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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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에는 기이하게도 저자가 아니라, 두 명의 번역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목수정의 사진이 버젓이 게재되어 있다. 각주 처리가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으며, 원 저자의 의향보다는 현대인들의 저항을 축구하는 메시지가 강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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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 : 지식인과 실천 問 라이브러리 6
윤평중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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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 교수의 글은 논의에 있어서 명징하고 질서정연하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강한 논리적 견해가 때로는 사실적으로 적확한 내용 파악을 힘들게 만들 때도 있다. 이를테면 그는 송두율 교수의 사회학 내지 정치관을 비판한다. 송 교수에 대한 그의 비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소련 그리고 북한 등에 대한 부정적 시각 내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유형의 반공주의의 성향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신상초의 공산주의 비판을 반복하는지 모른다.

 

한반도의 정세의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려고 하는데, 이를 위해서 윤교수가 내세우는 것이 변증법적 이성 국가에 관한 믿음이다. 물론 이성적 국가를 정립시키고, 이러한 토대 하에서 혼란과 갈등을 잠재울 수 있는 이성적인 정책에 요청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 변증법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인데, 과연 실제 현실의 정치 전선에 직접 대입될 수 있을까? 과연 정치 철학의 이론적 논거가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실천을 필요로 하는 현장 정치에 적용 가능한 것일까?

 

아니, 이론은 원래 과거의 현실적 토대 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지나간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의 특정한 현실을 전제로 제기된 이론적 결론이 미래 현실의 정치적 난제에 있는 그대로 대입되고 적용될 수 있을까? 자고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했다. 윤교수는 헤겔Hegel의 변증법적 국가 이론을 흠모하는데, 헤겔의 국가 이론의 저변에는 성장하는 수구주의 국가, 프로이센이 은밀히 자리하고 있다. 19세기 프로이센을 토대로 형성된 헤겔의 변증법적 국가 이론이 아무런 여과 과정 없이 21세기 한반도의 정치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은 몹시 희박하다.

 

윤 교수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서 다른 문헌들을 끌어들인다. 여기서 다른 문헌 속에 언급되는 견해의 역사적 현실적 맥락은 그에게는 별반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입장이다. 모든 객관적 자료는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원용되는 수단에 불과하다. 하나의 이론은 어떤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장소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것이 다른 시대 그리고 다른 장소에도 정당성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은 크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윤평중 교수가 추구하는 엄정 중립적인 합리성이 주어진 현실에서 공명정대한 수직의 잣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윤 교수의 책에서 천편일률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극단의 시대에 중심을 잡는 일이다. 좌우의 도그마에 관계없이 자유의 합리성에 의한 엄정중립주의의 사고 그리고 이에 근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엄정 중립주의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주어진 현실에서 90도 수직으로 바로 세워진 공평무사함이라고 한다.

 

그런데 주어진 현실적 토대는 변증법적 현실과는 달리 수평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한 시대의 정신은 다수 사람들의 견해에 의존하는데, 좌우 대칭의 견고한 구성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끊임없이 유동하고 움직이는 시계추를 방불케 한다. 가령 21세기 남한의 현실에 자리하는 시대정신의 경향은 수평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한의 정치적 지형도는 어떠한가? 한반도는 36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반일의 성향은 강하나, 반미의 성향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21세기 남한의 국회에는 중도 우파 그리고 극우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 조중동과 같은 신문사 그리고 우편향주의적인 종편 TV 등의 수를 세어보면, 남한 사회가 얼마나 우 편향적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간파할 수 있다. 21세기 남한의 정치 풍토는 우측으로 심하게 기울여져 있다.

 

이는 한반도의 분단 상태와 관련된다. 625사변의 끔찍한 체험은 강렬한 반공주의라는 방어막을 형성하게 했는지 모른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치유되고 극복되어야 마땅하다. 언젠가 리영희 교수가 말했듯이, 새는 두 개의 날개로 난다. 그러나 남한의 정치적 판도는 마치 어설프게 비행하는 시늉 내는 날짐승을 방불케 한다. 날짐승은 좌측의 날개를 거의 잃었기 때문에 비탈길 위에서 우측으로 원을 그리면서, 하늘 위로 비상하려고 하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지구는 약간 기울어진 채 자전한다. 그렇기에 여름과 겨울의 밤낮의 길이가 다르다. 만약 누군가 지구가 기울어진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낮과 밤의 길이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자체 무리한 시도일 것이다. 한 가지 사항을 충고하고 싶다. 극단에서 중심을 잡으려면 땅위에서 무조건 90도 수직을 고수할 게 아니라, 처음부터 어느 정도 기울어진 잣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말이다.

