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과 화이트헤드 - 동학주문 21자에 대한 과정철학적 풀이
김상일 지음 / 지식산업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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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의 수운과 화이트헤드” (지식산업사 2001)는 수십 년 동안의 연구의 결실로 탄생한 보기 드문 역작이다. 이 책은 1년 전에 간행된 동학과 신서학의 보충 판인데, 논의를 개진하는 데 있어서 무리가 없고, 순서와 주제의 전개에 있어서도 탁월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책은 동서양의 신학을 추적해온 도올 김용옥의 사상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김용옥은 도올심득 東經大全에서 최수운의 사상을 후천 개벽을 위한 실천철학으로 평가한다. 동학사상 속에는 이른바 민본 (民本)이라는 의향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은 도올에 의하면 맹자의 왕도정치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만약 동학사상에 담긴 민본이 김용옥의 말대로 맹자의 유교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수운이 개별적인 측면에서 서양 사상과 동양 사상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수용하려고 의도했다는 점과는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무엇이다.

 

김용옥이 동학의 민본을 맹자에게서 찾으려고 했다면, 김상일은 동양의 유불선 그리고 서양의 유대교와 기독교 사상 모두를 고려하면서 이를 부분적으로 비판한다. 서구의 신학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지전능한 인격신을 바탕으로 하여 오랫동안 이어져오다가 현대에 이르러 그 한계에 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비하면 동양에서는 유불선, 특히 불교를 중심의 무 내지 도가 중심이 되어서 기 사상으로 발전해 왔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중동지역의 척박한 사막을 배경으로 하여 초월적 인격 신관을 발전시켰다면, 동북아시아에는 수풀이 많아서 범신론적인 신관이 발달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77) 다시 말해서 서양에서는 ”, “소유권그리고 존재자가 활성화되었다면, 동양에서는 자연”, “자체권그리고 존재 자체가 주도적으로 자리매김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 “소유권그리고 존재자는 전지전능한 인격 신을 가리킨다면, “자연”, “자체권그리고 존재 자체신의 특성을 생동감 넘치게 받아들이는 에너지 내지 기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물론 서구에서는 영지주의 내지 이른바 이단의 종파에서 인격신과는 반대되는 종교적 사상적 조류가 은밀하게 명맥을 이어 왔듯이, 동양에서도 강력한 색신 내지 상제로서의 신적 존재에 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간간히 출현한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폴 틸리히가 종교 철학에서의 두 가지 유형” (1959)에서 언급되고 있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이 신앙과 철학의 영역에서 공히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전지전능한 힘을 지닌 인격신의 존재를 지칭한다면, 후자는 무, 도 그리고 기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른바 성스러운 영혼을 받아들이는 에너지를 가리킨다. 이러한 두 유형은 메타 종교에서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기본적인 것들인데, 놀랍게도 수운 최제우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사상 속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이라고 한다. 신과 자연 (Spinoza), 존재자와 존재 자체 (Heidegger), 신과 창조성 (Whitehead), 틸리히의 존재와 초월의 존재 (Tillich)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카테고리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를 포함 (包含)하며, 서로를 포함 (包涵)한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포함 (包涵)은 타자언급 뿐이지만 포함 (包含)은 자기 언급적이며, 동시에 타자 언급적이다. 포함 (包含)은 부류와 요원이 서로 함께 감싸고 있기 때문에 주객을 나눌 수 없다. 마치 염분과 물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릇 속에 과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그 관계는 포함 (包涵)이다.” (51)

 

신과 자연 (Spinoza), 존재자와 존재 자체 (Heidegger), 신과 창조성 (Whitehead), 틸리히의 존재와 초월의 존재 (Tillich)는 서로 포함 (包含)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서로 이질적인 내용을 지닌 채 양단적 (両断的)으로 배척하는 게 아니라, 상호 조화롭게 영향을 끼쳐서 제각기 변해나가는 양단적(両端的)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를 포함(包含)하며 양단적(両端的)으로 작용하는 상제로서의 신과 지기로서의 기운을 서로 통합하고 조우하며 아우르는 것들로 이해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수운 최제우였다. 말하자면 수운은 서양의 신관과 동양의 신관을 서로 아우르게 하여 세계에서 가장 유연하면서도 가장 단단한 범재신론 panentheism”21자의 주문으로 환성시켰다는 것이다. 범재신론은 과정 신학의 입장으로서, 초월적 신관의 유신론Theim과 범신론을 결합시킨 것이다. 신의 존재는 가장 강력한 인격신이면서도 동시에 자연 속의 모든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경재는 동학의 신관을 범재신론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至気今至 願為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万事知)의 의미는 화이트헤드의 신과 창조성에 관한 유연한 이론과 마찬가지로 동서양의 신관을 절충시키고 통합시킨 가장 의미심장한 사상적 종교적 갈망을 담고 있다. 동경대전』 「논학문13장에 언급되는 천주의 내유신령 (内有神霊)과 외유기화 (外有気化)는 지기로부터 받아들인 신의 두 가지 본성이다. (415).

