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 감동 휴먼 다큐 '울지마 톤즈' 주인공 이태석 신부의 아프리카 이야기, 증보판
이태석 지음 / 생활성서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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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종교가 생긴다면, 내가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믿음이 충만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아프리카라는 머나먼 오지의 땅을 찾아 자신을 희생한 채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삶이지만, 나에게는 그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종교관이 더욱 경이롭다.종교,종파를 떠나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기에 급급한 현실에서 이태석 신부의 삶은 진정한 성직자의 길을 조명해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세가 보장된 의사의직업을  포기한 채 성직자의 길을 택한 사람. 성직자로서의 고귀한 삷보다는 이웃의 아픔을 먼저 보듬어주고자 했던 사람. 우연히 찿은 아프리카 수단이라는 버림받은 땅을 끝내 떠나지 못한 사람. 그가 보여준 사랑은 어떠한 교리보다 진실되고 아름답다. 그가 행한 작은 행동 하나하나는  이 세상 어떤 위대한 성직자의 훌륭한 글과 말보다 진실되다.  헐벗고 아파하는 이웃들앞에  의사와 신부라는 신분의 옷을 벗어 던진채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출수 있는 그는 이 시대가 필요로하는 진정한 성직자의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수단이라는 고통의 땅에 도착한 이태석 신부는 선교활동을 위해 그럴듯한 교회를 먼저 짓지 않았다. 고통받는 그들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신앙도 교회도 아닌 따뜻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그럴듯한 집보다는  자신이 사랑했던 이웃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사랑을 실천하기를 더욱 원하셨을 것이다. " 교회가 가난한 이웃의 모습으로 숨어 계시는 예수님을 외면한 채, 그분이 누우실 구유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본문 22쪽] 거대한 외형이 신앙의 척도인 듯 몸집 부풀리기에만 급급해져가는 현실의 종교인들은 반드시 가슴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쏟아질듯한 밤하늘의 별과 ,손만 대면 금방 톡 하고 터질 듯 한 투명하고 순수한  아이들의 눈망울이 인상적이라는 수단. 이태석 신부의 마음을 붙잡은 것은 아마도 밝게 빛나는 별들을 잊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받는것에 인색한 사람은 주는 것에도 인색한 법이다. 하지만 수단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받아본적도 없고 베풀어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가진것이 없었던 사람들이기에 무엇인가를 배푼다는 개념조차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한 없이 배푼 사람.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낯선 사람은 그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자신들을 위해 모든것을 주는 사람을 위해 드디어 그들도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된 것이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생명의 존엄성이 많이 훼손된 그들. 전쟁,질병,가난으로 인해 무수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은 사치일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태석 신부는 그들에게 희망을 선물했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의술과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음악으로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것이다.사제라는 그의 신분은 그 다음이었다. 선교를 최우선으로 내세웠다면 수단에서의 그의 삶은 결코 평탄치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가 걸어왔던 길이 결코 수월했다는 말은 아니다. 종교를 앞세우기 보다 인간으로서의 따뜻함을 앞세웠기에 그는 모든 것을 이룰수 있었다. 물론 이태석 신부의 마음속에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는 수단이라는 척박한 땅에 새싹을 돋게 하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타인을 돌보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자칫 자신에게 소홀한 법이다. 수많은 질병으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지만, 그 역시 사람이었다. 휴가차 잠시 들린 한국에서 암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선고를 받은 그는 끝내 수단의 밝게 빛내는 별들을 다시 볼수 없게 되었다. 툰즈의 눈물을 닦아주기위해 하루하루 충만한 삶을 살았던 그 또한 영원히 지지 않을 별이 되고 말았다. 어찌 꽃이 졌다고 그를 잊을수 있을까? 비록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수단의 많은 별들과 이땅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한순간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평상시 그토록 갈구했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 이태석 신부. 나는 그에게 슈바이처의 환생이라는 말 보다는  하나님의 또다른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우리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머나먼 나라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만든 그의 뜻을 따라 우리는 항상 더불어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디에선가 지켜보고 있을 고인의 뜻을 가슴속 깊이 간직해야 할 것이다.

