게 잡아 올릴, 하다못해 도르래나 지렛대라도 배에 준비해 두지 않은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매일 만선은 아니더라도, 당신이 근해든 원해든 자유롭게 목표 지점을 설정해, 계속 물고기를 잡았다면, 당신의 배에는 사용 빈도와 상관없이 필요한 물품이 기본 수량 이상은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2~3일 정도는 견딜 물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80일이 넘도록 고기를 잡지 못했던 당신에게 '오늘'은 단지 85일째 날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배를 움직일 기본적인 도구와, 한나절 정도 바다 위에 머물 정도의 물, 비상용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칼 한 자루를 들고나가면서도 전혀 염려가 되지 않은 것이다. 

나이가 많았지만, 이틀 간격으로라도 고기를 잡았다면, 당신의 체력과 근력은, 과거 8시간 이상 걸린 팔씨름을 견딘 정도는 아니더라도, 꾸준한 관리로 왼손에 쥐가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무모했던 점은,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물고기가 배를 원해로 끌고 가는 상황에 승부욕을 발동했다는 것이다. 한방으로 지난 손실을 만회해 보겠다는, 실패하는 이들의 습관을 당신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낚시의 묘미는 밀당에 있다. 그리고 마지막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그 묵직한 손맛에 매력이 있음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밀당을 하기 전에, 배가 원해로 끌려 나가 육지의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기 전에 당신은 돌아왔어야 했다. 포인트를 확인하고 다시 준비를 갖추기 위해 돌아서야만 했다. 앞날을 알 수 없는 인간이고 그 포인트에서 다시 묵직한 놈이 걸릴지는 신만이 아는 상황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상대의 손을 붙잡고 견디며 관객들도 포기한 팔씨름에서 결국에는 승리를 거둔, 과거의 영화가 승부욕의 불씨로 남아 있었나 보다. 낚시꾼에게는 낚싯바늘과 튼튼한 낚싯줄, 그리고 작살과 작은 칼만 있으면 되긴 한다. 어떻게든 물고기를 낚아올릴 최소한의 준비는 된다. 그러나 산티아고여, 당신은 무수히 많은 날들을 낚시를 하며 지냈지만,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지금 투쟁하고 있는 물고기가 5.5 미터인지 550 센티미터인지도 모른다. 순수하게 육체의 능력만으로 낚시를 하고 경험에 따라 물고기가 있음을, 낚시의 순간이 도래했음을 아는 상황에서는 당신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손에 전해지는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안정되지 않은 생활에서 만난 큰 행운. 그 누구도 그 유혹에서 헤어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무모했다.  


더구나, 5.5 미터의 청새치를 끌어올려, 바다라면 당연히 어슬렁거릴 상어에 대비하지도 못할 규모의 어선이지 않았나. 당신이 식량으로 소비해버린 그 물고기 정도를 상정했을 때는 충분한 어선이었지만, 몇 십 년을 바다에서 생활한 어부도 모를, 저 깊은 바닷속 생물들이 소년이 가져다준 미끼를 물 것이라는 것을 상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을 툴툴거리며 털어놓고는 있지만, 청새치와의 승부에서 보여준 당신의 끈기에는 너무도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깊은 존경심과 찬사를 보낸다. 아무리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고, 미지의 일들이 일상처럼 다가오는 바다 위일지라도, 그럼으로 피어나는 수많은 잡념과 불안 속에서도, 혼잣말로 자신을 격려하며 결국엔 5.5 미터의 청새치를 잡아낸 당신은 너무도 위대하다. 결코 배울 수도, 훈련으로 단련할 수도 없는 그 끈기는 너무나 부러웠다. 그리고 청새치를 잡고 나서 당신이 취한 일련의 처리 방식 역시 너무나 능란해 보여, 나는 과연 내가 하는 일을 이렇게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라며 당신을 질투하기까지 했다. 10년을 해 온 일인데도, 매일 고생스럽다 느끼고, 해결 방법이 없다 느끼는 나 자신이 너무도 초라했다. 능숙해지는 것은, 은퇴 후 전혀 사용할 일이 없어 노후에 도움도 되지 않는 파워포인트 편집 기술뿐. 10년 동안 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들이 성공 지점에 도착하도록 컨설팅할 자신도 피어나지 않는 나에게 당신의 능숙함은 고개 숙임이 당연할 정도였다. 


