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충돌과 문명의 충돌 - 뇌 이론으로 문명의 새판을 짠다
김상일 지음 / 지식산업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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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명의 충돌을 극복하려는 뇌 연구: 김상일 교수의 의 충돌과 文明의 충돌(2007)을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은 뇌의 연구와 문명의 역사를 서로 비교한다는 점에서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의 내용을 자연과학과 접목시킨다는 점에서 신선하면서도 놀라운 내용을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저자는 맨 처음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과 국제 질서의 재편성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1996)에서 어떤 모티프를 찾아내어, 이를 뇌 과학 연구에 접목시킨다. 그렇지만 뇌의 기능과 문명의 충돌을 서술하면서


저자는 동서양의 사고방식의 차이, 중국과 한국의 문화적 대립, , , 도로 요약되는 동양학의 발전과 수용 그리고 한 사상 내지 동학사상의 진가를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가 지적하는 뇌 과학의 연구 결과보다. 뇌 그리고 중국과 한국 사이의 문명적 연관관계를 밝히는 저자의 입장에서 놀라운 식견을 접할 수 있다. 저자는 유, 불 도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피력하고, 고조선 이래로 내려온 선 (), 기 사상 그리고 동학 등을 진단하고 있는데, 논의의 폭이 넓고, 철학적 입장은 공명정대하다. 이에 필자는 경의를 표한다. 일단 내용을 요약한 다음에 문헌 속에 반영된 저자의 입장 및 기타 문헌과 관련된 비판적 사항을 논평하기로 한다.

 

2. 좌뇌와 우뇌, 요소 환원주의의 편견: 에쉬브록에 의하면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가 서방 기독교와 동방 기독교의 특징을 드러낸다. 서방 기독교는 고딕 건물로 요약되는 권위성과 합리성을 표방한다면, 동방의 기독교는 돔형의 건물로 요약되는 반-권위적인 체제로 성령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또한 지구 전체를 고려할 때 서양은 우랄 알타이 산맥을 기준으로 좌반구를, 동양은 우반구를 나타내기도 한다. 문제는 서양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우반구의 특징을 사악시하고, 열등하게 취급했다는 것이다. 이는 서양이 동양을 멸시하고, 정치적으로 공략한 오리엔탈리즘의 이유로 작용하기도 했다


동과 서의 양반구의 특징은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 가령 인도와 중국을 비교할 때 힌두교는 좌반구적이고, 불교는 우반구적이다. 중국과 한국 그리고 영남과 호남을 제각기 서로 비교할 때에도 이러한 등식이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다. 그런데 뇌 연구에서 놀라운 것은 좌반구와 우반구의 기능이 독자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뇌수술을 받은 환자를 통해서 그리고 개미의 실험을 통해서 밝혀졌다. 모든 것을 단절시키는 서양의 이원론은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위험하고 폭력적이다. 나아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합쳐져서 전체가 된다는 사고방식은 요소 환원주의에서 비롯한 편견이라고 한다.

 

3. 뇌의 기능과 뉴런의 시냅스, 순환과 되먹힘의 관계: 뇌의 좌반구는 대체로 언어적 능력을 관장하는 반면에 우반구는 정서 능력 내지 공간 개념을 담당한다. 뇌의 반구는 뇌량 (脳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 마치 인간의 뇌가 통합과 분열 그리고 재통합의 과정으로 상호 보조하듯이, 좌뇌와 우뇌는 개별적으로 다르게 작용하지만, 기능상 결코 서호 단절되어 있지는 않다. 뇌의 신경 세포 뉴런 속에는 여러 개의 수상 돌기 그리고 하나의 축색 돌기가 있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이접과 연접이 뇌 기능의 상호 관련성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독립된 뉴런의 돌기 말단이 다른 대상 세포와 만날 때 접촉하는 부위는 시냅스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 뉴런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시냅스를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로써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의 뇌세포는 하나 내지 여럿의 순환적인 조화 관계 속에서 정보를 전달한다. 나아가 뇌의 삼층 구조는 인간 존재의 모순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뇌의 파충류 층reptile complex”을 둘러싼 것은 포유류 층limbic system”이며, 이를 둘러싼 것은 신피질 층neocortex”이다. 뇌의 삼층 구조는 인간의 역사의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파충류 층의 공격 성향은 포유류 층의 소속감과 조화로움의 성향과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처한다. 사랑과 갈등이 서로 반복되고 순환되는 이유도 이러한 두 가지 뇌의 기능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뇌와 마찬가지로 우주에서도 개체와 전체는 카오스와 프랙털 이론에 의해 서로 순환 내지 되먹힘의 관계에 처해 있다.

