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감정의 정치학 마이크로 인문학 6
김종갑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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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문장을 인용하기로 한다.

"원래부터 혐오스러운 사람은 없다.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품처럼 제작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혐오와 '원래부터'는 모순 형용이다." (13쪽)

 

"정치를 혐오하는 사람은 자기가 정치인보다 도덕적으로 훨씬 낫다는 생각을, 여성 혐오자는 자기가 본질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17쪽) 무엇을 혹은 누구를 혐오하는 자는 무엇 그리고 누구로부터 거리감을 취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헬레니즘과 기독교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부정하는 문화였다. (...) 플라톤에 의하면 바람직한 인간이란 자신의 동물적 자아, 즉 육체적 욕망을 경멸하고 혐오하는 자다." (27쪽) 어쩌면 유럽 문화 전체의 의향이 금욕을 미화하거나 은폐하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하였다.

 

"'비잔티움의 항해' (예이츠의 시작품)가 말해주듯이 인간은 이중적 존재다. 한편으로는 죽지 않는 존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어야 하는 비루한 존재다. 이 양자가 갈등하는 틈새에서 혐오가 생겨난다." (41쪽)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자기 파괴의 충동도 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충동이 없다면자살하거나 자해하는 사람이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자기 파괴가 본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살자는 자기가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자신을 파괴하는 자다." (102쪽)

 

"자기 혐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흠을 발견하려는 사람이라면, 타자 혐오는 남에게서 찾아낸 흠을 가지고 자신의 결점을 숨기는 사람들이다." (103쪽)

 

"간혹 혼용되지만 혐오와 증오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미운 감정의 정도가 강해지면 증오감으로 발전하고, 싫은 감정이 격화되면 혐오가 된다." (138쪽)

 

 

"오에노 치즈코는 남성이 여성을 자신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여성 혐오로 규정하였다." (155쪽)

 

"(마사) 너스바움은 여성 혐오는 곧 여성의 대상화라고 본다. (...) 그리고 저널리스트이자 페미니스트 활동가인 로빈 모건은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157쪽 이하)

"혐오는 약자의 감정이 아니라, 강자의 감정이다. 그것은 열등감과 패배감의 표출이 아니라, 우월감과 자만심의 표출이다. 약자는 불의하지만 힘이 센 권력자에 대해서 혐오가 아니라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가진다." (167쪽)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남자들이 과거의 기득권과 특혜를 상실하고 있다는 박탈감의 발로가 여성 혐오로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68쪽)

 

"(...) 여성 혐오는 이솝 우화 속 여우의 신포도처럼 남성의 자기 합리화와 자기 방어의 기제다," (182쪽)

Bildergebnis für misogynie

 

 

여성 혐오의 현상을 예리하게 풍자한 캐리커쳐. 조나탄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한 장면에서 뽑아온 것 같다. 왜소한 존재로 변한 남자 한 사람이 장대한 존재로 변한 여자 한 사람을 포획하여 치졸한 승리를 구가하려고 한다.

................

 

혐오가 있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불쾌한 무엇이 있고, 특정인들이 이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아우르면서 살아가는 한 싫든 좋든 혐오의 감정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여성 혐오는 시대 변화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다. 성 평등의 과정에서 나타난 일시적인 경향이라고 할까?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 Divide et impera!" 이는 정치가의 공식이었다. 특정 인간을 구분하고 나누는 행위는 특정 인간을 지배하려는 의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구분이 없으면 억압도 없다. 아마도 멀지 않아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시시콜콜 가리는 문화는 사라지는 게 마땅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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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얼굴 - 문학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죽어가는가
최문규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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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규 교수는 2014년에 죽음의 얼굴을 간행하였다. (21세기 북스) 과문한 탓에 필자는 이제야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죽음의 얼굴은 거의 600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문헌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 언급되는 작가와 이론가는 다음과 같이 방대하다.

 

프로이트 (19 페이지), 엘리아스 (20 페이지) 셀리, 케이건 (21 페이지), 비트겐슈타인  (30), 에피쿠로스 (31 페이지), 볼테르 (32 페이지), 셰익스피어 (33 페이지), 노발리스, 에드워드 영 (33 페이지), 키르케고르 (33 페이지), 소크라테스 (44 페이지), 데카르트 (45 페이지), 메리 셸리 (46 페이지), 괴테 (46 페이지), 장자 (47 페이지), 바타유 (48 페이지), 플라톤 (51 페이지), 루돌프 아이슬러 (51 페이지 이하), 헤겔, 하이데거 (56 페이지), 보들레르 (60 페이지), 아리에스 (65 페이지), 벤야민 (68 페이지), 하이데거 (95 페이지), 사르트르 (104 페이지), 데리다 (105 페이지), 보드리야르 (141 페이지), 니체 (164 페이지), 레싱 (170 페이지), 에드먼드 버크 (194페이지) 뷔히너 (201 페이지), 레비나스 (209 페이지), (214 페이지) , 베른하르트 (221 페이지), 하우스호퍼 (224 페이지) 바흐만 (224 페이지) 이하 생략하기로 한다.