 

시대 정신이 우측으로 향하고 있는 현재 세상에서 올바른 중심을 잡으려면, 좌측으로 기울이진 기준과 잣대가 오히려 올바른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우편향의 시대정신을 용인하지 않은 엄정 중립주의는 그 자체 기울어졌음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좌우 양측으로부터 얼마든지 비난 당할 소지를 지닌다. 오래 전부터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한신대학교의 교수 한 분이 조선일보에 여러 칼럼을 발표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좌우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당하는 경우를 지켜보는 필자의 마음은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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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울력의 시 1
박현수 지음 / 울력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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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너:  “응”.

나: “응”이라는 대답 속에는 동의가 숨어 있군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말에는 주종 관계가 자리하는 반면에 “응”이라는 대답은 이와는 다른 것 같아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 그리고 동등한 관계를 연상시키니까요.

너: 요즈음 젊은이들은 카톡을 주고받을 때 응이라는 단어 대신에 그냥 동그라미 이응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응이라는 단어 속에는 수긍하고 동의한다는 의미가 은밀하게 내재해 있군요

나: 문정희 시인의 시 「응」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햇빛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文字)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너: “응”이라는 단어를 기호학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개의 이응 사이에 하나의 선이 그어져 있지요. 이것은 지평선 내지 수평선 위에 떠 있는 해와 달을 가리킵니다. 사랑의 합일은 해와 달의 결합으로 유추되고 있어요. 기호학적 차원에서는 시인의 지적이 매우 참신하지만, 사랑을 해와 달로 비유하는 경우는 이전에 참으로 많았습니다.

나: 예를 들자면, 어떤 게 있나요?

너: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해와 달의 삭망을 “성스러운 결혼식 ἱερὸς γάμος”라고 일컬었어요. 말하자면 해는 남성을 달은 여성을 상징하는데, 해와 달의 마주침은 그 자체 삭망으로서 사랑의 일치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나: 그러니까 개기일식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너: 네 그렇습니다. 성스러운 결혼식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태양과 달 그리고 지구가 일직선을 이룰 때에 한해서 나타났지요. 성스러운 결혼식으로서의 삭망은 이교도에 의해서 하나의 축제로 영위되었는데, 기독교가 도래하면서 이러한 축제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대신에 남자는 그리스도의 몸 corpus Christi이고, 여자는 교회Ecclesia로 상징적으로 추상화되었어요.

나: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은 신의 비밀을 푸는 열쇠라면, 교회는 신의 비밀을 품는 자물쇠로 의미변화를 이룬 셈이로군요.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서동시집에서 과거에 횡행했던 잃어버린 결혼식을 재론한 바 있지요?

 

너: 괴테의 시편에서는 하템과 술라이카라는 두 남녀가 등장하지요.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살폅기로 합니다. 일단 문 시인의 작품에 집중하기로 해요. 응이 “꽃처럼 피어난 문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자체 화답이기 때문입니다.

나: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은 그 자체 가장 평화로운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러한 결단은 누구의 간섭이나 명령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사랑이 자연스러우려면, 모든 만남을 이끄는 주체는 여성이어야 할 것입니다.

 

너: 문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겠군요. "응"은 가장 뜨겁고 평화로운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시어라고 말입니다.

나: 그렇다면 “응”은 과연 언제 어디서든 간에 조화롭고 아름다운 두 연인의 관계를 표현할까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박현수 시인은 문 시인의 작품을 바탕으로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났다는 문자

너는 동그란 해로 내 위에 떠있고

나는 동그란 달로 네 아래에 떠있어

눈부시다는 그 말

 

그러나 너와 나 사이

저 차가운, 가로놓인 선은 어쩌나

서로 사랑할 때조차

가장 깊이 다가갔을 때조차

살갗과 살갗 사이에

얇은 막처럼

서로를 구분하고 있는

저 자명한 경계는 어쩌나

아무리 끌어안아도

지워지지 않은 저 금은 어쩌나

 