준비 없이 길을 나선 당신에 대한 나의 안타까움과 연민, 그리고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당신에 대한 나의 질투와 반성은 소설을 읽고 나서 몇 시간이 지나도 그 잔향이 짙기만 하다.  

당신은 벌어지는 상황에 맞게, 이틀을 제대로 휴식도 없이 보낸 상황에서도,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해결책을 찾아냈다. 없는 것을 원망치 않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용기와 결단력에 한 번 더 박수를 보낸다. 마치 엘런 머스크의 과학적 사고를 보는 듯했다. 지금의 나는 이런 상황, 내가 이루려는 목표는 이것,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할 일은 이것이라는 체계적인 생각을, 하루를 꼬박 등으로 어깨로 청새치와 싸우면서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누구나 어떻게든 해낼 것이란 구전은 여기서는 가치가 없다. 이것은 부러워할 행동이다. 


나이를 잊은 목표 의식과 실행, 막다른 골목에서도 해결 방안을 생각해 내는 사고 능력, 마지막 수많은 상어가 달려들기 전까지 최선을 다한 투쟁, 모두 잃고 뼈만 배에 달고 집에 돌아와서는 현재를 인정하고 깊은 잠에 빠지는 현실감. 이 모든 장점에 책을 덮으며 난 당신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무도 쉽게 단념하고 너무도 쉽게 목표를 포기하며 너무도 간단히 쉬운 길을 선택한다. 그러는 사이 내가 세운 목표는 사라지고 현실에 치여 작아지고 초라해진 자신만을 끌어안고 있다. 그래서 당신을 부러워하는 모양이다. 이 소설을 이렇게 읽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겠지만, 책을 읽고 무엇을 느꼈는지는 나의 제공권 안이다. 난 이렇게 느끼고 이런 내용을 생각했으며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는 개선된 나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한 가지 더 부러워한 것은, 당신을 걱정하고 지쳐 있는 당신이 깨지 않게 나가 설탕과 우유가 듬뿍 든 커피를 타오고, 앞으로도 할아버지에게 낚시에 대해, 어부의 삶에 대해 배울 거라 외치는 소년의 존재이다. 80여 일을 빈 배로 돌아온 능력 없던 당신은, 결코 낙오자가 아니었다. 당신의 실패마저 자신이 배울 부분이라 외치는 소년을 나는 추가적으로 부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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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굿바이
이시다 이라 지음, 권남희 옮김 / 예문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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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있나? 금단의 대상을 좋아해 본 적이 있나? 사회적으로, 아니 가족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있나? 만난 적이 있나?


이 소설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The history of 좋아함’을 보여준다.


콜걸이 좋아져 버렸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왜 저 인간은 내가 싱글로 있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는가, 귀찮겠다는 생각은 못하나?


최근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30%를 넘었다. 이런 통계가 나온 지도 꽤 됐다. 사귈 수 있는 사람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 비록, 거실 겸 부엌에 방 하나, 화장실 하나라도 둘이 지내기엔 부족함이 없다. 식탁에도 의자는 2개 정도는 있을 것이니까.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가족 안에 있나? 사회 속에 있나? 아니, 이런 거창한 말 말고, ‘남의 눈’에 묶여 있나? 언제나 사랑의 원론 위를 밟고 있다는 듯 연기해야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사람은, 비록 나는 할 수 없어도, 선망의 대상이 된다. 당신은 선망을 하는 사람, 즉 그 타인인가?