 

놀라운 것은 김상일의 주장이 동학 측의 이세권의 주장과 천도교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 각자의 장단점에 가교를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서 김상일 교수는 화이트헤드에 대한 네빌의 비판이 손병희를 비난하는 이세권의 입장과 궤를 같이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식민지 사관 내지 파시즘 등과 관련되는 해당 당사자의 정치적 입장은 완전히 무시될 수는 없으나, 지금 이곳의 현실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단면적 측면을 지닌다. 수운은 동양에서의 종교적 경향이 인격신, 소유권, 존재자의 측면을 무시해왔음을 인정하고, 이를 보다 강화하기 위해서 두반히 노력했다면, 화이트헤드는 이와는 역으로 서양에서 인격신, 소유권 존재자의 측면이 너무 강력하게 인정받았으므로, 신서학에서는 지기, 자체권 자체권 무 (), (), ()로 표현되는 창조성의 원리를 보다 더 중시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서로 방향은 다르지만 수운과 화이트헤드는 김상일의 견해에 의하면 제각기 서양에서 활성화된 신, 소유권 그리고 존재자 그리고 동양에서 활성화된 자연, 자체권 그리고 존재 자체를 서로 소통하고 아우르는 두 개의 근본적 종교 사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운과 화이트헤드는 기 사상의 근본적 뿌리로서 한국의 전통적 문화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가령 수운의 지기 (至氣)는 한국 불교로부터 이율곡을 거쳐, 녹문 임성주의 기철학 그리고 혜강 최한기의 신기 사상을 자양으로 하여 토대가 닦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다산 정약용은 유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창조성 개념, 즉 기의 개념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임성주와 최한기와 같은 기 철학자들은 서양에서 오랫동안 철칙으로 이해되었던 인격신의 존재를 자신의 기철학에서 배제하다시피 하였다.

 

이들에 반해 수운은 천주와 지기를 동시에 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물론 수운은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천주를 상제라고 완곡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천주와 지기를 결코 이원론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천주와 지기는 음과 양이 서로 아우르는 역동적 과정으로 해명되고 있는데, 이는 김상일의 주장에 의하면 화이트헤드의 창조성 개념과 전적으로 접목되는 과정이라고 한다. 이로써 저자는 한반도에서 완성된 동학사상과 천도교의 정신이 지니고 있는 세계 사상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재확인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동학이 세계 사상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유는 윤노빈의 지적대로 시천 (侍天), 양천 (養天) 그리고 체천 (體天)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기운에 의해서 역동적으로 변화되어 나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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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귀환 - 폐허의 시대, 희망의 흔적을 찾아서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세계문학 연구총서 1
이명호 외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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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귀환"은 문학 유토피아의 연구서이므로, 훌쩍 읽고 넘길 책은 아니다. 이 책의 특징은 모든 내용과 주제를 요약 정리했다는 데 있다. 총 25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글들은 제각기 오늘날 유효한 유토피아의 문헌을 불과 몇 페이지로 요약하고 있다. 그냥 훌쩍 읽고 넘길 글들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은 꼼꼼한 정독을 요하는 책이다.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에 나오는 작가들, 이를테면 모어, 벨라미, 모리스. 웰스, 헉슬리, 오웰, 자먀찐, 르 귄 등의 작품 분석은 낯설지는 않으나, 오늘날 현실을 고려하여 그들의 작품들이 논의되고 있다. 우리에게 생소한 작가 까르뻰띠에르의 "잃어버린 발자취",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 역시 유토피아의 연구의 관점에서 세밀하게 분석되고 있다. 이러한 글들은 동서양의 유토피아 연구에서 한 번도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바 없아. 그밖에도 동양의 문헌 또한 빠뜨리지 않고 있다. 도연명, 거페이, 다자이 오사무, 무라카미 하루키 등의 작품들도 거론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글들이 단순히 과거의 작품과 과거의 시대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현실과 연계하겨 논의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글들은 우리에게 당면한 현재성의 문제 그리고 이와 관련되는 유토피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  

 

나아가 한국 문학 작품, 이청준의 "이어도", 최인훈의 "회색인" 그리고 박민규의 "핑퐁" 등도 다루어지고 있다. 김종수 선생의 글, "파국의 역설, 박민규의 핑퐁", 박정원 선생의 글 "시간 이탈자들의 역사를 찾아서." 그리고 김영임 선생의 글 ""인류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에 새겨진 유토피아." 등을 독서하는 것은 나에게 커다란 기쁨이었다. 저자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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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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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욕망을 어떻게 떨칠 수 있을까? 혹은 디오게네스: 위대한 극기주의자, 디오게네스는 거대한 통을 자신의 집으로 삼고, 거기서 한 마리 개처럼 살았습니다. 자청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 - 그게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표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측컨대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사고와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가난은 불편함과 짜증을 동반하게 하니까요. 디오게네스는 공공연하게 자위함으로써 성욕을 해결하였습니다