가진 것 하나를 열로 나누면 우리가 가진 것이 십 분의 일로 줄어드는 속세의 수학과는 달리 가진 것 하나를 열로 나누었기에 그것이 '천'이나 '만'으로 부푼다는 하늘 나라의 참된 수학, 끊임없는 나눔만이 행복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행복 정석을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본문 85쪽]

많은 사람들이 많은 재물의 주인이 되기만을 원할 뿐 자기 행동의 주인이 되기를 꺼려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우리 행동의 참주인이 된다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하지 않을까 싶다. 재물을 조금만 덜 챙기고 이웃을 조금만 더 챙겨 주려고 노력하다 보면 행동의 참주인이 되지 않을까.... [본문 178쪽]

우리의 삶에 향기를 만들어야 한다. 후각만 자극하는 향기가 아닌 사람들의 존재에 그리고 그들 삶의 원소적 배열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자석 같은 향기 말이다 [본문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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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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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를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반드시 천 개의 찬란한 태양도 읽을 것이라고. '연을 쫓는 아이'의 감동을 느낀 사람은 할레드 호세이니의 또다른 작품을 결코 외면할 수 없다. 어느덧 그에게 중독되어 가는 듯 하다. 비록 두 편의 작품이었지만, 그 의 작품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가 꽤나 가깝게 느껴졌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머나먼 나라 아프가니스탄. 지구촌에서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중의 하나인 그들의 삶에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할레드 호세이니와의 만남은 꽤 성공적이었다.

 

'연을 쫓는 아이'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두 남자의 우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작품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여자의 이야기다.  여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오랜시간 전쟁의 아픔속에 빠져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아이들과 여자다. 어쩔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에서 여자의 운명은 더 아플 수 밖에 없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애증인지 모를 두 여인 마리암과 라일라의 관계는 책을 읽는 내내 가슴속에 커다란 덩어리로 자리잡았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이었다. 불행한 운명에 어쩔수 없이 무릎꿇고 살아가야 하는 그 들의 삶은 그릇된 역사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하다. 전쟁,탐욕,남자,잘못된 관습은 모두 가해자 이다. 두 여인의 삶에 불행이라는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그들은 모두 공범이다. 

 

한 여인. 그녀의 이름은 마리암이다. 사생아라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여인. 엄격히 말하면 그 녀는 사생아는 아니다. 재력가인 아버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정식적인 아내로써의 자격을 갖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마리암또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버지와 그의 부인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상류층의 부를 만끽할 수 있었지만, 마리암과 그녀의 어머니는 결코 그들의 부와 안락을 넘볼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고아가 되버린 마리암은 아버지를 찾아 가지만 결코 아버지의 선택을 받을수가 없다. 그의 부인들은 마리암을 머나먼 도시 카블로 쫓아낸다. 결혼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을 하지만 아직까지 소녀인 마리암에게 결혼은 받아들일수 없는 유배와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불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 여인. 그녀의 이름은 라일라이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여인. 교사인 아버지는 그녀를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 키우고자 했다. 여자도 교육을 받아야 하며 , 남자와 똑같이 자신만의 삶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쟁은 그녀에게서 따뜻한 가족과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부모의 죽음과 연인 타리크와의 이별. 그녀에게 남은 것은 지친 영혼과 죽어가는 육신뿐이었다. 허물어져 가는 가녀린 소녀에게 마수가 뻗친다. 마리암의 남편이자 라일라의 이웃이었던 라시드에 의해 그녀는 또 한번의 삶을 살게 된다. 마리암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얻지 못한 라시드는 라일라를 통해 자신의 아이를 얻고자 한것이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과 남자의 그릇된 탐욕이 또다른 불행을 만들게 된다.그녀의 불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상한 동거가 시작된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엄마와 딸같은 나이차가 나지만 엄연히 똑같은 남자의 부인이 된 것이다. 라시드라는 거대한 폭력앞에 그들은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다. 라일라를 바라보는 마리암의 시선이 고울수가 없다. 그건 질투일수도 있고 편견일수도 있고 저주일수도 있다. 라일라 또한 마리암을 편하게 대하지 못한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일수도 있고, 같은 여인으로써 느끼는 경쟁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 들의 적은 라시드로 대표되는 폭력과 그릇된 관습이었다. 머지않아 그들은 불편한 관계에서 돈독한 관계로 발전한다. 같은 여인이자 , 한 남자의 부인이자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자매같기도 하고 모녀같기도 한 그녀들의 관계는 평범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위태로운 관계로 발전되어갔다. 그 사이에는 라일라와 라시드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아지자가 있었다. 자신의 아이가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것을 알게된 라시드는 두 여인에게 모진 폭력을 행사한다. 그 사이에서 갓 태어난 아이 아지자또한 자유로울수 없었다. 무서운 폭력은 세 여인을 하나의 끈으로 연결하는 운명적인 결속력을 가지게 했다. 그들은 자신이 살기위해 서로를 아꼈다. 똑같은 불행을 당하고 있는 그들은 더이상 적이 아닌 진정한 가족이 되어 있었다. 아프간에서 여인으로 살아가는 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거나 아니면 죽은척 해야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슬픈 운명이었다.