관객은 다 들어도

배우만은 서로 못 들은 척하는 방백처럼

사랑은 저 넘을 수 없는 담을

못 본 체하는

너무나 오래된 게임인 것을 어쩌나

이 뻔한 방백을 우리가

너무 진지하게 말해왔던 것을 어쩌나

끝내 기의에 닿지 못하는

기표처럼 떠돌기 싫어서

슬쩍 없는 것처럼 해 두었던 것을 어쩌나

 

해를 삼키고

바다에 비친 해그림자도 삼키고

어둠을 가르는

저 수평선, 달아오른 칼날

내 위에 뜬 해도

그 아래에 뜬 달도 무릎 꿇리며

저 홀로 빛나는

저 눈부신 불사의 군림 (君臨)

세계에는 오로지 한 줄기 선만 남는다

땅 위에서 들은 마지막

계시의 말

 

(박현수: '응'이란 말, 실린 곳: 박현수: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울력 2015)

 

너: 박시인은 사랑의 갈망과 완성으로 향하는 “응”을 패러디하고 있군요.

나: 네, 라캉을 위시한 수많은 심리학자들도 지적한 바 있지만, 완전한 사랑의 결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두 영혼이 하나라는 생각은 인간이 갈망의 차원 속에서 만들어낸 상상일지 모르지요. 이 점을 고려할 때 영원한 사랑은 하나의 허상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랑은 라캉이 말한 바에 의하면 항상 상호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오로지 어느 짧은 순간 에 한해서 동시적으로 오르가슴을 맛볼 수 있습니다.

 

너: 따지고 보면 해와 달이 서로 겹치는 것은 불과 몇 분으로 제한되어 있지요.

나: 그렇습니다. 사랑의 합일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게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게 사람들로 하여금 끝없이 좌절하게 하고, 그럼에도 절망적인 시지포스로 하여금 사랑의 돌을 굴리도록 작동하는 무엇입니다. 박현수 시인은 연인 사이에 온존하고 있는 구분 그리고 간극으로서의 “”을 지적합니다.

 

너: 그렇겠지요. 사랑은 그 특징에 있어서 어쩌면 “방백”과 같습니다. 배우는 다른 배우가 곁에 서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발언을 관객에게 전할 때가 있지요. 그것이 바로 방백입니다. 제 3자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할 수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모르는 체 하면서 서성거리고 있는 등장인물을 생각해 보세요.

나: 그렇다면 사랑은 하나의 갈망의 차원에서 이해될 뿐, 성취의 순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엇일까요?

 

너: 주어진 현실에서 사랑은 시인에 의하면 “끝내 기의에 닿지 못하는 기표”일 뿐입니다. 사랑이라는 시니피앙이 사랑이라는 시니피에와 일치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바로 이러한 까닭에 박 시인은 두 개의 이응보다, 이응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무정한 선, “수평선”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완벽한 사랑을 처음부터 가로막는 하나의 선 (線)을 “달아오를 칼날”이라고 표현합니다.

나: 박현수의 시 「‘응’이란 말」은 실제 현실에서 두 연인의 사랑의 성취를 차단시키고 가로막는 장애물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의 눈에는 “선”, “수평선”, “칼날”, “자명한 경계”가 안쓰럽게 비치고 안타까울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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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전홍준 지음 / 신생(전망)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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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전홍준 시인은 2020년 말에 시선집 『흔적』을 간행했습니다.

너: 그는 “간결하고 투박한 문체로 작품을 창조하는 고향 시인”입니다. 시편들은 홍준 시인의 활달한 성격과 정교한 투시력이 결합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홍준 시인은 언어로 조작하는 수많은 시인들의 경우와는 달리 압축을 선호하고 단어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나: 그렇지만 시적 주제가 독자에게 수월하게 전달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너: 홍준 시인은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적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정독해야 합니다.

나: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유형의 시 대신에 수사와 수식으로 수놓은 작위적인 시를 선호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전홍준의 시적 가치가 지금까지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매우 아쉬운 대목입니다.

너: 그렇습니다. 홍준 시인의 시는 아프고, 쓰라리며, 애달픈 마음의 체를 통해서 걸러진 누룩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투박하다고 표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그의 시집에 실린 시 「아요」를 살펴볼까 합니다.

