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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삼킨 소년
트렌트 돌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월
평점 :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우주를 삼킨 소년 | 다산책방
글. 트렌트 돌턴
다산책방에서 만난 굵직한 책들은 가히 인생책들이 많다. 내가 좋아하는 프레드릭 배크만의 책들도 모두 다산책방에서 만났고, 줄리언 반스의 책들도 마찬가지다. 출판사만 보고도 믿고 읽게 되는 책이 존재한다는것이 놀랍지만 역시 출판사의 안목은 대단한듯. 이번 책도 너무 좋다.
12살 엘리 벨.. 그의 시선으로 바라 본 세상은 심장이 터질듯 가혹했고, 아리고 슬펐다. 그의 주위엔 누구하나 멀쩡한 어른이 없다. 열심히 살고 싶었지만 마약중독자가 되어버린 엄마, 엘리의 엄마를 마약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자 마약에서 빠져나오게 한 구원자인 새아빠 라일, 큰 사고가 있었던 여섯 살 이후 말을 잃고 허공에다 글을 써대는 형, 종일 술과 담배에 절어있는 엄청난 독서광인 아빠, 그리고 악명 높은 전설의 탈옥수 70대 베이비시터 아서 슬림 할리데이... 엘리는 브리번즈 교외의 빈민가에서 평범하지 않은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는 시궁창같은 환경속에서도 비관하지 않는다. 베이비시터인 슬림 할아버지와의 한줄기 빛같은 시간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살인 전과가 있는 베이비시터와의 생활이 구원같은 시간이라니...슬림은 엘리가 아이의 몸을 하고 있지만 '어른'의 마음을 가졌다며 자신이 겪은 이야기들을 아이에게 풀어놓는다. 아주 세세하고, 디테일하게 낱낱이 수다를 떨듯이 말이다.. 12살 아이가 듣기엔 거북스러운 이야기들인데 과연 엘리는 남다르다. 듣고 받아치는 말들이 심상치 않다. 인생의 면모를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듯.. 아이의 입으로 어른의 말을 해대고, 말마다 거침없이 험한말까지 하고있는 엘리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역시 엘리 주위엔 인생의 빛이 되어줄 말을 건네는 사람은 슬림 할아버지 뿐이다. 그와의 대화를 읽고 읽고 있으면 나역시 조금은 갱생되는 느낌이랄까? 인생을 달관한 철학이 담겨있어 나역시 스스로에게 묻게되곤 했다.'나는 좋은 사람일까?'

책은 23개의 챕터로 되어있고 챕터가 지날때마다 조금씩 성장하는 엘리의 모습을 만날 수있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초반부에는 한 챕터가 끝날때마다 뒷이야기의 열쇠가 되어줄 메세지들을 하나씩 흘리며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러니 살짝 천천히 가는 느낌이 들어도 절대 게을리 읽으면 안된다. 탄력받아 쭉쭉 읽게 될 남은 뒷이야기들을 풀어줄 단서들이니까...이 가족에게 무슨일이 있었기에 형은 입을 닫았고, 엄마는 마약쟁이가 되었으며, 이런 빈민가에서 범죄와 마약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것일까? 똑똑한 형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허공에다 갈겨대는 예언같은 글들은 또 무슨 의미일까? '너의 마지막은 죽은 솔새', '소년 우주를 삼키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 진짜 인격이 드러난다지. 악이 살아 있고 선이 방종이 되는 세계, 정반대의 규범으로 굴러가는 밑바닥 세계에서, 진정한 선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말이야. 무슨 소린지 알아듣겠냐?" -p.124
마약과 범죄가 난무하는 빈민가에서도 살아남기위해 그들만의 방식으로 노력하는 이들은 있다. 엘리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방법이 쉽게 보고배운 마약관련 범죄라 갑갑함이 밀려왔다. 여기 작은마을엔 왜 이토록 수렁에 빠지는 일들이 자꾸 일어날까? 엘리에겐 상황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능력이있다. 그건 슬림 할아버지가 그당시 수감중인 갱단 두목 알렉스 버뮤데스에게 일상생활을 시시콜콜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편지를 쓰게 하며 시작된건지 원래 그런 능력이 있어서 그런 부탁을 받은건지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그즈음에 극대로 발현된다. 이 능력은 나중에 엘리가 기자가 되는데에 일조하게 된다. 여기서 또 놓칠수 없는 이름! 알렉스 버뮤데스~ 편지로 시작된 이들의 인연이 나중에 많은 부분 엘리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13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준 새아빠 라일이 헤로인 밀매 조직의 두목 타이터스 브로즈 일당에게 끌려간다. 그날은 타이터스의 부하 이완 크롤에게 엘리 자신의 행운의 손가락인 오른손 검지를 잃게 된 날이며, 교도소로 끌려간 엄마와 오랜이별이 시작된 날이며, 형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은 날이며, 라일 아저씨가 흔적도없이 사라진 날이다. 그렇게 한 가정이 파괴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유일한 보호자이자, 가슴 깊숙히 감춰둔 오랜 트라우마였던 주정뱅이 아빠에게 가야한다. 베이비시터인 슬림에게 자신을 거둬달라 부탁하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한다. 사실 법적 권한도 없을뿐더러 슬림 역시 온몸에 퍼진 암때문에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손가락을 잃은 그날 병원에서 슬림과 엘리의 대화에 몇번이나 울컥해서 가슴이 먹먹했다.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 난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나쁜 사람이기도 하지. 누구나 다 그래, 꼬마야. 우리 안에는 좋은 면도 나쁜 면도 조금씩 있거든. 항상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어려워.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안 그렇지." -p.223
"하지만 슬림 할아버지의 사연에서 가장 아픈 대목이 기사에 빠져 있더라고요."