 

세월은 흘러 아프간에 많은 변화가 생긴다. 소련이 물러가고 탈레반 정권이 들어섰지만 그들의 삶에 변화는 없었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등장또한 그들에게는 희망이 아닌 또 다른 절망이었다. 아프간의 역사와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한, 그들의 삶에 끼어드는 모든 이들은 침입자 이다. 어떠한 명목이든 간에 그 들의 삶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모두 틈입자일수밖에 없다. 그건이 아프간이 처한 현실이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아프간 여인들의 운명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자연히 모든 사람들이 나이를 먹게 되었다. 고달픈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아니 오로지 살기 위해 아프간을 떠나려고 했던 두 여인의 몸부림은 현실의 아픔만을 더욱 깨닫게 해주고 만다. 전쟁중에 들려온 또 하나의 비보. 라일라의 마음속 연인 타리크의 죽음은 짙은 먹구름 사이로 약하게 비추던 손바닥 만한 햇살마저 감추어 버리고 만다. 이제 그녀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편하게 죽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살기위해 태어난 세상에서 죽기위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삶은 비루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

 

라일라에게 또 다른 삶이 시작된다. 그녀가 그토록 경멸하던 남편 라시드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임신 사실을 알게된 라일라는 순간 고민을 한다. 과연 이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인가? 저주받은 아이를 그녀는 과연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인가? 고통으로 점철 된 아프간에서 또 다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아이가 딸로 태어나 자신보다 더 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여인이라면....... 하지만 그녀는 여자 이기에 앞서 엄마였다. 저주 받은 씨앗을 잉태한 어미였지만 그녀는 또다른 생명을 기꺼이 세상에 내 보냈다. 그리고 , 아들이었다. 다행이도..  아들의 출현은 세여인에게 새로운 새로운 운명의 시작이었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여성들은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것이 자식의 아내이고 딸이더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시드는 그의 딸 아지자를 고아원으로 보낸다. 전쟁이라는 힘든 현실에서 여자라는 이름은 단지 소모적일 뿐이다. 세 여인은 어쩔수 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그들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비극일뿐이다.

 

어느 날 라일라에게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희망이 아닌 더 큰 좌절일 수도 있었다. 죽은줄만 알았던 오래된 연인  타리크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모든것이 탐욕스러운 라시드의 계략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제 운명은 걷잡을수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그 속에 마리암과 라일라 그리고 라시드가 뒤엉켜 있게 된다. 그들의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은 과연 어떻게 변할것인가?..

 

오랜시간이 흘렀다. 마리암은 이제 더이상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 라일라는 꿈에 그리던 자신의 연인 티라크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자신의 두 아이와함께 보낸 파키스탄에서의 삶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삶이다. 아마도 그것은 행복이라 불리는 낯설음이었다.  모든것이 평온하고 즐겁기만한 그들의 삶. 평생을 살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들의 평온을 깨고 라일라는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바로 자신의 고향 카블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까지 그 곳은 자신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비단 자신만의 상처가 아닌 많은 이들의 고통이 숨쉬고 있는 곳이다. 자신의 부모,형제를 비롯해 그 누구와도 바꿀수 없는 마리암이 묻혀있는 곳이었다. 라일라 가족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길을 되짚어 가게 된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자 애증이었다.