 

“서부 경남 어스름 골목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부탁하는 말인데 비굴하지 않고

인절미 같이 쫄깃쫄깃한

 

가뭄에 사생결단, 물꼬싸움을 하다가도

이 한마디에 서로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고

흙 묻은 옷을 털어주기도 하는

 

새벽녘, 음기탱천한 지아비가 잠에 취한

지어미를 은근히 부르면

스르르 치마말기도 풀어지는

 

아요

아요, 몇 번 부르고 나면

대책 없이 그대가 좋아져

심장비밀번호까지 공유하고 싶은 말

아요!” (전홍준: 흔적, 전망 2020, 36쪽 이하)

 

나: 인간을 괴롭히는 네 가지 심리적 하자는 분노 (광기), 고독 (우울), 미움 (질투) 그리고 불안 (강박)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동인은 바로 사랑일 수 있습니다.

너: 인간 개개인은 개별적으로 나누어진 사람들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사랑이라는 매개체로 서로 뒤엉켜 있다는 말씀이로군요.

나: 그렇습니다. 사랑과 우정을 생각해 보세요. 서로 사랑하고 애호하는 사람들은 비록 헤어져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사랑과 관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으며, 바로 이러한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에 고독하고, 지루한, 힘들고 가슴 아프게 하는 삶의 구렁텅이 속에서 위안을 얻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너: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사랑 그리고 연민의 감정이야 말로 더불어 사는 사회적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정서라는 말씀이로군요.

 

나. 무릇 사랑은 한 인간이 인간적 따뜻함을 찾으려는 욕구에서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때 우리는 “아요”하고 말을 걸곤 합니다. 수도권에서는 “저기요.”라고 말하지만, 남도에서는 “아요”하고 말합니다. 수도권에서는 타인이 “저쪽” 내지 “그쪽”으로 표현이지만, 서부 경남에서는 타인이 “이쪽”에 해당하는 “아요”입니다.

너: “아요”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동의를 구할 때, 상대방의 이해를 촉구할 때, 상대방에게 말을 걸 때, 상대방의 관심을 부추길 때,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원하거나 부탁할 때 사용되는 말이 “아요”입니다.

 

나: 시인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 “아요”를 사용하지만, "비굴"한 표현은 아니라고 장담합니다. 왜냐하면 “아요”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표현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떤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의향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가령 네가 나에게 잘해주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으로 어떤 대가를 제공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아요”라는 표현 속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대가 없이” 잘 해주겠다는 마음가짐이 담겨 있습니다.

 

너: 조건 없는 사랑과 우정이 바로 그것인가요?

나: 그렇다고 해서 아요가 “아가페ἀγάπη”와 같은 무조건적인 이타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요 속에는 끈끈한 정을 서로 주고받자는 자연스러운 마음가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너: “아요”가 끈끈한 정을 담는다는 점에서 시인이 “인절미 같이 쫄깃쫄깃”하다고 표현했군요.

 

나: “아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반목에 치유의 “연고를 발라주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요”하고 부름으로써 “흙 묻은 옷을 털어주며” 서로 화해할 수 있습니다.

너: 아요는 지아비와 지어미 사이에서 사랑을 찾는 조용한 보챔의 말일 수 있습니다. 시인이 4연에서 서술하는 것은 결코 선남선녀의 끓어오르는 사랑의 욕망과는 다르지 않나요?. 만일 지어미가 음기탱천하고, 지아비에게 양기가 가득 차 있다면, 이는 신혼부부의 경우일 텐데요.

나: 그렇습니다. 제 4연에 등장하는 남녀는 노년에 이른 부부입니다. 지아비는 지어미를 사랑하고 싶지만, “음기탱천”한 그의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를 잘 이해하는 지어미는 애처로운 마음으로 남편을 위해서 살며시 치마끈을 풉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애틋한 배려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아요는 대책 없이 사람을 좋아하게 만드는 표현, “심장비밀번호”까지 다 내주고 싶은 표현입니다.

 

너: “아요”는 개별적 존재로 따로따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서로 소외된 인간 사이에 하나의 가교를 형성해주는 사랑과 우정의 출발점이 되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 마지막으로 시인에게 한 마디 전할 말씀이 있나요?

