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을 읽고.

이지현.


제목만 보고서는 연애소설인 줄 알았다. 연인들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을 담은 책이


라 생각했다. 조선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그 의미를 알고, 책도 읽어 봐야 그 내용을 알지 않겠는가?


 이 책 참 재미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추리소설 작가인 레이먼드 챈들러는 하드 보일드 문체의 대가라고 한다. 하드 보일드? 네이버에 찾아보니 ‘불필요한 수식어를 빼버리고 사실과 행동을 중심으로 쓴 문체’ 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은 과연 인물들의 내면 심리 묘사가 없어 딱딱한 면이 없잖아 있었던 듯 하다. 비록 글은 하드보일드하게 썼을지 몰라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이후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알코올 중독에 빠져 그도 세상을 하직한 것을 보면 그의 인생은 전혀 하드보일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설 탐정인 필립 말로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테리 레녹스를 멕시코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돕는다. 테리는 이미 실비아 레녹스, 즉 자기 아내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총에 맞고, 얼굴은 조각상에 심하게 찍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실비아 레녹스... 누가 봐도 증오에 의한 살인이었다. 테리가 혐의를 받고 있고, 도주하였고,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고 자백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까지 했기 때문에 누가 봐도 범인은 테리 레녹스였다. 하지만 이 책은 추리소설 아닌가? 평소 행실이 자유분방하고 여러 남자와 어울려 지냈던 실비아 레녹스를 남편이 질투하여 죽였다? 이것은 소재도 진부하고 너무나도 흔한 이야기! 그렇다면 누가 실비아 레녹스를 죽였는가?

책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것은 ‘누가 실비아 레녹스를 죽였는가’ 이지만 사실 여기 저기 볼만한 내용들이 많다. 첫째, 필립 말로와 테리 레녹스의 우정이다. 미국에서는 우정이 이다지도 쉽게 생길까 하는 의문마저 들게 하는 이들의 우정. 술에 취해 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테리를 말로는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재우고 돌봐주는 데서 그들의 우정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따금씩 만나서 술을 한잔 하게되고...작가가 하드보일드의 대가여서 그런지 정말 감정 묘사가 적다. 이 둘이 얼마나 서로에게 진한 우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심리 묘사로 이루어 지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테리가 멕시코로 간 다음, 말로는 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약간의 고문도 당하게 된다. 하지만 거기서 테리에 대한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남자들의 우정’이란 말을 좋아한다. 시시한 여자들이 알 수 없을거란 생각을 기반으로 한 남자들의 우정말이다.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이들의 우정,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둘째, 필립 말로와 아일린 웨이드의 아슬아슬한 밀당(밀고 당기기)이다. 아일린 웨이드는 너무 아름다워서 눈이 부신 그런 여자다. 게다가 부자다. 그런 여자가 시시한 사립탐정인 필립 말로에게 와서 사건을 의뢰한다. 말로는 이미 그 여자에게 반했다. 애써 못본채 하고 객관적으로 대하려고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지, 이 여자가 의뢰한 사건에 몸을 바친다. 돈 많은 여자한테 사건 착수금조차 받지 않은 채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이것이 필립 말로의 발목을 잡지만, 당장 이 여자가 너무 좋은데 뭐 어쩌란 말인가? 꽤 시크에 보이는 말로가 꽤 정감가는 부분이 이런 부분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과연 테리 레녹스는 정말 죽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더 흥미가 넘칠 것이다. 당연히 죽었겠지 하는 생각에 책의 전반부를 읽다가 중반을 넘어서면 내 속에 숨어있던 추리 작가의 기질이 솟아 올라 ‘정말 죽었을까?’, ‘진짜 범인이 테리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초등학생 때 읽었던 몇 권의 셜록 홈즈 책을 제외하면 ‘기나긴 이별’ 은 내게 추리소설 입문서나 마찬가지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아온 내게 추리 소설은 내 안에 상상력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게 해 준다. 누가 범인일까?, 정말 죽었을까?, 아일린 웨이드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 속에 어느새 나는 작가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보조 작가가 된 기분까지 들었다. 역시 추리 소설의 매력에 빠진 것 같다. 물만두씨의 책에서 극찬하는 책을 위주로 읽고 있는데 책을 선정하는 기준이 나와 비슷하신 것 같아 참 좋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고 했다. 물만두씨는 정말 이름을 남겼다.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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