"말해봐."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안에 있는 악당이 계속 할아버지의 계획을 방해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었지만, 좋은 면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가 한 번도 없었죠. 인생의 대부분을 교도소에서 보냈고, 교도소에서는 좋은 사람이 살아남기 힘들잖아요." -p.287
77세의 나이로 엘리의 정신적 지주였던 슬림 할아버지는 숨을 거둔다. 이제 소년은 분노와 복수로 자신을 다진다. 그리고 다짐한다. 암암리에 벌어지고 덮히는 이 모든 불합리한 범죄들을 기자가 되어 꼭 밝혀내겠다고..그리고 꼭 라일을 찾겠다고.. 슬림할아버지의 탈옥이야기들 듣고 자란 엘리는 슬림이 가르쳐준 타이밍, 계획, 운, 믿음, 계획세우기를 이행하며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순간 순간 슬림의 지혜를 빌려 단단해지고 있었다. 세월은 천천히 흘러 19세가 된 엘리. 물론 많~~~ 은 일들이 있었다. 서평으로 다 담지 못하는게 아쉬울 정도로 그의 인생에, 그의 가족의 삶에 순탄치 않은 일들은 계속해서 벌어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무수히 많은 아픔을 겪으며 돌고 돌아 그들은 다시 가족이란 이름으로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어쩔수 없이 크나큰 상처들을 줬지만 못지않은 사랑을 확인하며 끈끈하게 결속된다. 엘리는 꿈을 이루었고, 그렇게 찾아 해매던 라일의 흔적도 찾았고, 타이터스 브로즈와 이완 크롤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고, 비상한 두뇌로 <크리미널 엔터프라이즈> 범죄자들의 비밀 자선단체를 만든 형은 이제 더이상 허공에다 글을 휘갈기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광활한 우주를 삼킨 소년은 자신이 그토록 갈구하던 빅뱅을 맞이하게 되고 자신안에 꽉차 있던 가면을 쓴 트라우마를 벗어던져 버릴수 있었다.
지옥같은 상황들이 엘리를 극으로 몰아넣고만 있었다면 그가 꿈을 펼칠 수 있었을까? 그에겐 슬림할아버지가, 마약쟁이 엄마와 마약상인 새아빠가 술주정뱅이 아빠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형이 상처였고 트라우마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준 무한한 사랑덕분에 극복하고 자랄 수 있었다. 어릴적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에겐 폭력적이고 불행했던 유년시간을 견디게 해 준 뽀루뚜가 아저씨와 오렌지 나무 밍기뉴가 있었지만 그를 만날때면 늘 불편하고 마음 아팠다. 읽을때마다 꺼이꺼이 울었다. 하지만 엘리 벨은 다르다. 그의 곁엔 상처를 주지만 그를 오롯이 끌어안고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었다. 책을 읽는 초반에는 "안돼! 그러지마!" 샤우팅을 날릴만한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뭔가 신선한 재미가 있어서 어떤 부분에선 키득키득 웃게됐다. 깊은 감동은 얻었지만 울고 싶진 않았다. 엘리 벨.. 그는 끝까지 포기 하지 않고 끊임없이 좋은 사람이 되기위해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그리고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 라고...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쓴 주관적인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