우리는 도덕적 인간으로 살라는 강요를 받고 있다. 그래서 모두, 적어도 타인의 눈앞에서는, 도덕적 인간, 사회적 질서를 지키는 인간, 결코 소위 ‘인간의 틀’을 벗지 않는 인간으로 보이기 위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엔지니어형 인간처럼, 우직해서는 그럴 수 없다. 내 마음이 너무 쉽게 들키게 되니까.

매니저형 인간처럼, 눈치가 빨라야 부족한 정보를 메울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울화통이 터진다. 답답하다. 물론, 이런 감정의 주어가 ‘모든 사람’ 혹은 ‘대부분의 사람’은 아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이렇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정도라 여겨, 이렇게 사는 것을 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은 아름답고 고귀한 감정이라, 그 어떤 사랑이라도, 아니 여기서는 ‘좋아함’이라고 해야겠지만,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장난 아니게 많은데. 왜 그 사회의 틀은 그렇게도 쉽게 그 감정의 가치를 낮춰 헌신짝처럼 취급하나? 그래서 왜 숨기게 만드나?


누구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서 나온 행태를 존중받길 원한다. 아름답고 고귀한 감정이니까. 그러니 잘못이 아니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드러내지 않거나 사회의 틀에 맞겠다 싶을 때, ‘내 남자 혹은 여자 친구를 소개할게!’라고 말한다.

그러니 콜걸을 소개하려면 수백만 년은 걸리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직업으로 전환하고, 전환된 직업에 맞는 생활에 적응된 후, 몇 번의 테스트를 거쳐, 함께 길을 걷다 누굴 만나도 움츠려 듦이 없을 때.


그런데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세상엔 남자와 여자, 단둘만 존재하는 듯,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다.

당연하다. 사회적 틀을 겁내는 우리도(전부나 대부분이 아님) 밝히기 전에는 상대에게만 집중한다. 당연하지 않겠나?


그래서 수백만 년이 걸릴 우려가 보이면 고민하기 시작한다. 좋아함의 감정으로 터지려는 둑을 받쳐 본다. 물살이 잠잠해지고, 둑이 무너질 염려가 없어지면, 좋아하는 감정은 당당한 감정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일상의 어두운 면의 넓이는 확장된다.


사실, 이 책은 이런 고민을 할 사이도 없이 끝난다. 단편 소설들을 모아 놓은 소설집이다. 그리고, 각각의 에피소드가 막장 드라마가 주는, 깜짝깜짝 놀랄 일도 없다. 참 잔잔히 흘러 나아간다. 그리고 대상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새롭다’ 이상은 없다.

그리고 이야기의 진행 속도는 빠른 편이다. 마치, 오후 3시 혹은 4시, 카페 창밖에 보이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속도 정도.

마음도 편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고민을 사서 하고 있는 걸까? 


‘일본’ 소설이니까, 그래서 우리보다 자유로운 문화니까, 아니면 다른 문화니까 이런 스토리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버리긴 싫어서 일 것이다.

조금 더 자유롭고 싶어서였다. 기준이 남의 눈에 있지 않고 내 마음에 있길. 그래서 그 기준에 따라 액셀러레이터도 브레이크도 내 스스로 밟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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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라군 Black Lagoon 1
히로이 레이 지음, 김완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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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블랙라군 Black Lagoon'을 읽고


어쩌면 넌 머리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 속한 조직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보다 더. 견딘다는 것은 이기는 것보다 어려운 일. 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니까.


너는 현재 상황에서 해야 할 최적의 행동을 선택해 낼 수 있는 능력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네게 답답함을 느낀다.


답답함 #1.

왜 부장을 따라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았나? 자신을 배신한 존재가 회사뿐만은 아니었잖아. 그리고 블랙라군의 조직에서, 혹은 그 도시에서 넌 무엇을 본 것인가?


답답함 #2.