디오게네스는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다음과 같이 푸념을 터뜨렸습니다. “, 자위하는 식으로 배를 쓱쓱 만지면서 굶주림을 달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디오게네스는 먹을 게 많이 없었기 때문에, 소식해야 하였습니다. 그 때문이었을까요? 90년 살다가 세상을 하직했으니, 다른 사람들의 두 배 정도 오래 산 셈입니다. 디오게네스는 문헌을 멀리하고, 오로지 자신의 인성의 수양에 전력투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회의주의의 지조를 느낄 수 있습니다. 

 

12.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헤테로피아: 미셀 우엘벡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새로운 인간의 몸, 새로운 인간의 존재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과거의 작가들이 주로 유토피아라는 이상적 공간을 설정하여, 이상적 (혹은 끔찍한) 모델을 설계했다면, 우엘벡은 이러한 사회적 구도 대신에 마치 사이보그와 같은 새로운 인간의 존재를 설정하여, 그 속에 어떤 해결책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이 경우 인간의 몸 자체가 하나의 유토피아의 영역과 같습니다


새로운 인간의 몸은 미셀 푸코가 언급한 유토피아와는 다른 하나의 헤테로피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가령 푸코는 사회가 강요하는 지배로부터 벗어난 공간을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1974)에서 제레미 벤탐Jeremy Bentham의 파놉티콘(Panopticon, 일종의 원형감옥)을 구체적 예로 들면서, 청년 수련원, 양로원, 요양원, 감옥, 정신병동, 군대의 막사, 묘지, 영화관, 극장, 정원, 박물관, 도서관, 축제로 활용되는 들판, 숙박시설, 홍등가, 여객선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찰할 때 새로운 인간의 몸 자체가 하나의 헤테로피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3차원의 공간에 짓눌리면서 살아갑니다. 3차원의 공간은 인간을 구속하는 수단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인간이라는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이러한 3차원의 공간에 구속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인간은 죽지 않는 존재이므로, 성 생활을 통해서 이어져 나가려고 하는 종족 보존의 욕구는 불필요하기까지 합니다.

      

13. 유토피아의 공간으로서의 몸, 혹은 소립자: 우엘벡은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철학자 파스칼이 성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오르가슴은 습관의 문제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사실 성적 오르가슴은 인간이 습관적으로 갈구하는 오르가슴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성적 파트너를 찾아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려고 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가령 인간의 성적 차이는 인간의 성적 갈망을 방해하는 요소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인간에게는 성적 차이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요약되는 요철 (凹凸)의 결합이 없이 성적 욕망이 충족될 수 있다면, 이는 인간 삶을 이별과 고통, 불행과 슬픔을 떨치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가브리엘 푸아니Gabrielle Foigny는 자신의 소설에서 양성구유의 유토피아를 설계한 바 있습니다. 만약 한 인간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면, 사랑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은 몸속에 소립자, 다시 말해서 크라우체 소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남성과 여성의 짝짓기 없이 크라우체 소체의 작용으로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황홀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14.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인간의 쾌락으로써 젊은 독자들을 우롱하는 거짓말쟁이들이다.: 만약 인간이 신과 같이 죽지 않고 스스로 희로애락애오욕의 감정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이는 과연 행복한 삶을 위한 전제조건이 될까요? 과학 기술의 개발로 인하여 불사의 존재 내지 소립자를 활용하여 쾌감을 얻는 존재가 세상에 탄생하게 된다면, 이는 과연 바람직할까요? 이에 관해서 우엘벡은 아무런 해결책을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엘벡의 문학의 가치는 이러한 물음으로써 종결되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우리가 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은 대체로 충족되지 못한 사랑의 갈망 그리고 이로 인한 욕망의 해소 등으로 요약될 것입니다. 마치 헤밍웨이가 전쟁에다 달콤한 사랑이야기를 가미시켜서, 베스트셀러 소설을 발표한 것처럼, 우엘벡 역시 사이언스 픽션의 기상천외한 상상에다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이야기를 가미시켰을 뿐입니다. 인간의 쾌락을 농락당하느니, 차라리 쥘 베른의 소설 해저 이만리를 읽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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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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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련한 곤충학자가 가느다란 은침으로 잠자리를 채집해 두었다고 하면 그 잠자리는 한 개의 점이 된다. 그러나 어느 맑은 여름날 그 은침을 뽑고 조용히 손바닥에 올려 놓으면 잠자리는 하늘로 날아오른다." (담론, 224쪽)

 

 

담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 나무야, 변방을 찾아서, 엽서, 강의 등 신영복 선생의 책이라면 거의 모조리 읽었지만, 이처럼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받은 적은 없었다.