 

4. 뇌의 기능과 종족 사이의 갈등: 뇌는 약 3만여년 전에 갑자기 신피질층이 다른 층에 견주어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뇌의 좌우 및 상중하 층의 균열과 억압 구조는 청동기가 시작되는 기원전 2000년부터 시작되어 차축시대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에 처절할 정도로 균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좌뇌의 기능이 우뇌의 그것을 압살시키고, 의식은 무의식을, 남성은 여성을, 서양은 동양을, 중국은 한국을 차례로 무시하거나 좌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뇌의 특성에 해당하는 감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 영혼적인 것은 처참할 정도로 사악한 무엇으로 간주되고 말았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고대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 널리 퍼져 있던 무속과 선 내지 기의 사상 등이 -마치 갑골문이 사장되었듯이- 유불도의 좌뇌적 특징 속으로 포섭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선 () 문화는 좌뇌적 특성과 우뇌적 특성을 조화롭게 혼합시켜 부분적으로 명맥을 이어 왔다. 이는 1675규원사화 揆園史話그리고 1911년 계연수의환단고기 桓檀古記에 지적되고 있다. 이에 반해 중국과 일본 문화에서는 두 가지 특성의 조화로움이 발견되지 않는다. 가령 일본은 자기중심적으로 타자를 거부하다가 애집증 inzestuöse Krawatte”에 시달린 다음에, 현대에 이르러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반면에, 중국은 다민족 (동이족도 포함됨)에 의해 의식이 정신 분열schizophrenia”의 조짐을 보이다가 현대에 이르러 전체주의의 기치아래 일자 一字병에 시달리고 있다.

 

5. 두 가지 이질성을 아우르는 뇌량 그리고 한국의 고대 문화: 한국의 고대 문화가 좌뇌와 우뇌의 조화를 이루는 뇌량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까닭은 차축 시대 이전에 송화강 유역에서 풍요로운 홍산 문화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홍산 문화는 황하강 유역의 중국인들의 용산문화보다 1000년 앞선 문명으로서 강한 모계 사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서양의 대부분 역사가들이 중국 송화강 유역의 용산문화를 고대 중국의 문화라고 단정 지은 까닭은 홍산 문화의 발굴 작업이 20세기 이후에 비로소 활발히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에 대한 대표적인 문헌 가운데에는 카를 야스퍼스의 역사의 근원과 목표 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1949)가 있다. 사실 한반도에 존재했던 홍산 문화는 동서양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못했다. 홍산 문화의 흔적은 최근에 유물로 발굴되었고, 특히 무속 내지 미신의 요소로 인하여 학계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 연구를 통하여 한반도에 철학이 있기 전에 오직 무속밖에 없었다는 정설에 처음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고대에 선층의 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역설한 바 있다. 신도 (神道), 선도 (仙道), 낭도 (郎徒) 등은 모두 선층을 일컫는 말이다. 서양 문명은 기원전 2000년경의 시대에 좌뇌와 우뇌의 분열 그리고 세 단계의 뇌 층이 연쇄적인 충돌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는 남성신이 여성신을 살해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하늘의 남성신, 제우스 (그리스), 마르두크 (바빌로니아), 인드라 (인도)는 땅의 여성신, 타이폰 (그리스), 티아마트 (바빌로니아), 브리트라 (인도)를 잔인하게 살해했던 것이다.