 

너: 네, 아요는 서부 경남 지역에만 통용되는 표현이 아니라, 한 반도 나아가 만주 지방까지 통용되는 표현이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서부 경남 뿐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그리고 만주 지역 한인들 대부분은 천성적으로 정이 많고, 평화를 사랑하며, 상대방을 헤아리고 “대책 없”는 사랑과 우정을 베풀려는 마음가짐을 품고 있습니다.

나: 물론 이들 가운데에는 눈앞의 이익 때문에 부모를 배반하고, 친구의 등에 칼을 꽂는 사람들도 있지요.

너: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백의민족, 동이족 사람들은 이를테면 가족과 이웃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애틋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습니다. 폭력을 싫어하는 홍준 시인의 명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라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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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충돌과 문명의 충돌 - 뇌 이론으로 문명의 새판을 짠다
김상일 지음 / 지식산업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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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명의 충돌을 극복하려는 뇌 연구: 김상일 교수의 의 충돌과 文明의 충돌(2007)을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은 뇌의 연구와 문명의 역사를 서로 비교한다는 점에서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의 내용을 자연과학과 접목시킨다는 점에서 신선하면서도 놀라운 내용을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저자는 맨 처음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과 국제 질서의 재편성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1996)에서 어떤 모티프를 찾아내어, 이를 뇌 과학 연구에 접목시킨다. 그렇지만 뇌의 기능과 문명의 충돌을 서술하면서


저자는 동서양의 사고방식의 차이, 중국과 한국의 문화적 대립, , , 도로 요약되는 동양학의 발전과 수용 그리고 한 사상 내지 동학사상의 진가를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가 지적하는 뇌 과학의 연구 결과보다. 뇌 그리고 중국과 한국 사이의 문명적 연관관계를 밝히는 저자의 입장에서 놀라운 식견을 접할 수 있다. 저자는 유, 불 도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피력하고, 고조선 이래로 내려온 선 (), 기 사상 그리고 동학 등을 진단하고 있는데, 논의의 폭이 넓고, 철학적 입장은 공명정대하다. 이에 필자는 경의를 표한다. 일단 내용을 요약한 다음에 문헌 속에 반영된 저자의 입장 및 기타 문헌과 관련된 비판적 사항을 논평하기로 한다.

 

2. 좌뇌와 우뇌, 요소 환원주의의 편견: 에쉬브록에 의하면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가 서방 기독교와 동방 기독교의 특징을 드러낸다. 서방 기독교는 고딕 건물로 요약되는 권위성과 합리성을 표방한다면, 동방의 기독교는 돔형의 건물로 요약되는 반-권위적인 체제로 성령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또한 지구 전체를 고려할 때 서양은 우랄 알타이 산맥을 기준으로 좌반구를, 동양은 우반구를 나타내기도 한다. 문제는 서양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우반구의 특징을 사악시하고, 열등하게 취급했다는 것이다. 이는 서양이 동양을 멸시하고, 정치적으로 공략한 오리엔탈리즘의 이유로 작용하기도 했다


동과 서의 양반구의 특징은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 가령 인도와 중국을 비교할 때 힌두교는 좌반구적이고, 불교는 우반구적이다. 중국과 한국 그리고 영남과 호남을 제각기 서로 비교할 때에도 이러한 등식이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다. 그런데 뇌 연구에서 놀라운 것은 좌반구와 우반구의 기능이 독자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뇌수술을 받은 환자를 통해서 그리고 개미의 실험을 통해서 밝혀졌다. 모든 것을 단절시키는 서양의 이원론은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위험하고 폭력적이다. 나아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합쳐져서 전체가 된다는 사고방식은 요소 환원주의에서 비롯한 편견이라고 한다.

