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난무하는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하나님과의 동행 이야기, 읽기 전 저자의 삶을 들었기에 '그렇겠지'하고 읽는데 한장, 한문장, 삶의 지혜와 깊이가 가득하여 책장을 넘기는 것이 아쉬웠다. 저자의주님과의 거룩을 향한 연합의 열망이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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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워드 : 여성, 강간, 왜곡된 부부,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삶,

 

스타 포스노 배우 러브레이스의의 보습과 이면에 보이지 않는 남편이라는 자의 폭력과 강간, 성매매를 보여주는 고발적인 영화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인물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깝고 혐오적이다.

 앙드레 지드의 소설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인간의 회복을 주셨지만 사람의 시선과 조직이나 규율이 그것을 왜곡시킨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의 모습이 그렇다. 러브레이스는 자신의 삶이 있고 행복과 존엄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고 중요한데 어머니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남편에게 복종해야하는 규범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이 우선이다. 이러한 왜곡된 기독교인의 모습, 지금도 우리 주변에 있음으로 맘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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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 회복, 치유, 공동체, 가족

왜 태어났을까에서

너 참 잘 태어났다로

 우리 모두가 듣고 싶은 말

 맞추어 살아가야할 말...

 

영화를 보고 집에와서 조두순 사건을 찾아봤다.

이토록 살인적인 잔인한,

 범죄의 장소 또한 이럴수가...

 

 영화는 잔인한 사건을 묘사하지 않는다.

 회복을 향한 부모의 마음을, 이웃의 마음을 따뜻하게 그려서

 마음이 그득해지게 한다.

책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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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면 하는 풍성한 추석에 걸쳐 이 소설을 읽었는데 소설의 사실성이 저의 주변을 온통 덮는 듯하였고 머릿속이 무거웠습니다.

길을 가면서도 생각나서 눈을 감고 걸어가게 되고 차려진 먹거리 앞에서도 또 생각나고 운전을 하면서도 ‘만약 갑자기 눈이 멀게 된다면’ 상상에 아찔한 마음이 들게 되고, 한동안 이 소설에 사로잡히게 되는 공지영의 도가니이후의 현상이었다.

 

소설의 상황은 끔찍하고 전염으로 눈이 멀게 된다는 것은 더욱 두렵고 사실적이게 느껴졌다. 소설속의 대부분의 가치없는 아무 의미 없는 눈먼자 한사람이 바로 나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그나마 안정적(다른 감정에 비해 잘 견디고 변치 않을 것 같은)이라고 여겨지는 가족애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고 인류애는 나에게 있어서 눈꼽 만큼 흔적조차 보이지 않도록 극한 상황에서 나를 날려버렸다.

그의 가족은 공황 빠져, 그에게 다가가는 곳조차 두려워할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 자식의 사랑, 그런 것은 이미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집에 있었다 해도 나는 아마 이곳에서 받는 것과 비슷환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가족은 나를 방에 가두어두었을 것이고 운이 좋다면 문 밖에 음식 접시를 갖다놓았을 것이다.

소설은 나를 직시하게 하였고 아는 척, 있는 척하는 모든 것들이 벗겨진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는 것들은 진정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나는 단지 아무것도 아닌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닌 유한한 하나의 점일 뿐이다.

 

의사의 아내는 모두가 눈먼 도시에서 한 병동의 사람을 이끄는 인물이었는데, 이 의사의 아내에게서 어느 전기 못지않는 업적도 보았고 한계도 볼 수 있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지며 자신을 지키고 남편을 지키고 그리고 한 병동의 사람을 삶으로 이끌어는 업적에서 과연 누가 저렇게 할수 있을까? 눈을 떳다고 해서 쉽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마음,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쓴다고 해도 상황이 참옥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그 눈 뜬 것으로 인해 옆의 사람은 선택되지 못하는 상황은 읽는 자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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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세계의 절반, 50%가 굶주리는 원인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정치 부패, 시장가격 조작, 인종의 갈등과 토착자원 독점 욕망, 국제기업의 외부 세력 개입등으로 일어나는 전쟁, 집중재배시스템을 야기하는 식민지 정책, 국제 테러, 다국적 기업의 횡포 등, 이 부분은 주워들은 이야기들로 희미하게 정리되지 않았지만 이 책을 통하여 딱딱하지 않게 정리하며 알게 되었다.

또한 이 기아문제와 관련된 무제한의 이윤추구를 향하고 있는 금융자본과 신자유주의의 심각성에 대한 이해를 주고 있다. 자유로운 세계 시장에 맡기면 진정으로 공평한 사회가 실현된다는 신자유주의는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다름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미국, 영국 등 강대국들을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고 지칭하며 이들은 한때 신자유주의의 신봉론자였지만 이제 신자유주의는 현실에 맞지 않는 이론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선진국들은 경쟁자가 또 나오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후진국들에게 신자유주의를 강요한다”

그런데 이런 기아의 상황을 지지하고 있는 논리가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토머스 맬서스의 논리, 질병과 배고픔은 이사회의 필수적인 기능을 한다. 지구상의 인구를 줄여주는 자연적인 수단이라는 논리가 오늘날 우리의 심리적 기능을 충족시키고 상황을 외면시키는 지지기반이 된다는 것에 충격을 가한다.

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석, 그리고 어리석은 논리에 이끌려가지 않는 냉철한 판단이 너무 필요하고 그러한 힘을 우리는 아이들과 우리세대에 키워가야 할 필요가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럼 기아에 허덕이는 세계의 절반의 반대편의 절반에 속한 나에게 이책은 묻고 있고 촉구한다. 친절한 아버지의 태도로 기아의 현상을 다국적 기업과 약탈하는 군부, 금융자본, 시카고 곡물거래소 등의 어두운 모습을 조목조목 설명하지만 “소수가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대가로 다수가 절망하고 배고픈 세계는 존속할 희망과 의미가 없는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세계”라고 어조로 우리의 책임을 묻고 호소하고 있다.

나는 세계의 절반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가?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형태와 태도가 바로 반대쪽 절반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기아의 상황에 일조하고 있다면?

‘박원순의 아름다운 가치사전에서 정의는 각자 누릴 수 있는 몫을 제대로 누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반대의 절반은 자기의 몫을 나누어야 하며 제대로 몫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볼 때 나는 우리는 책임이 없다고 손 씻는 빌라도의 변명으로 문제를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각자가 누릴 수 있는 몫을 제대로 누리는 공정한 정의의 사회에서 절반의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과 가치에 대해 공정한 누림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배부른 절반의 사람은 각자의 몫 이상을 누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으로 여겨졌다.

 

저자의 마지막으로 전 지구적인 민간단체의 참여과 적극적인 행동을 강조한다. “사회 운동, 비정부조직, 노조들의 세계적인 연대만이 ‘워싱턴 합의(1970-1990년 윌스트리트의 은행가들과 미 재무부 및 국제 금융조직 사이에 맺어진 비공식적 신사협정으로 민영화, 규제철폐, 거시 경제 안정, 예산 감축의 제가지 원칙을 내용으로 한다.)’와 인권 사이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고 기아와의 투쟁은 이런 대립을 끝낼 수 있는가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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