 

6. 한국의 선 사상 그리고 수기연성의 단전: 한국의 고대 문화는 처음부터 좌뇌와 우뇌, 뇌의 세 가지 층을 조화롭게 포함하는 뇌량의 기능을 발전시켜 왔다. 한국의 선교는 신채호가 지적한 대로 특성상 도교와 매우 비슷하게 때문에 혼돈을 불러일으킨다. 그렇지만 선교의 특징에 해당하는 천선, 대국, 국선이라는 명칭은 도교가 유입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단군이 활동한 시기로부터 1000여년 이후에 태동한 것이 도교였던 것이다. 신라의 화랑,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대선은 모두 선교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러한 사항은 최치원의 난랑비서 (鸞郎碑序)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삼국 시대 이후로 중국의 유, , 도의 사상이 제각기 옥석이 가려진 채 신중하게 수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하여 한국 문화 속에서는 무 () 그리고 선 ()의 특징이 사장되지 않은 채 전해내려 올 수 있었다. 특히 우리가 반드시 지적해야 하는 것은 한국적 선 사상 속에 자리하고 있는 내단 양생의 특징이다. 다시 말해 수련을 쌓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심리적 정신적 자양을 섭취한다는 사실 말이다. 기를 기르기 위해서는 수기연성 (修己煉性)하는 능동적 과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자기언급과 반성적 의식으로서의 내단(内丹)이 필요하다. 단군 신화에서 호랑이가 마늘과 쑥으로 연명하는 고통스러운 시기를 참지 못하고 동굴을 떠난 반면에, 곰이 끝까지 견뎌낸 사실은 한국인의 내면에 끈기와 혹독한 인내의 정신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이 역시 내단의 전통과 관련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노력의 과정을 거친 사람으로서 김시습 그리고 수운 최제우를 언급할 수 있다.

 

7. 문화적 침범과 서구화 그리고 이와는 다른 홍산 문화: 서양의 이원론의 대립은 좌뇌와 우뇌의 균열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대립은 서양의 신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은 기독교를 비서구 국가에 전파하고, 이들이 서구화하기를 바란다. 그들의 3 M 정책은 선교Mission”, “상인Merchant” 그리고 군대Military” 등을 동원하는 일이었다.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를 잠식하고 파괴하는 것은 신화에서 선취되고 있다. 문명사의 대서사시는 동양과 서양 사람들의 충돌과 갈등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가령 우랄알타이어 산맥에 거주하던 수메르 인들은 메소포타미아로 이전하여 서양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10세기의 칭기즈칸은 서양을 정벌하였고, 19세기부터 시작된 서세동점 (西勢東漸)의 역사는 충돌과 갈등을 말해준다


충돌과 갈등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여성 착취 내지 여성 살해의 역사를 심화시켰다.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고대 인도에서 여성 신은 남성 신에 의해서 무차별하게 살해당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홍산 문화 이후의 한반도에서는 충돌과 갈등이 아니라, 문화적 화해와 아우르는 양상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예컨대 단군 신화에서 이러한 폭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남성신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의 대모 웅녀와 결혼한다. 이는 고대 한국의 문화가 균열이 아니라, 어떤 화합 내지 조화를 실천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두 개의 이질적인 특성은 서로 대립하는 대신에 마치 음과 양처럼 서로 아우르고 있다. 이는 어둠과 태양의 상호 만남으로 비유될 수 있다. 환웅이 밝음 ()을 상징한다면, 웅녀는 어둠 ()을 대변한다. 곰이라는 말은 검음내지 어둠을 지칭한다. 일본에서 신의 이름은 가미 かみ인데, 이는 한국말 에서 비롯한 것이다.