 

마리암의 아버지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그것은 아버지로써 딸에대한 뼈져린 사랑의 눈물일수도 있고, 남성으로써 아프간의 모든 여성들에게 바치는 참회의 눈물일수도 있다.그도 그저 평범한 아버지였다. 그도 그저 어쩔수 없는 남자에 불과했다. 한번쯤은 서로가 보듬은채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운명은 그들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움은 그저 가슴 한쪽에 한켜한켜 쌓여만 갈뿐 서로에게 보여준것은 미움과 갈등뿐이었다. 그것이 . 아프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현실이었다.

 

저자는 다시 돌아온 라일라를 통해 아프간의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했다.그들의 삶이 결코 화려하지는 않지만 더이상 비참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했다. 어쩌면 더 힘들고 지쳐 쓰러질 지언정 자신의 삶에 무릎꿇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강인한 의지의 표명일수도 있다.

자신의 안락을 위해  많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겠다는  강인한 의지 일수도 있다. 자칫 존재감 조차 잊혀질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삶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이라는 이름으로 선물한 작가에게 고개숙여 감사하고 싶다.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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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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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철재 캐비닛.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80,90년대 동사무소를 풍미했던 바로 그 철재 캐비닛이다. 사람 키만한 높이에 우로 몇 벗,좌로 몇 벗 다이얼을 돌려서 문을 열수 있는 바로 그 캐비닛이다.  작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캐비닛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철재 캐비닛 .. 너무도 흔하기에 그 것으로 무슨 글을 만들어 낼지 궁금하다. 궁금하다면 캐비닛을 열어 보면 된다. 지금 당장... 다행히 우리는 캐비닛의 비밀번호를 몰라도 된다. 작가가 친절히 문을 열어주며 환영의 몸 짓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캐비닛 중에서도 13호 캐비닛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단지 13번 째에 위치한 캐비닛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평범하다 못해 이젠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 버린 캐비닛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외관과는 다르게 그 안에는 정말 특이한 것들이 들어있다. 아니다. 어쩌면 기대 했던 대로 전혀 쓸모없는 어처구니들로 가득차 있을지도 모른다. 오래된 캐비닛 답게 그 안에는 낡은 자료들로 가득차 있다. 하나하나의 파일을 열어보기로 하자. '세상엔 이런일이' , '믿거나 말거나' 와 같은 인기 프로그램의 대본이 들어있다. 그렇다. 그건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텔레비젼 프로그램의 대본이라고 하기에 적합하다.  강철을 씹어 먹는 사람. 손에서 소나무가 자라라는 사람. 혀밑에 아주 작은 도마뱀을 키우고 있는 사람. 갑자기 시간을 잃어버리는 사람. 암수한몸의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양이로 변신하고자 하는 사람 등등...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있게 지켜봐야 할 것이 있다. 캐비닛이 위치해 있는 곳은 정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연구소라는 것이다. 그 캐비닛의 주인은 당당히 연구소 직원인 권박사라는 인물이다. 40년간 캐비닛에 들어갈 자료를 모으고 연구한 인물. 권박사는 믿거나 말거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심토머라는 전문용어를 부여했다. '심토머'..... (궁금하다면 영어사전을 찿아보던지 백과사전을 찿아보던지 네이버에게 물어보면 된다.)   