 

 

한국 문학에 관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박태상, 이인복, 김억 (34 페이지) 윤영수 (40 페이지), 황순원 (216 페이지) 박종화 (216 페이지), 조선작 (218 페이지), 김동리 (219 페이지), 나도향 (220 페이지), 김연수 (222 페이지), 이청준 (223 페이지), 이하 생략하기로 한다.

 

죽음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에 논리 정연하게 해명해준 저자의 노고는 칭찬해줄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과 같다. 수많은 자료 그리고 방대한 언급을 접하게 되면, 독자는 죽음에 관한 문헌 내지 죽음에 관한 사고가 이 책 속에 모조리 담겨 있다고 지레짐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 생략된 사항들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본서는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에 나타난 신과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자살이라든가, 신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안티고네의 열정을 빠뜨리고 있다. 게다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물론 이는 지엽적인 사항에 해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죽음에 관한 신학적 논의에 관한 언급이 지극히 가볍게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류가 창안해낸 모든 종교 속에는 죽음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가장 심층적 갈망이 내재하고 있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수많은 종교인들의 의식 속에 항상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단저의 처형, 마녀로 화형당한 이야기는 본서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특히 죽음에 관한 신학자들의 논의가  생략된 것은 이 책의 하자로 이해될 것 같아 보인다. 저자는 죽음 마저 극복하려는 지고의 갈망에 대해서는 아예 처음부터 관심을 두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째서 에로스가 아니라, 죽음을 하나의 연구 대상으로 하여 논의를 지속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과 같은 내적 모티프 때문인지 모른다. 죽음이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며, 이에 대한 어떠한 인간적 저항도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의 모티프에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 죽음이라는 결말에서 드러나는 예술적 아름다움이라는 흔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의 심미주의의 예술론이 은근히 드러나고 있다. 인간의 행위에는 한계가 있는데, 겁도 없이 바빌론의 탑을 건설하려는 오만을 품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부분적으로 타당하다. 죽음이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마지막 단계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아도르노는 유토피아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는 최후의 모티프로서 죽음을 예로 든 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고 결심하는 애타는 갈망마저 모조리 부인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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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여정 - 빅뱅부터 호모 사피엔스까지, 우리가 살아남은 단 하나의 이유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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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교수는 인간이 살아남은 이유를 이타심에서 찾고 있다. 그의 말을 인용하기로 한다. "인간 본성의 핵심은 이타적 유전자다. 공감, 배려, 친절, 정의, 희생, 정직 등은 이타심에서 피어난 꽃이다. 그 열매가 바로 컴패션Compassion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 (passion)을 자신도 '함께 com' 느껴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마음과 행동이다. 컴패션을 한자로 표현하면 '자비慈悲', 아랍어로는 라흐민rahmin, 히브리어로는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는 레헴rehem 이라고 한다."

 

남의 불행과 죽음에 눈물을 흘리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 그것이 지금까지의 인간을 살아남게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이러한 마음이야 말로 가장 인간다움을 마련해주고 인간의 정서를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서양의 비극의 근원적 모티프가 연민λεος과 공포로 확정되었고, 이후 근대의 시기에 시민 비극의 근본적 정서로 이어온 것은 연민의 정서였다그렇기에 연민의 감정이 가장 인간다움을 안겨주며 이타적 정신을 고취시키게 하는 근원임에 틀림이 없다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죽음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마음으로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살아간다함께 괴로워하는 마음자세 Mit - Leid가까운 사람에게 인정을 베풀고 (), 가까운 사람의 불행에 슬퍼하는 (마음씀씀이야 말로 인간의 정서 가운데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 점을 배 교수는 지적하는 것이리라.