 

8. 음양의 아우르기로서의 씨름 그리고 단군 신화 속의 조화로움: 외국 문물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일본과 중국은 화혼양재 (和魂洋才), 중체서용 (中体西用) 등을 외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것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서양 물물의 수용은 중국과 일본의 경우 토착 문물의 상실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수운 최제우는 포함삼교의 연장선상에서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장점을 체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가 바라는 후천개벽은 포함 삼교 (包含三教) 그리고 기독교의 인격신의 바탕 하의 후천개벽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이러한 노력을 방해하자, 수운의 전투적 비판의 칼날은 일본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음양의 아우르기와 단군 신화의 조화로움은 각저총의 씨름도에서 나타난다. 고대 한국의 전통적 무술은 씨름이었다. 씨름은 상대방을 죽이고 무찌르는 게 아니라, 힘 겨루는 일에서 시작하여 힘 겨루는 일로 끝이 난다.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도에서는 신단수 나무 아래에서 두 남자의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곁에는 곰과 호랑이가 드러누워 이를 관망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한쪽 남자가 매부리코를 지닌 서역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단군 신화를 떠올리며 곰과 호랑이가 굴속에서 사람이 되려고 서로 경쟁하는 것을 씨름으로 묘사한 게 아닐까?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살해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서로 힘을 겨루는 일이야 말로 바람직한 인간의 행동이 아닐까? 씨름은 서로 떨어져서 경기하는 레슬링과는 달리 한 순간도 상대방과 떨어질 수 없다. 이는 외인적이 아니라, 내인적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씨름에는 다른 사람의 힘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쓰러뜨리는 기술이 많다. 이로써 씨름의 관계는 충돌과 투쟁이 아니라, 음양의 아우르기로 상징화될 수 있다.

 

9. 홍산문화 그리고 동학의 중요성: 미래의 문화는 저자에 의하면 동양과 서양, 중국과 한국, 남성과 여성, 인격신과 기 에너지 등의 대립이 아니라, 서양의 이원론적 균열과 충돌 대신에 조화와 화합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문화는 충돌의 과정에서 승리와 패배로 등을 돌릴 게 아니라, 상호적으로 서로 장점을 교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뇌량이 그러하듯이 좌뇌적인 무엇은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우뇌적인 무엇과의 결합 시에 상호 협력하고 아우르는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미래의 건전한 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남성 중심적 신학 Theology”은 평등 호혜의 의미를 받아들여서 여성 중심적 신학 Thealogy”으로 변해야 한다. 이 점이야 말로 단군 신화에 언급되는 재세이화 (在世理化)의 정신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는 저자에 의하면 고대 한국의 홍산 문화 그리고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에게서 발견된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저자가 강조하는 홍산 문화와 동학을 제각기 별개의 이질적인 무엇으로 파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동학은 처음부터 내선의 특징을 지닌 고대의 무속과 선 ()을 통해서 본연의 자양을 공급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학이 인격신인 하날님과 비인격적 지기 (至気)”를 동시에 수용하고 이를 결합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선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를 고려할 때 동학은 세계 역사의 차원에서 고찰할 때 두 개의 근본적인 사상과 감정을 조화롭게 수용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서양과 동양 사이의 사상적 대립, 중국과 한국 사이의 권력 다툼,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적 체계가 동학이기 때문이다.

 