해적질도, 갱단의 추적도 경험이 없는 네가, 어떻게 그 위기들을 벗어날 수 있었던 거냐. 그 위기를 넘길 때마다 넌, 중공업 상사의 발길질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위기를 모면한 다음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무엇이 변한 것이냐?


답답함 #3.

카케야마 부장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 전혀 굽힘이 없이 전진하는, 각오 자체인 사람이다. 어떤 상황이든 해결해 나가며 상사 앞에서 절대 충성을 보이는 그는 각오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는 투철한 각오도 없이 현실 속에서 용케도 살아내고 있다. 인생에 각오는 필요 없는 것인가? 지금을 넘기고 숨 한 번 돌리면 족한가? 시원한 맥주 한 잔이면 내일의 태양에 다시 희망을 설 수 있어서인가?


답답함 #4.

레비의 이지매를 잘도 견뎌내고 있구나. 상사의 이지매를 견뎌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아! 레비에게는 대들어 상황을 전환하던데, 그 때는 무슨 용기인가? 막판에 몰린 짐승의 마지막 고양이 깨물기인가?


답답함 #5.


스페인어 통역도 가능하고, 그 말이 루마니아어인지도 기억 속에서 찾아낼 뿐만 아니라, 라군 조직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기지까지 부리는 너는, 왜 거기에 있는 것인가? 오히려 대기업에서 그런 태도로 살았다면, 상사에게 엉덩이를 차이진 않았을 것이고, 카케야마 부장처럼 승승장구 했을 텐데. 지금의 환경에서는 되고, 예전 환경에서는 불가능했나?


P.S.

나아갈 각오로 전진하는 자가 지킬 규칙은 하나,

견딜 각오를 한 자가 지킬 규칙은 수만 가지.


*새가슴을 감안하면, 30금 정도 되니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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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현진 옮김 / 한길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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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은 뭐. 하루하루 별일 없이 사는 거지’라는 마음이 이미 당신을 채우고 있나? 참 부족하다.

‘너는 왜 그러니! 이렇게 하면 되잖아’라는 어머니나 누나나 형이나 아버지나 혹은 타인에게서 조차 이런 말을 듣고 살고 있나? 참 부족하다.


그러나 ‘부족하다’는 말은, 어떤 기준을 충족하는지를 따져 나온 결과일 뿐이다. 타인의 기준에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내 기준이 아니다. 내 삶의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 그런데 마음이 상하고 있다. 타인들의 에누리 없는 판단에 내 단련되지 않은 마음은 무수한 생채기와 긁힘에 피가 맺히고 있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눈만 마주치면 잔소리를 해대는 것에다가, 매번 ‘조언’의 내용이 바뀐다. 그런 일을 꽤 오랫동안 겪다 보면, ‘아, 난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구나’라는 ‘타인이 내린 정의’가 내 동일성(identity)가 되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시오노 나나미 선생이 ‘남자에게’ 할 말씀이 있으셨나 보다. 아, 남자여. 채울 부분이 많은 그릇이여.


혹시, 혼자 하는 일 중에, 누군가의 방해가 없다면, 즐거움을 느끼고 집중하는 일이 있나? 없을 리가 없다. 누구나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을 한 가지 이상은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다. ‘난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지구 상에 사는 어떤 인간도 ‘아무것도 없는’ 인간은 없다.


자, 적어도 하나의 희망을 발견했으니 출발한 발판을 하나 찾았다. 그럼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지?


여기서 겁을 먹진 말길 바란다. ‘아직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앞으로 나갈 수 있어!’라고 말하지 말란 말이다. 전진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 지금보다 더 나안 자기를 찾는 여행을 출발했다는 말이니까, 이미 당신은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속도는 눈에 띌 정도는 아니니 안심하길 바란다.