 

3. 뇌의 기능과 뉴런의 시냅스, 순환과 되먹힘의 관계: 뇌의 좌반구는 대체로 언어적 능력을 관장하는 반면에 우반구는 정서 능력 내지 공간 개념을 담당한다. 뇌의 반구는 뇌량 (脳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 마치 인간의 뇌가 통합과 분열 그리고 재통합의 과정으로 상호 보조하듯이, 좌뇌와 우뇌는 개별적으로 다르게 작용하지만, 기능상 결코 서호 단절되어 있지는 않다. 뇌의 신경 세포 뉴런 속에는 여러 개의 수상 돌기 그리고 하나의 축색 돌기가 있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이접과 연접이 뇌 기능의 상호 관련성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독립된 뉴런의 돌기 말단이 다른 대상 세포와 만날 때 접촉하는 부위는 시냅스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 뉴런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시냅스를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로써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의 뇌세포는 하나 내지 여럿의 순환적인 조화 관계 속에서 정보를 전달한다. 나아가 뇌의 삼층 구조는 인간 존재의 모순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뇌의 파충류 층reptile complex”을 둘러싼 것은 포유류 층limbic system”이며, 이를 둘러싼 것은 신피질 층neocortex”이다. 뇌의 삼층 구조는 인간의 역사의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파충류 층의 공격 성향은 포유류 층의 소속감과 조화로움의 성향과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처한다. 사랑과 갈등이 서로 반복되고 순환되는 이유도 이러한 두 가지 뇌의 기능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뇌와 마찬가지로 우주에서도 개체와 전체는 카오스와 프랙털 이론에 의해 서로 순환 내지 되먹힘의 관계에 처해 있다.

 

4. 뇌의 기능과 종족 사이의 갈등: 뇌는 약 3만여년 전에 갑자기 신피질층이 다른 층에 견주어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뇌의 좌우 및 상중하 층의 균열과 억압 구조는 청동기가 시작되는 기원전 2000년부터 시작되어 차축시대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에 처절할 정도로 균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좌뇌의 기능이 우뇌의 그것을 압살시키고, 의식은 무의식을, 남성은 여성을, 서양은 동양을, 중국은 한국을 차례로 무시하거나 좌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뇌의 특성에 해당하는 감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 영혼적인 것은 처참할 정도로 사악한 무엇으로 간주되고 말았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고대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 널리 퍼져 있던 무속과 선 내지 기의 사상 등이 -마치 갑골문이 사장되었듯이- 유불도의 좌뇌적 특징 속으로 포섭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선 () 문화는 좌뇌적 특성과 우뇌적 특성을 조화롭게 혼합시켜 부분적으로 명맥을 이어 왔다. 이는 1675규원사화 揆園史話그리고 1911년 계연수의환단고기 桓檀古記에 지적되고 있다. 이에 반해 중국과 일본 문화에서는 두 가지 특성의 조화로움이 발견되지 않는다. 가령 일본은 자기중심적으로 타자를 거부하다가 애집증 inzestuöse Krawatte”에 시달린 다음에, 현대에 이르러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반면에, 중국은 다민족 (동이족도 포함됨)에 의해 의식이 정신 분열schizophrenia”의 조짐을 보이다가 현대에 이르러 전체주의의 기치아래 일자 一字병에 시달리고 있다.

 

5. 두 가지 이질성을 아우르는 뇌량 그리고 한국의 고대 문화: 한국의 고대 문화가 좌뇌와 우뇌의 조화를 이루는 뇌량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까닭은 차축 시대 이전에 송화강 유역에서 풍요로운 홍산 문화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홍산 문화는 황하강 유역의 중국인들의 용산문화보다 1000년 앞선 문명으로서 강한 모계 사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서양의 대부분 역사가들이 중국 송화강 유역의 용산문화를 고대 중국의 문화라고 단정 지은 까닭은 홍산 문화의 발굴 작업이 20세기 이후에 비로소 활발히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에 대한 대표적인 문헌 가운데에는 카를 야스퍼스의 역사의 근원과 목표 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1949)가 있다. 사실 한반도에 존재했던 홍산 문화는 동서양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못했다. 홍산 문화의 흔적은 최근에 유물로 발굴되었고, 특히 무속 내지 미신의 요소로 인하여 학계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 연구를 통하여 한반도에 철학이 있기 전에 오직 무속밖에 없었다는 정설에 처음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고대에 선층의 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역설한 바 있다. 신도 (神道), 선도 (仙道), 낭도 (郎徒) 등은 모두 선층을 일컫는 말이다. 서양 문명은 기원전 2000년경의 시대에 좌뇌와 우뇌의 분열 그리고 세 단계의 뇌 층이 연쇄적인 충돌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는 남성신이 여성신을 살해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하늘의 남성신, 제우스 (그리스), 마르두크 (바빌로니아), 인드라 (인도)는 땅의 여성신, 타이폰 (그리스), 티아마트 (바빌로니아), 브리트라 (인도)를 잔인하게 살해했던 것이다.