10. 한 가지 아쉬운 점, 결론을 대신하여: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의 충돌과 文明의 충돌에서 언급되고 있는 홍산 문화와 동학사상의 의미가 정치적 차원에서의 해석 확장을 통해서 본연의 의미가 약간 퇴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김대중의 민주주의론 그리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언급하면서 문명의 충돌과 관련되는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 해결책을 덧붙이고 있다. 자고로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당위성으로서의 사고는 필자의 견해로는 주어진 현실 정치의 방향을 찾으려는 정책과는 일차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김대중과 김일성의 정치적 입장과 그들의 이상이 아무리 한국의 선맥 문화의 전통에 입각해 있다 하더라도, 실제 현실에서는 수많은 오해와 비극을 불러일으킨 게 사실이다. 이를테면 한반도에서 발생한 625 사변을 생각해 보라. 설령 당시 김일성의 가슴속에 한민족의 통일을 위한 거룩한 목표가 자리했다 하더라도, 이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초래하고 말았다. 삼태극의 구조가 아무리 하나와 여럿으로 명명되는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수단은 무엇보다도 평화를 전제로 해야 한다. 물론 분단의 해결은 저자가 말한대로 세계사의 갈등과 비극을 극복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결은 차제에 평화적 중립 통일의 기치 하에 제시되는 어떤 합리적이며 실천 가능한 정책을 통하지 않으면 그 자체 무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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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과 화이트헤드 - 동학주문 21자에 대한 과정철학적 풀이
김상일 지음 / 지식산업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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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의 수운과 화이트헤드” (지식산업사 2001)는 수십 년 동안의 연구의 결실로 탄생한 보기 드문 역작이다. 이 책은 1년 전에 간행된 동학과 신서학의 보충 판인데, 논의를 개진하는 데 있어서 무리가 없고, 순서와 주제의 전개에 있어서도 탁월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책은 동서양의 신학을 추적해온 도올 김용옥의 사상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김용옥은 도올심득 東經大全에서 최수운의 사상을 후천 개벽을 위한 실천철학으로 평가한다. 동학사상 속에는 이른바 민본 (民本)이라는 의향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은 도올에 의하면 맹자의 왕도정치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만약 동학사상에 담긴 민본이 김용옥의 말대로 맹자의 유교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수운이 개별적인 측면에서 서양 사상과 동양 사상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수용하려고 의도했다는 점과는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무엇이다.

 

김용옥이 동학의 민본을 맹자에게서 찾으려고 했다면, 김상일은 동양의 유불선 그리고 서양의 유대교와 기독교 사상 모두를 고려하면서 이를 부분적으로 비판한다. 서구의 신학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지전능한 인격신을 바탕으로 하여 오랫동안 이어져오다가 현대에 이르러 그 한계에 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비하면 동양에서는 유불선, 특히 불교를 중심의 무 내지 도가 중심이 되어서 기 사상으로 발전해 왔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중동지역의 척박한 사막을 배경으로 하여 초월적 인격 신관을 발전시켰다면, 동북아시아에는 수풀이 많아서 범신론적인 신관이 발달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77) 다시 말해서 서양에서는 ”, “소유권그리고 존재자가 활성화되었다면, 동양에서는 자연”, “자체권그리고 존재 자체가 주도적으로 자리매김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 “소유권그리고 존재자는 전지전능한 인격 신을 가리킨다면, “자연”, “자체권그리고 존재 자체신의 특성을 생동감 넘치게 받아들이는 에너지 내지 기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물론 서구에서는 영지주의 내지 이른바 이단의 종파에서 인격신과는 반대되는 종교적 사상적 조류가 은밀하게 명맥을 이어 왔듯이, 동양에서도 강력한 색신 내지 상제로서의 신적 존재에 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간간히 출현한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폴 틸리히가 종교 철학에서의 두 가지 유형” (1959)에서 언급되고 있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이 신앙과 철학의 영역에서 공히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전지전능한 힘을 지닌 인격신의 존재를 지칭한다면, 후자는 무, 도 그리고 기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른바 성스러운 영혼을 받아들이는 에너지를 가리킨다. 이러한 두 유형은 메타 종교에서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기본적인 것들인데, 놀랍게도 수운 최제우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사상 속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이라고 한다. 신과 자연 (Spinoza), 존재자와 존재 자체 (Heidegger), 신과 창조성 (Whitehead), 틸리히의 존재와 초월의 존재 (Tillich)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카테고리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를 포함 (包含)하며, 서로를 포함 (包涵)한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포함 (包涵)은 타자언급 뿐이지만 포함 (包含)은 자기 언급적이며, 동시에 타자 언급적이다. 포함 (包含)은 부류와 요원이 서로 함께 감싸고 있기 때문에 주객을 나눌 수 없다. 마치 염분과 물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릇 속에 과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그 관계는 포함 (包涵)이다.” (51)

 