 

배교수의 주장을 무조건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다음과 같은 반론이 떠오른다. 과연 이러한 고결한 감정과 영혼의 풍요로움을 안겨주는 마음 자세가 오늘날 인간을 살아남게 했을까? 역사는 동족을 살해하고, 여성을 겁탈하며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온갖 잡다한 사악함을 행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수없이 보여준다. 어째서 배교수는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고, (죄송한 말씀이지만과거 신화 속으로 도피하여 거기에서 인간의 찬란한 이타주의의 자세를 무직정 강조하려는 것일까

 

차라리 이상을 추상적으로 추구할 게 아니라, 주어진 현실의 파국과 고해의 현실에서 차선책을 발견해 나가는 게 현대인의 자세가 아닐까? 예컨대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지만, 절반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동물적 존재가 아닌가지금까지 인간은 이러한 동물성을 부정하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아벨도 카인도 싫든 좋든 간에 모두 인간이었다. 그밖에 대부분의 종교는 금욕을 강조하며 인간의 욕구를 차단시켜 왔다. 이로써 대부분의 종교는 공히 여성을 억압하고 어떤 유희와 방종한 삶에 철퇴를 가해오지 않았던가이러한 세계관은 21세기에 이르러 더 이상 그 효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오늘날 생태계 파괴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체들이 멸종 위기를 맞이하고 있지 않는가? 70억이 지구위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지금핵무기, GMO, 슈퍼 태풍 그리고 핵 원자로가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앗아갈지 아무도 모른다이를 고려할 때 이타주의를 강조하고 이를 모방하는 노력이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충분한 덕목이라고 간주될 수는 없다물구나무선 먹이 피라미드의 삶에 직면한 인간은 인간의 도덕을 근본적으로 재정비하고 새로운 인간형과 모랄을 정립하는 게 오히려 더 시급하지 않을까? 인간의 사악한 이기주의의 측면을 인정하고, 평화, 평등, 사랑과 성에 대한 관용, 상생 그리고 겸허함을 추구하는 생태적 인간형의 태도가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이러한 이의 제기가 동어반복의 논리로 치부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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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인간에 관한 책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섹슈얼리티의 역사
김종갑 지음 / 다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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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갑 교수의 성과 인간에 관한 책은 2014년에 간행되었는데, 필자의 과문함 때문에 이제야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의 부제는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섹슈얼리티의 역사"이다. 책은 총 8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 번째 장과 마지막 장은 서문과 결어와 같다. 책은 저자의 열린 사고를 명징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예문과 사실에 근거하여 은근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에 독자에게 무언가를 강권하는 특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행과 행 사이를 예리하게 읽어나가야 저자의 놀라운 시각을 하나씩 찾아낼 수 있다.

 

서양의 문학사는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의 약화 과정이라고 설명된다. 왜냐하면 고대를 논외로 한다면, 기독교가 도래한 다음의 역사는 근엄한 일부일처제의 약화과정의 역사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김종갑 교수는 기독교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관련성을 그다지 강하게 부각시키지 않고,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성과 사랑에 대한 인간과 사회의 관점을 연대기 순서대로해명하고 있다. 1. 그리스 로마 시대, 2. 초기 기독교와 중세, 3. 르네상스시대, 14 - 16세기, 4. 계몽주의 시대 17 - 18세기, 5. 빅토리아 시대, 19세기 6. 성 해방 시대, 20세기 등의 순서대로 언급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수많은 여성 운동가들의 피맺힌 노력과 투쟁의 과정이 세부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성의 해방은 무작정 성행위를 즐길 수 있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성을 자기 의지에 의해서 조절하고 행할 수 있음을 뜻한다. 물론 우리가 오늘날 포르노, 홍등가, 성폭력 그리고 성희롱 등의 이슈와 직면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성욕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22) 성에 있어서 완전한 충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 동물은 그렇게 열광하고, 좌절하며 방황하고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 수많은 성 과학자들이 의견 일치를 보고 있다.

 

성은 김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의 차원이 아니라, 취향과 정체성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 (224사실 성이 취향의 문제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성을 오로지 취향과 정체성의 문제만으로 설정하게 되면, 이는 관용이 아니라, 때로는 냉담함을 야기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생활은 그야말로 사적인 삶으로 국한되고급기야 "장미"라는 성의 문제에 결착되어 있는 수많은 정치적 "가시"들이 저절로 떨어져나오게 된다

 

사실 70억의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저자가 말한대로 작위적인 구분이다. 또한 70억의 인간의 사랑의 패턴은 다양할 수 있다남자와 여자로 만나서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사는 11처제만이 정상이고, 싱글, 동성애자 그리고 트랜스젠더 등의 삶이 비정상이라고 매도하는 것 자체가 전근대적인 사고이다이와 관련하여 김 교수의 대부분의 주장은 그 자체 설득력을 지닌다.