 

6. 한국의 선 사상 그리고 수기연성의 단전: 한국의 고대 문화는 처음부터 좌뇌와 우뇌, 뇌의 세 가지 층을 조화롭게 포함하는 뇌량의 기능을 발전시켜 왔다. 한국의 선교는 신채호가 지적한 대로 특성상 도교와 매우 비슷하게 때문에 혼돈을 불러일으킨다. 그렇지만 선교의 특징에 해당하는 천선, 대국, 국선이라는 명칭은 도교가 유입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단군이 활동한 시기로부터 1000여년 이후에 태동한 것이 도교였던 것이다. 신라의 화랑,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대선은 모두 선교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러한 사항은 최치원의 난랑비서 (鸞郎碑序)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삼국 시대 이후로 중국의 유, , 도의 사상이 제각기 옥석이 가려진 채 신중하게 수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하여 한국 문화 속에서는 무 () 그리고 선 ()의 특징이 사장되지 않은 채 전해내려 올 수 있었다. 특히 우리가 반드시 지적해야 하는 것은 한국적 선 사상 속에 자리하고 있는 내단 양생의 특징이다. 다시 말해 수련을 쌓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심리적 정신적 자양을 섭취한다는 사실 말이다. 기를 기르기 위해서는 수기연성 (修己煉性)하는 능동적 과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자기언급과 반성적 의식으로서의 내단(内丹)이 필요하다. 단군 신화에서 호랑이가 마늘과 쑥으로 연명하는 고통스러운 시기를 참지 못하고 동굴을 떠난 반면에, 곰이 끝까지 견뎌낸 사실은 한국인의 내면에 끈기와 혹독한 인내의 정신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이 역시 내단의 전통과 관련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노력의 과정을 거친 사람으로서 김시습 그리고 수운 최제우를 언급할 수 있다.

 

7. 문화적 침범과 서구화 그리고 이와는 다른 홍산 문화: 서양의 이원론의 대립은 좌뇌와 우뇌의 균열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대립은 서양의 신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은 기독교를 비서구 국가에 전파하고, 이들이 서구화하기를 바란다. 그들의 3 M 정책은 선교Mission”, “상인Merchant” 그리고 군대Military” 등을 동원하는 일이었다.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를 잠식하고 파괴하는 것은 신화에서 선취되고 있다. 문명사의 대서사시는 동양과 서양 사람들의 충돌과 갈등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가령 우랄알타이어 산맥에 거주하던 수메르 인들은 메소포타미아로 이전하여 서양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10세기의 칭기즈칸은 서양을 정벌하였고, 19세기부터 시작된 서세동점 (西勢東漸)의 역사는 충돌과 갈등을 말해준다


충돌과 갈등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여성 착취 내지 여성 살해의 역사를 심화시켰다.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고대 인도에서 여성 신은 남성 신에 의해서 무차별하게 살해당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홍산 문화 이후의 한반도에서는 충돌과 갈등이 아니라, 문화적 화해와 아우르는 양상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예컨대 단군 신화에서 이러한 폭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남성신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의 대모 웅녀와 결혼한다. 이는 고대 한국의 문화가 균열이 아니라, 어떤 화합 내지 조화를 실천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두 개의 이질적인 특성은 서로 대립하는 대신에 마치 음과 양처럼 서로 아우르고 있다. 이는 어둠과 태양의 상호 만남으로 비유될 수 있다. 환웅이 밝음 ()을 상징한다면, 웅녀는 어둠 ()을 대변한다. 곰이라는 말은 검음내지 어둠을 지칭한다. 일본에서 신의 이름은 가미 かみ인데, 이는 한국말 에서 비롯한 것이다.