신과 자연 (Spinoza), 존재자와 존재 자체 (Heidegger), 신과 창조성 (Whitehead), 틸리히의 존재와 초월의 존재 (Tillich)는 서로 포함 (包含)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서로 이질적인 내용을 지닌 채 양단적 (両断的)으로 배척하는 게 아니라, 상호 조화롭게 영향을 끼쳐서 제각기 변해나가는 양단적(両端的)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를 포함(包含)하며 양단적(両端的)으로 작용하는 상제로서의 신과 지기로서의 기운을 서로 통합하고 조우하며 아우르는 것들로 이해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수운 최제우였다. 말하자면 수운은 서양의 신관과 동양의 신관을 서로 아우르게 하여 세계에서 가장 유연하면서도 가장 단단한 범재신론 panentheism”21자의 주문으로 환성시켰다는 것이다. 범재신론은 과정 신학의 입장으로서, 초월적 신관의 유신론Theim과 범신론을 결합시킨 것이다. 신의 존재는 가장 강력한 인격신이면서도 동시에 자연 속의 모든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경재는 동학의 신관을 범재신론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至気今至 願為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万事知)의 의미는 화이트헤드의 신과 창조성에 관한 유연한 이론과 마찬가지로 동서양의 신관을 절충시키고 통합시킨 가장 의미심장한 사상적 종교적 갈망을 담고 있다. 동경대전』 「논학문13장에 언급되는 천주의 내유신령 (内有神霊)과 외유기화 (外有気化)는 지기로부터 받아들인 신의 두 가지 본성이다. (415).

 

놀라운 것은 김상일의 주장이 동학 측의 이세권의 주장과 천도교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 각자의 장단점에 가교를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서 김상일 교수는 화이트헤드에 대한 네빌의 비판이 손병희를 비난하는 이세권의 입장과 궤를 같이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식민지 사관 내지 파시즘 등과 관련되는 해당 당사자의 정치적 입장은 완전히 무시될 수는 없으나, 지금 이곳의 현실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단면적 측면을 지닌다. 수운은 동양에서의 종교적 경향이 인격신, 소유권, 존재자의 측면을 무시해왔음을 인정하고, 이를 보다 강화하기 위해서 두반히 노력했다면, 화이트헤드는 이와는 역으로 서양에서 인격신, 소유권 존재자의 측면이 너무 강력하게 인정받았으므로, 신서학에서는 지기, 자체권 자체권 무 (), (), ()로 표현되는 창조성의 원리를 보다 더 중시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서로 방향은 다르지만 수운과 화이트헤드는 김상일의 견해에 의하면 제각기 서양에서 활성화된 신, 소유권 그리고 존재자 그리고 동양에서 활성화된 자연, 자체권 그리고 존재 자체를 서로 소통하고 아우르는 두 개의 근본적 종교 사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운과 화이트헤드는 기 사상의 근본적 뿌리로서 한국의 전통적 문화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가령 수운의 지기 (至氣)는 한국 불교로부터 이율곡을 거쳐, 녹문 임성주의 기철학 그리고 혜강 최한기의 신기 사상을 자양으로 하여 토대가 닦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다산 정약용은 유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창조성 개념, 즉 기의 개념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임성주와 최한기와 같은 기 철학자들은 서양에서 오랫동안 철칙으로 이해되었던 인격신의 존재를 자신의 기철학에서 배제하다시피 하였다.

 

