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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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결심한 가난한 젊은 귀족 라파엘은  강물에 몸을 던지기 가장 좋은 때인 밤을 기다리다 한 골동품 상점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 주인이 건넨 자그마한 '나귀가죽' 조각을 받아든다. 그 우둘투둘한 표피 위에는 아랍어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원하라, 그러면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소망은 그대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대의 목숨이 여기 들어있다. 매번 그대가 원할 때마다 나도 줄어들고 그대의 살 날도 줄어들 것이다."

  

라파엘이 이 나귀가죽을 받음으로써 그의 자살은 연장되었다. 이제 그는 나귀가죽이 사라질 때까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으며 나귀가죽이 소멸되는 순간 비로소 죽을 것이다. 

삶을 포기한 자의 허탈한 심정으로 외쳐댄 이런저런 소망들이 거짓말처럼 차례로 이루어지고, 라파엘은 순식간에 600만 프랑이 넘는 유산을 상속받은 부자가 된다. 이제 라파엘은 살고 싶다. 그러나 삶을 향한 집착이 심해질수록 그는 세상에 고립되고, 오히려 삶과 멀어진다. 점점 줄어가는 나귀가죽을 붙잡기 위해 동물학, 기계역학, 화학, 의학 등 최신 과학의 힘을 빌어보고, 또 자연의 품에 숨어보기도 하며 살기 위해 발버둥쳐보지만 라파엘은 결국 나귀가죽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문학동네>를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된 발자크의 장편소설 나귀가죽(문학동네,2009)은 이처럼 나귀가죽이라는 기이한 물건이 발휘하는 신비한 능력을 통해 인간의 삶과 욕망, 그리고 죽음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나귀가죽은 욕망이다. 부를 원하면 돈을, 사랑을 원하면 여자를 내어준다. 또한 나귀가죽은 죽음이다. 욕망을 채워준 댓가로 이 요망한 물건은 주인의 목숨을 가차없이 소진시킨다.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그 작은 조각 앞에 라파엘은 무너지고, 결국 나귀가죽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세상은 우리에게 생명을 내어주고는 어서 삶을 살아내라고 부추긴다. 그렇지만 삶을 향한 질주의 끝은 죽음이다. 이렇듯 삶과 죽음 사이를 질주하게 만드는 힘, 바로 욕망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 더 사랑하고, 더 행복하고 싶은 우리의 하루하루는 원(願)함과 행(行)함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바람 없이는 삶이 지속될 수가 없다. 식욕도 수면욕도 없는 사람은 죽을 것이요, 성욕 없이는 자손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삶을 향한 건강한 욕망들은 우리를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든다. 그러나 과도한 욕망은 정신을 피폐하게 하고 의식을 흐려놓아 저 라파엘의 경우처럼 소중한 삶을 무의미하게 앗아갈 뿐이다.

  

라파엘처럼 나귀가죽을 손에 꼭 쥐고 있지 않아도, 우리 안의 나귀가죽은 이미 작동되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추구하는 소망들이 과연 삶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불필요한 탐욕을 뒤쫓느라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은 우리에게 자신의 나귀가죽 조각을 유심히 들여다 볼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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