 

작가는 심토머들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은 채 장광하게 늘어놓고 있다.전문용어로 구라가 정말 심하다. 작가도 인정했다. 자신의 글은 구라이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이건 구라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강철을 씹어 먹는 사람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그런데, 입속에 도마뱀을 키우고 손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상상도 할 수 가 없는 일이다.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형식은 단편같기도 하고 연작소설 같기도 하다. 각각의 꼭지에 여러 심토머들의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펼쳐진다. 물론 주인공은 존재한다. 하필이면 공대리라는 인물이다. 웬지 공수표에 공갈만 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주인공은 그 저 심토머들을 지켜보는 사람에 불과하다. 넌지시 지켜보고 그 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보관한다. 그들의 진위에 대해서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정말 다행이다. 그 사람까지 심토모에 대해 심취했다면 이 소설은 아마도 개판이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타고난 이야기 꾼 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상상을 초월하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중간 중간 터져나오는 엉뚱한 대사는 포복절도는 아니더라도 지하철에서 눈총을 받을 만큼의 웃음을 유발한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의 나열은 결국은 한 곳으로 모이는 당연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첩보 와 스릴러를 연상시키는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심토머에 비하면 상대도 되지 않는다. 책을 읽을수록 작가의 정신세계가 궁금해 졌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런의문을 가지면 책을 읽다 문득 정말 어이없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13호 캐비닛의 한 쪽 구석에 쳐박혀 있던 낡은 파일에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의 얼굴이 기록되어 있었다. 먼지를 툭툭 털고 유심히 쳐다봤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그 인물은 바로 나였다.......... 그렇다. 심토머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강철을 씹어 먹지도 못하고 몸속에 소나무를 키우지도 못하며, 굳이 도마뱀을 키우고 싶다면 입속이 아닌 집안 한 구석에 고이 모셔놓고 키워야 하는 평범한 우리들이 이야기다. 갑자기 몇시간 혹은 몇일, 몇달이라는 시간을 잃어 버리는 타임스키퍼는 항상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생각으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 였다. 고로 우리는 심토머들이고 , 심토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우리들이었다. 그런이유로 아직까지 '세상에 이런일이'에는 심토머들의 이야기가 방송되지 않는 것이다.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3호 캐비닛 속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온 사람들. 그들은 鐵人인가?  아니면 哲人인가? 아마도 凡人이 아닐까?

독특하고 재미있는 책이었다. 벌써부터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설계자들이 궁금해 진다. 캐비닛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잔인한 킬러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진행될까? 아니면, 또다른 심토머들의 이야기일까? 다음 주가 되면 그 궁금증이 해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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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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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택시기사로 유명한 홍세화씨가 오랜만에 펴낸 책의 부제이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는 엄연히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그런 삭막한 현실에서 과연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홍세화씨는 이 시대의 젊은 이들에게 생각의 주인으로 살아갈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좌표는 과연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또한 나는 얼만큼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지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참 힘든 시간이었다.

 

홍세화씨의 책은 변함이 없다. [나는 파리의 택시 운자사],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와 같은 작품에서 보여준 거침없는 논리는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결코 무뎌지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홍세화씨를 보고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다고 말할수도 있다. 언제까지나 똘레랑스 와 오블리스 노블리제만을 외치는 도대체가 우리 사회에는 적합하지 않는 허황된 이야기만 하고 있다고 말할수도 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선진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논리로, 홍세화씨의 주장을 무시하고 있는것이다. 어쩌면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 소위 말하는 대한민국 1퍼센트의 힘이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욕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고 가장 큰 중추세력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들은 암묵적으로 그들의 생활을 부러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솔직한 주장처럼 원정출산이나 병역기피를 위한 국적포기는 능력 있는 사회귀족의 특권이다. 이 말에 우리의 속이 뒤틀릴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대한민국 1퍼센트의 힘"과 같은 말을 받아들였고 적어도 무의식으로는 그 1퍼센트의 능력을 선망해 왔다. 이 사회는 "대한민국 1퍼센트의 힘"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라는 말에 무감각한 사회다. 내명 지향이 아닌 타자 지향의 , 그리고 물질 중심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다. 사회귀족에겐 보여줄 능력이 있는 반면,우리에겐 없는 것 뿐이다. 다시말해,그들이 뻔뻔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지금 그들처럼 뻔뻔하지 않은 것은 단지 그들이 가진 능력이 내게 없기 때문이라는 점도 대부분의 경우 진실이다. 그들에겐 뻔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나에겐 그럴 능력이 없는 것뿐이다.  [본문 139쪽]

 