 

8. 음양의 아우르기로서의 씨름 그리고 단군 신화 속의 조화로움: 외국 문물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일본과 중국은 화혼양재 (和魂洋才), 중체서용 (中体西用) 등을 외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것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서양 물물의 수용은 중국과 일본의 경우 토착 문물의 상실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수운 최제우는 포함삼교의 연장선상에서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장점을 체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가 바라는 후천개벽은 포함 삼교 (包含三教) 그리고 기독교의 인격신의 바탕 하의 후천개벽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이러한 노력을 방해하자, 수운의 전투적 비판의 칼날은 일본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음양의 아우르기와 단군 신화의 조화로움은 각저총의 씨름도에서 나타난다. 고대 한국의 전통적 무술은 씨름이었다. 씨름은 상대방을 죽이고 무찌르는 게 아니라, 힘 겨루는 일에서 시작하여 힘 겨루는 일로 끝이 난다.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도에서는 신단수 나무 아래에서 두 남자의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곁에는 곰과 호랑이가 드러누워 이를 관망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한쪽 남자가 매부리코를 지닌 서역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단군 신화를 떠올리며 곰과 호랑이가 굴속에서 사람이 되려고 서로 경쟁하는 것을 씨름으로 묘사한 게 아닐까?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살해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서로 힘을 겨루는 일이야 말로 바람직한 인간의 행동이 아닐까? 씨름은 서로 떨어져서 경기하는 레슬링과는 달리 한 순간도 상대방과 떨어질 수 없다. 이는 외인적이 아니라, 내인적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씨름에는 다른 사람의 힘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쓰러뜨리는 기술이 많다. 이로써 씨름의 관계는 충돌과 투쟁이 아니라, 음양의 아우르기로 상징화될 수 있다.

 

9. 홍산문화 그리고 동학의 중요성: 미래의 문화는 저자에 의하면 동양과 서양, 중국과 한국, 남성과 여성, 인격신과 기 에너지 등의 대립이 아니라, 서양의 이원론적 균열과 충돌 대신에 조화와 화합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문화는 충돌의 과정에서 승리와 패배로 등을 돌릴 게 아니라, 상호적으로 서로 장점을 교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뇌량이 그러하듯이 좌뇌적인 무엇은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우뇌적인 무엇과의 결합 시에 상호 협력하고 아우르는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미래의 건전한 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남성 중심적 신학 Theology”은 평등 호혜의 의미를 받아들여서 여성 중심적 신학 Thealogy”으로 변해야 한다. 이 점이야 말로 단군 신화에 언급되는 재세이화 (在世理化)의 정신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는 저자에 의하면 고대 한국의 홍산 문화 그리고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에게서 발견된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저자가 강조하는 홍산 문화와 동학을 제각기 별개의 이질적인 무엇으로 파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동학은 처음부터 내선의 특징을 지닌 고대의 무속과 선 ()을 통해서 본연의 자양을 공급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학이 인격신인 하날님과 비인격적 지기 (至気)”를 동시에 수용하고 이를 결합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선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를 고려할 때 동학은 세계 역사의 차원에서 고찰할 때 두 개의 근본적인 사상과 감정을 조화롭게 수용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서양과 동양 사이의 사상적 대립, 중국과 한국 사이의 권력 다툼,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적 체계가 동학이기 때문이다.

 

10. 한 가지 아쉬운 점, 결론을 대신하여: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의 충돌과 文明의 충돌에서 언급되고 있는 홍산 문화와 동학사상의 의미가 정치적 차원에서의 해석 확장을 통해서 본연의 의미가 약간 퇴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김대중의 민주주의론 그리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언급하면서 문명의 충돌과 관련되는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 해결책을 덧붙이고 있다. 자고로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당위성으로서의 사고는 필자의 견해로는 주어진 현실 정치의 방향을 찾으려는 정책과는 일차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김대중과 김일성의 정치적 입장과 그들의 이상이 아무리 한국의 선맥 문화의 전통에 입각해 있다 하더라도, 실제 현실에서는 수많은 오해와 비극을 불러일으킨 게 사실이다. 이를테면 한반도에서 발생한 625 사변을 생각해 보라. 설령 당시 김일성의 가슴속에 한민족의 통일을 위한 거룩한 목표가 자리했다 하더라도, 이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초래하고 말았다. 삼태극의 구조가 아무리 하나와 여럿으로 명명되는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수단은 무엇보다도 평화를 전제로 해야 한다. 물론 분단의 해결은 저자가 말한대로 세계사의 갈등과 비극을 극복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결은 차제에 평화적 중립 통일의 기치 하에 제시되는 어떤 합리적이며 실천 가능한 정책을 통하지 않으면 그 자체 무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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