 

책은 두 개의 장으로 나누어진다. 앞의 장은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서 읽었던 동양의 사상에 관한 강의이며, 뒤의 장은 감옥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형수 그리고 수인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동양학에 무지한 나로서는 틈틈이 시난 날 때마다 앞부분을 읽었는데, 그 내용과 깊이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나의 마음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두 번째 장의 내용이다.

 

 과연 우리가 죄를 저지른 인간을 처벌할 수 있는가? 누구라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인간 이하가 아니라, 무로 취급하는 사악한 존재들을 극도의 고통을 가하는 악마들을 죽이고 싶을 것이다. 인간의 자기 보존 충동이 우리로 하여금 저항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러한 저항의 범위는 어떠한 크기를 가져야 할까? 이는 주어진 구체적 현실적 정황에서 결정될 것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적어도 정치 권력이 민주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구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는 아니었습니다. 정치란 대적 對敵의 논리로 구축되어 있지만, 내면에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조건이 되고 있는, 이를테면 권력 집단 간의 생생과 상극을 생리로 하는 게 아닐까 하는 회의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담론,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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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감정의 정치학 마이크로 인문학 6
김종갑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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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문장을 인용하기로 한다.

"원래부터 혐오스러운 사람은 없다.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품처럼 제작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혐오와 '원래부터'는 모순 형용이다." (13쪽)

 

"정치를 혐오하는 사람은 자기가 정치인보다 도덕적으로 훨씬 낫다는 생각을, 여성 혐오자는 자기가 본질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17쪽) 무엇을 혹은 누구를 혐오하는 자는 무엇 그리고 누구로부터 거리감을 취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헬레니즘과 기독교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부정하는 문화였다. (...) 플라톤에 의하면 바람직한 인간이란 자신의 동물적 자아, 즉 육체적 욕망을 경멸하고 혐오하는 자다." (27쪽) 어쩌면 유럽 문화 전체의 의향이 금욕을 미화하거나 은폐하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하였다.

 

"'비잔티움의 항해' (예이츠의 시작품)가 말해주듯이 인간은 이중적 존재다. 한편으로는 죽지 않는 존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어야 하는 비루한 존재다. 이 양자가 갈등하는 틈새에서 혐오가 생겨난다." (41쪽)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자기 파괴의 충동도 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충동이 없다면자살하거나 자해하는 사람이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자기 파괴가 본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살자는 자기가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자신을 파괴하는 자다." (102쪽)

 

"자기 혐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흠을 발견하려는 사람이라면, 타자 혐오는 남에게서 찾아낸 흠을 가지고 자신의 결점을 숨기는 사람들이다." (103쪽)

 

"간혹 혼용되지만 혐오와 증오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미운 감정의 정도가 강해지면 증오감으로 발전하고, 싫은 감정이 격화되면 혐오가 된다." (138쪽)

 

 

"오에노 치즈코는 남성이 여성을 자신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여성 혐오로 규정하였다." (155쪽)

 

"(마사) 너스바움은 여성 혐오는 곧 여성의 대상화라고 본다. (...) 그리고 저널리스트이자 페미니스트 활동가인 로빈 모건은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157쪽 이하)

"혐오는 약자의 감정이 아니라, 강자의 감정이다. 그것은 열등감과 패배감의 표출이 아니라, 우월감과 자만심의 표출이다. 약자는 불의하지만 힘이 센 권력자에 대해서 혐오가 아니라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가진다." (167쪽)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남자들이 과거의 기득권과 특혜를 상실하고 있다는 박탈감의 발로가 여성 혐오로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68쪽)

 

"(...) 여성 혐오는 이솝 우화 속 여우의 신포도처럼 남성의 자기 합리화와 자기 방어의 기제다," (182쪽)

Bildergebnis für misogynie

 

 

여성 혐오의 현상을 예리하게 풍자한 캐리커쳐. 조나탄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한 장면에서 뽑아온 것 같다. 왜소한 존재로 변한 남자 한 사람이 장대한 존재로 변한 여자 한 사람을 포획하여 치졸한 승리를 구가하려고 한다.

................

 

혐오가 있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불쾌한 무엇이 있고, 특정인들이 이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아우르면서 살아가는 한 싫든 좋든 혐오의 감정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여성 혐오는 시대 변화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다. 성 평등의 과정에서 나타난 일시적인 경향이라고 할까?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 Divide et impera!" 이는 정치가의 공식이었다. 특정 인간을 구분하고 나누는 행위는 특정 인간을 지배하려는 의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구분이 없으면 억압도 없다. 아마도 멀지 않아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시시콜콜 가리는 문화는 사라지는 게 마땅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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