저자는 소위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가는 1퍼센트 안에 진입할 수 있는 누구보다도 유리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프랑스라는 낯선 땅에서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보내야 했고, 늦은 나이에 귀국한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1퍼센트의 소수 특권층에 맞서야 하는 소외계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항상 많이 생각하고 그런 자신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모습이 있기에 홍세화씨의 글은 진솔하게 느껴진다.진보논객을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의 글에서는 이상적인 옳고 그름을 판단할수는 있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써의 평등한 눈높이를 맞추기는 쉽지않다. 그들 또한 은연중에 상위 1퍼센트를 꿈꾸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수많은 이유로 (그중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궁색한 변명이 가장 많다) 자신의 기존 이념과 논리를 순식간에 바꾸어 버리는 많은 사람들을 볼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움이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과연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는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이다. 평상시에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들이 과연 나의 의지에 의해서 수립된 것인지 아니면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평상시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 부분이기에 책을 읽으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존재하지만 나의 생각은 혹시 타인에 의해 다른 것에 의해 주입된 것은 아닐까? 그로 인해 나의 생각이 아닌 다른 이의 생각에 길들어져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저자의 질문은 계속 아픈 곳을 건드린다. 내 생각의 주인이 내가 아닌 이유는 무엇일까? 기성세대의 요구나 잘못된 사회적 통념의 무분별한 수용. 그리고 그것의 가장 큰 원인은 잘못된 교육제도 라고 비판한다. 100점 만점인 사회에서의 줄서기와 12점 만점인 사회에서의  평균화 교육은 단순히 수치적 차이가 아닌 교육의 본질에 대한 차이를 말하고 있다. 기본부터 다른 교육제도에서 자란 사람들의 사고는 당연히 주체적 역량에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게 될 수 밖에 없다. 다름과 틀림의 혼용. 자유의 반대는 무질서가 아닌 억압과 탄압이라는 것의 망각.무수히 많은 촛불을 바라보며 사회적 질서의 대 혼란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망각한 행동이라고 거침없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불온한 세력이라고 분노한다. 그들에게 자유의 반대는 혼란인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소리없이 타오르는 촛불을 무자비하게 끄는 행동이며, 촛불을 들지 못하게 하는 억압이며 더 나아가서는 촛불을 밝혀야만 하는 현실이다. 즉 , 탄압과 억압이다. 우리의 생각은 진실을 외면하곤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진실을 표명한 거짓들 속에서 우리는 참과 거짓을 구변할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서서히 그들의 소리없는 폭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저자는 우리 사회의 많은 오류를 지적한다. 알게 모르게 팽배되어 있는 인종차별 문제와. 종교를 가장한 폭력적 파시즘.동성애자,양심적 병역거부자와 같은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 지금 내가 차별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어떤이들에 의해 규정되어진 내 생각의 화석일 뿐이다. 젊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직까지는 뒷 방 늙은이로 간주되기는 창창한 나이인 나로써도 점점 정형화 되어가는 나의 생각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이다.

현재는 선대에 물려받은 유산이 아닌, 후대에게 잠시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빌린 것을 돌려줄 때에는 이자는 주지 못할 망정 원금에 손실이 가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건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는 일이며 무엇보다도 도덕적으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내 생각대로 사는 삶이 아닌, 참으로 똘똘뭉쳐진 나만의 생각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현실과 참은 결코 한 몸이 되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내일도 끊임없이 읽고,보고,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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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과 수필 태학산문선 301
윤오영 지음, 정민 엮음 / 태학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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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글들이 문득 떠오르곤 한다. 그 당시 읽었던 소설과 수필,시.... 시험을 보기 위해 펼쳐든 글들은 절대로 문학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활자에 지나지 않았다. 소나기에 나오던 소년과 소녀의 모습도 결코 아름답지 않았고. 낙엽을 태우던 냄새는 어떤 향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추운 겨울 산수유 열매를 따기 위해 산속을 헤매던 아버지의 마음도 헤아릴수 없었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야 이 글들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느낌은 그 때와 같지 않다. 비로서 문학으로 보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윤오영 선생님의 곶감과 수필도 같은 맥락으로 읽기 시작했다. 방망이 깍던 노인. 한 편의 짧은 글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당시 시험에는 이 글이 어떻게 출제가 되었을까? 전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다시 읽어본 방망이 깍던 노인은 그저 아름다운 한 편의 수필이었다. 그걸로 족할뿐이다.