 

저자는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라", "3의 성을 인정하라", "여자들이여 즐겨라."하고 주장하는데 이 역시 부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어떤 전제조건이 따라야 한다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러한 강령들을 실천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라는 전제조건을 가리킨다가령 남한 사회의 관습, 도덕 그리고 법에는 특히 여성들에게 부여된 수많은 억압 기제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게다가 여성 차별과 여성에게 부자유를 강요한 사회적 제도들이 즐비하다. 이러한 형국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원할 경우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사랑과 성을 누릴 수 있을까?

 

나아가 저자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관해서 자세한 언급을 생략하고 있다. 1.  어째서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1부일처제를 당연시 여기는 강제적 성윤리가 정치적 문제와 결착되어 여성 차별을 양산시키는가? 2. 성 소수자는 어째서 여전히 비난과 경멸의 대상으로 취급당하며 살아가는가? 3. 홍등가를 들락거리면서 자신이 성인군자라고 여기며, 성 노동자를 천대하는 진상들의 시각의 근원은 무엇이며, 여성 혐오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예컨대 오늘날에도 남녀 차별 현상이 온존하는데, 이는 오늘날에서 여전히 가부장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비난하는 것은 오로지 일부일처제만을 정상으로 생각하고 그 외의 다른 사랑의 패턴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이조시대의 통념과 관련된다매매춘에 종사하는 여자를 추하고 경멸스럽게 여기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조신한 처녀, 현모양처의 상을 미덕으로 여기는 유교주의가 수많은 남정네들의 의식 속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바로 이러한 까닭에 이러한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는 일 그리고 성소수자들 그리고 성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공동으로 싸워나가는 일이 더욱더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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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문장을 예로 들면서 논평하도록 하겠습니다.

 

"노동자와 시민이 항의하면, 집회는 원천 봉쇄당하고 말들은 검열로 사라진다." (27쪽)

수 있는가요?

-> 참으로 놀라운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가가 죄를 지으면, 과연 누가 국가에게 처벌을 내릴

 

"국가 기관이 빅브라더가 되어 시민과 노동자를 감시하고, 초국적 자본에 조종되는 미국은 전 세계의 메일과 통화를 도청하고 있고, 구글과 페이스북은 기꺼이 협조자로 나선다." (27쪽)

-> 지금 여기의 형국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은 자본가의 논리를 대변하면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어산지라는 사람은 이를 고발하다가,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면서 쫓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지요.

 

"일본 무사로 육성된 박정희는 쿠데타로 집권하여, 달의 나라를 칼의 나라로 바꾸었다." (33쪽) 

 -> 박정희는 오까모도 복상으로서 일본군 중위였습니다. 그는 대한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 선 사람입니다.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 김준엽 선생의 대장정을 읽으면 이는 사실로 확인됩니다.

 

"불행의 원인이 나의 탐욕과 무지와 성냄 때문이라면, 더욱 깨우치고 수양할 일이다. 내가 아니라, 제도와 시스템, 자본, 국가, 제국에 있다면, 그에 저항하여 새로운 시스템과 세계를 만들어야 하리라." (35쪽)

-> 인성과 제도는 서로 아우르면서 변모해야 합니다.

"주체란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허상이지만, 자기가 공 (空)하다고 함으로써, 타인을 생성시키고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자기 안의 부처, 곧 인간 다운 본성을 형성하는 눈부처-주체다." (35쪽)

-> 이 말은 대아 유토피아를 이해하는 데 가장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깨달음은 안과 밖이 동시에 감응할 때 찾아오며, 줄탁동시 啐啄同時가 아루어질 때 새 하늘은 열린다." (36쪽).

-> 신입생을 만나 꼭 이 사자성어를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신입생들이 에서 잘 나올 수 있도록, 나는 밖에서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 없이 인간이란, 인간에 관한 학문이란 무슨 의미를 갖는가?" (36쪽) 

->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하려고 하고 그리고 타자의 아픔을 읽어내면서 그분을 배려하려는 자세야 말로 인간 이해의 첩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도흠 교수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쪽방촌의 삶을 모르는 학자를 현실을 도외시하는 학문업자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시즘이 현대 사회와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는 과학이라면, 불교는 그 너머를 사유하는 지평을 열 것이다." (39쪽) 

 -> 지금까지 나는 전자를 정치경제학의 소임이고, 후자를 마르크스주의의 철학과 예술의 소임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내 생각이 짧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불교와 동양학에 관심을 기을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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