이들에 반해 수운은 천주와 지기를 동시에 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물론 수운은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천주를 상제라고 완곡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천주와 지기를 결코 이원론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천주와 지기는 음과 양이 서로 아우르는 역동적 과정으로 해명되고 있는데, 이는 김상일의 주장에 의하면 화이트헤드의 창조성 개념과 전적으로 접목되는 과정이라고 한다. 이로써 저자는 한반도에서 완성된 동학사상과 천도교의 정신이 지니고 있는 세계 사상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재확인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동학이 세계 사상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유는 윤노빈의 지적대로 시천 (侍天), 양천 (養天) 그리고 체천 (體天)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기운에 의해서 역동적으로 변화되어 나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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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귀환 - 폐허의 시대, 희망의 흔적을 찾아서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세계문학 연구총서 1
이명호 외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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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귀환"은 문학 유토피아의 연구서이므로, 훌쩍 읽고 넘길 책은 아니다. 이 책의 특징은 모든 내용과 주제를 요약 정리했다는 데 있다. 총 25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글들은 제각기 오늘날 유효한 유토피아의 문헌을 불과 몇 페이지로 요약하고 있다. 그냥 훌쩍 읽고 넘길 글들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은 꼼꼼한 정독을 요하는 책이다.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에 나오는 작가들, 이를테면 모어, 벨라미, 모리스. 웰스, 헉슬리, 오웰, 자먀찐, 르 귄 등의 작품 분석은 낯설지는 않으나, 오늘날 현실을 고려하여 그들의 작품들이 논의되고 있다. 우리에게 생소한 작가 까르뻰띠에르의 "잃어버린 발자취",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 역시 유토피아의 연구의 관점에서 세밀하게 분석되고 있다. 이러한 글들은 동서양의 유토피아 연구에서 한 번도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바 없아. 그밖에도 동양의 문헌 또한 빠뜨리지 않고 있다. 도연명, 거페이, 다자이 오사무, 무라카미 하루키 등의 작품들도 거론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글들이 단순히 과거의 작품과 과거의 시대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현실과 연계하겨 논의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글들은 우리에게 당면한 현재성의 문제 그리고 이와 관련되는 유토피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  

 

나아가 한국 문학 작품, 이청준의 "이어도", 최인훈의 "회색인" 그리고 박민규의 "핑퐁" 등도 다루어지고 있다. 김종수 선생의 글, "파국의 역설, 박민규의 핑퐁", 박정원 선생의 글 "시간 이탈자들의 역사를 찾아서." 그리고 김영임 선생의 글 ""인류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에 새겨진 유토피아." 등을 독서하는 것은 나에게 커다란 기쁨이었다. 저자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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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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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욕망을 어떻게 떨칠 수 있을까? 혹은 디오게네스: 위대한 극기주의자, 디오게네스는 거대한 통을 자신의 집으로 삼고, 거기서 한 마리 개처럼 살았습니다. 자청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 - 그게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표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측컨대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사고와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가난은 불편함과 짜증을 동반하게 하니까요. 디오게네스는 공공연하게 자위함으로써 성욕을 해결하였습니다


디오게네스는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다음과 같이 푸념을 터뜨렸습니다. “, 자위하는 식으로 배를 쓱쓱 만지면서 굶주림을 달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디오게네스는 먹을 게 많이 없었기 때문에, 소식해야 하였습니다. 그 때문이었을까요? 90년 살다가 세상을 하직했으니, 다른 사람들의 두 배 정도 오래 산 셈입니다. 디오게네스는 문헌을 멀리하고, 오로지 자신의 인성의 수양에 전력투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회의주의의 지조를 느낄 수 있습니다. 

 

12.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헤테로피아: 미셀 우엘벡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새로운 인간의 몸, 새로운 인간의 존재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과거의 작가들이 주로 유토피아라는 이상적 공간을 설정하여, 이상적 (혹은 끔찍한) 모델을 설계했다면, 우엘벡은 이러한 사회적 구도 대신에 마치 사이보그와 같은 새로운 인간의 존재를 설정하여, 그 속에 어떤 해결책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이 경우 인간의 몸 자체가 하나의 유토피아의 영역과 같습니다


새로운 인간의 몸은 미셀 푸코가 언급한 유토피아와는 다른 하나의 헤테로피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가령 푸코는 사회가 강요하는 지배로부터 벗어난 공간을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1974)에서 제레미 벤탐Jeremy Bentham의 파놉티콘(Panopticon, 일종의 원형감옥)을 구체적 예로 들면서, 청년 수련원, 양로원, 요양원, 감옥, 정신병동, 군대의 막사, 묘지, 영화관, 극장, 정원, 박물관, 도서관, 축제로 활용되는 들판, 숙박시설, 홍등가, 여객선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찰할 때 새로운 인간의 몸 자체가 하나의 헤테로피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3차원의 공간에 짓눌리면서 살아갑니다. 3차원의 공간은 인간을 구속하는 수단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인간이라는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이러한 3차원의 공간에 구속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인간은 죽지 않는 존재이므로, 성 생활을 통해서 이어져 나가려고 하는 종족 보존의 욕구는 불필요하기까지 합니다.