 

그는 수필을 곶감에 비유했다. 곶감을 만들려면 먼저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좋은 글이 되려면 먼저 문장기(文章氣)를 벗겨야 하는 것과 한가지 이치다. 그 다음엔 시득시득하게 말린다.그러면 속에 있떤 당분이 겉으로 드러나 하얀 시설이 앉는다.만일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글쓰는 이의 개성을 말한다. 감은 오래가지 못하지만 곶감은 오래간다.  [ 윤오영 론 中 ]

 

이 책은 윤오영 선생의 여러 수필집에 수록된 글들을 가려 뽑아 놓은 것이니, 윤오영 대표 수필집 정도 될 것이다.정민 선생이 편집을 맡았다. [방망이 깍던 노인] , [마고자],[소녀]와 같은 대표작을 비롯해 55편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짧은 글들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알짜배기들이다. 한 편 한 편 읽을 때 마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 지고, 마음이 차분히 가라 앉는다. [소녀]라는 작품을 보자. 한살 터울인 먼 친척뻘 소년,소녀사이에 벌어지는 수줍음이 물씬 풍겨난다. 자신의 방에 미처 치우지 못한 채 걸려있는 적삼을 혹시나 오빠가 훔쳐 볼까봐 안절부절 하는 모습. 상상만 하더라도 그 수줍음에 내 얼굴이 빨개질정도이다. 소소한 일상이  평범한 사물이 그 의 손끝에닿자 아름다운 노래가 된 듯 하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 혼자만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인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방대한 일들을 이야기한 측상락(厠上樂)은 제목만큼이나 기발하다.

 

저자는 수필이라는 분야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비단 수필뿐이 아닌 문학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연암문장]이라는 글은 박지원 선생에 대한 평론집과 같다. 연암의 작품 전반에 대한 그의 안목은 매우 뛰어나다. 때론 엄청난 독설을 풀기도 하지만, 연암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애정과 부러움이다. 그 마음 그대로가 윤오영 이라는 작가의 문학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붓가는 대로 자유롭게 쓴 글이 수필이라고 하지만,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학작품으로서의 자유로운 산문만이 수필이라고 이야기한다. 수필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볼 때 흔히 수필이라고 일컫는 세간의 비문학 작품적인 문장들은 한낱 잡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로 되어진 문학이 곧 수필이니, 수필이란 가장 오래된 문학 형태인 동시에 가장 새로운 문학 형태요, 아직도 미래의 문학 형태라고 했다.  이 글을 읽으며 나는 내가 이런저런 이유로 끼적거리는 글들이 모두 잡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어려운 한자와 잘 쓰지 않는 고유어들. 그리고 지금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표현들이 책을 읽는데 조금은 방해가 되지만 묵묵히 읽어나가다 보니 문장의 진미를 느낄 수 있었다.  중간 잠시 언급되는 피천득 선생과의 추억도 흥미로운 이야기였으며, 옛날 이야기처럼 들려주는 몇 편의 이야기들도 꽤나 재미있는 글이었다. 태학산문선의 책들은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그 내용은 표지 그 이상으로 참다운 맛을 가지고 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늙어서 젊은이와 거리가 생김은 세대의 차가 아니라 늙기 전의 나를 잃음이요, 출세해서 교만함은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출세 전의 나를 잃음이요, 세속에 물들어 타락하고 명리에 휩쓸려 변질됨은 사람이 다른 게 아니라 그 전의 나를 잃음이니, 한마디로 해서 인간을 잃고 나를 잊은 것이다. 이는 나를 오래 못 본 탓이다. 이제 책 속에서 천고의 인간들을 보고, 숨어 있던 나를 찾음이니 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가. 나는 독서의 환희를 여기서 느낀다.  [ 나의 독서론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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