National Geographic에서 호랑이나 사자가 사냥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찾아보기 바란다. ‘이게 뭐!’라는 생각으로 보지 말길 바란다.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이 Documentary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자나 호랑이가 사냥을 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집중력을 흩트리지 않는 점을 목격하는 것이다. 주위 풀들이 얼굴을 찔러도, 작은 잔가지들이 있어도 그들은 목표를 포획하여 완전히 무기력해질 때까지 집중력을 놓지 않는다. 우리의 전진 속도를 높이는데 필요한 연료는 이 집중력이다. 그렇다고 전진의 노선을 집중력을 키우는 훈련 코스로는 돌리지 않을 것이다. 집중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나태해지기 시작할 때, ‘집중해야 해!’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이다. 집중력을 높이는 훈련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강좌들을 돈이 있다면,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에 투자하길 바란다.


여기서, 사자와 호랑이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사자는 무리 생활을 한다. 그래서 사냥이라는 직업적 능력 외에, 리더십이란 능력이 필요하다. 모든 사자가 다 무리를 이끄는 것은 아니다. 그 세계에도 일인자에게 도전해 승리를 통해야 리더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사자’라는 존재에겐 이 2 가지 능력이 필요하다 전제한다. 나머지는 부수적인 재능이다.

호랑이는 어떤가? 이 혼밥족에게 필요한 능력은, 사냥이란 직업적 능력 외에, 영역 보존이라는 능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존재를 강한 힘으로 퇴치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나머지는 부수적인 재능이다.

사자와 호랑이는, 각자 가진 이 2가지 능력으로 부족하다는 평가는 받지 않는다. 타인이 시선을 부수적이고 부족한 재능에 눈 돌릴 기회조차 없다. 그 앞에서는 얼어붙어 버리니까. 


그럼 당신에게, 부족하다는 판단을 생기지 않게 할 재능은 무엇인가? 타인이 당신 앞에서 얼어붙어버리게 할 압도적 재능은 무엇인가?


여기서 가상의 시나리오를 살펴보자. 당신에겐 기자 경력이 있다. 짧던 길던, 글을 써서 먹고산 경험이 있다. 지금은 다른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그곳에서 프로젝트 하나를 성공시켜 홍보부 요청으로 보도자료 초안을 쓰게 됐다. 결과는 난리였다. 군더더기 없는 storyline, 깔끔하게 핵심을 요약한 문장. 팀원들이 성공 회식자리에서 대단하다며 집중된 시선을 당신에게 보낸다. 여기에 홍보실이 거들길, 지금까지 보도자료 초안을 여러 팀에서 받았지만, 이번 건은 수정 없이 그대로 매체에 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심드렁하다. 

글을 써서, 급여를 받고, 그 글이 매체에 실려 사회로 공개되었던 경력이 있다는 것은, 즉 글을 써서 먹고살았다는 것은, 일반인(이런 경험이 없는 이들)에 비해 글을 잘 쓴다는 것이다. 비록 글쟁이의 세계에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다른 세계에 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Documentary를 통해 사자와 호랑이의 집중력을 시각적으로 경험했다. 그리고 사자와 호랑이의 능력 혹은 재능에 대해 사고적 경험을 했다. 마지막으로 가상 시나리오를 통해, 소위 ‘잘하는 일’의 경험도 했다. 여기서 질문! 


지금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 그 직업에 필요한, 사자나 호랑이가 될 수 있는, 압도적 재능은 무엇인가? 그 재능 혹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식별해 내란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을 키우고 키우면, 아마도 아무도 당신에게 조언을 거두어드릴 것이다. 이제 한 사람 몫을 하는 당신에게 누가 뭐라 하겠나?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있는가? 전진의 동력은 집중력.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필요한 핵심 재능의 식별. 이 3가지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면, 전진의 속도가 서서히 눈에 띌 것이다. 그리고 사자와 호랑이, 하다못해 고양이가 쥐를 잡는 그 지고의 집중력을 발휘한다면, 당신은 압도적 재능을 보유한, ‘부족하지 않은’, 한 사람의 몫을 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시오노 선생도 자신의 의견을 책으로 피력하여, 남자들에게 아쉬움을 표시하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삶을, 그 살아감을 즐거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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