      

13. 유토피아의 공간으로서의 몸, 혹은 소립자: 우엘벡은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철학자 파스칼이 성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오르가슴은 습관의 문제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사실 성적 오르가슴은 인간이 습관적으로 갈구하는 오르가슴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성적 파트너를 찾아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려고 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가령 인간의 성적 차이는 인간의 성적 갈망을 방해하는 요소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인간에게는 성적 차이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요약되는 요철 (凹凸)의 결합이 없이 성적 욕망이 충족될 수 있다면, 이는 인간 삶을 이별과 고통, 불행과 슬픔을 떨치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가브리엘 푸아니Gabrielle Foigny는 자신의 소설에서 양성구유의 유토피아를 설계한 바 있습니다. 만약 한 인간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면, 사랑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은 몸속에 소립자, 다시 말해서 크라우체 소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남성과 여성의 짝짓기 없이 크라우체 소체의 작용으로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황홀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14.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인간의 쾌락으로써 젊은 독자들을 우롱하는 거짓말쟁이들이다.: 만약 인간이 신과 같이 죽지 않고 스스로 희로애락애오욕의 감정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이는 과연 행복한 삶을 위한 전제조건이 될까요? 과학 기술의 개발로 인하여 불사의 존재 내지 소립자를 활용하여 쾌감을 얻는 존재가 세상에 탄생하게 된다면, 이는 과연 바람직할까요? 이에 관해서 우엘벡은 아무런 해결책을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엘벡의 문학의 가치는 이러한 물음으로써 종결되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우리가 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은 대체로 충족되지 못한 사랑의 갈망 그리고 이로 인한 욕망의 해소 등으로 요약될 것입니다. 마치 헤밍웨이가 전쟁에다 달콤한 사랑이야기를 가미시켜서, 베스트셀러 소설을 발표한 것처럼, 우엘벡 역시 사이언스 픽션의 기상천외한 상상에다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이야기를 가미시켰을 뿐입니다. 인간의 쾌락을 농락당하느니, 차라리 쥘 베른의 소설 해저 이만리를 읽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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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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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련한 곤충학자가 가느다란 은침으로 잠자리를 채집해 두었다고 하면 그 잠자리는 한 개의 점이 된다. 그러나 어느 맑은 여름날 그 은침을 뽑고 조용히 손바닥에 올려 놓으면 잠자리는 하늘로 날아오른다." (담론, 224쪽)

 

 

담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 나무야, 변방을 찾아서, 엽서, 강의 등 신영복 선생의 책이라면 거의 모조리 읽었지만, 이처럼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받은 적은 없었다.

 

책은 두 개의 장으로 나누어진다. 앞의 장은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서 읽었던 동양의 사상에 관한 강의이며, 뒤의 장은 감옥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형수 그리고 수인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동양학에 무지한 나로서는 틈틈이 시난 날 때마다 앞부분을 읽었는데, 그 내용과 깊이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나의 마음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두 번째 장의 내용이다.

 

 과연 우리가 죄를 저지른 인간을 처벌할 수 있는가? 누구라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인간 이하가 아니라, 무로 취급하는 사악한 존재들을 극도의 고통을 가하는 악마들을 죽이고 싶을 것이다. 인간의 자기 보존 충동이 우리로 하여금 저항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러한 저항의 범위는 어떠한 크기를 가져야 할까? 이는 주어진 구체적 현실적 정황에서 결정될 것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적어도 정치 권력이 민주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구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는 아니었습니다. 정치란 대적 對敵의 논리로 구축되어 있지만, 내면에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조건이 되고 있는, 이를테면 권력 집단 간의 생생과 상극을 생리로 하는 게 아닐까 하는 회의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담론,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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