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 : 지식인과 실천 問 라이브러리 6
윤평중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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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 교수의 글은 논의에 있어서 명징하고 질서정연하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강한 논리적 견해가 때로는 사실적으로 적확한 내용 파악을 힘들게 만들 때도 있다. 이를테면 그는 송두율 교수의 사회학 내지 정치관을 비판한다. 송 교수에 대한 그의 비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소련 그리고 북한 등에 대한 부정적 시각 내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유형의 반공주의의 성향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신상초의 공산주의 비판을 반복하는지 모른다.

 

한반도의 정세의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려고 하는데, 이를 위해서 윤교수가 내세우는 것이 변증법적 이성 국가에 관한 믿음이다. 물론 이성적 국가를 정립시키고, 이러한 토대 하에서 혼란과 갈등을 잠재울 수 있는 이성적인 정책에 요청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 변증법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인데, 과연 실제 현실의 정치 전선에 직접 대입될 수 있을까? 과연 정치 철학의 이론적 논거가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실천을 필요로 하는 현장 정치에 적용 가능한 것일까?

 

아니, 이론은 원래 과거의 현실적 토대 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지나간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의 특정한 현실을 전제로 제기된 이론적 결론이 미래 현실의 정치적 난제에 있는 그대로 대입되고 적용될 수 있을까? 자고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했다. 윤교수는 헤겔Hegel의 변증법적 국가 이론을 흠모하는데, 헤겔의 국가 이론의 저변에는 성장하는 수구주의 국가, 프로이센이 은밀히 자리하고 있다. 19세기 프로이센을 토대로 형성된 헤겔의 변증법적 국가 이론이 아무런 여과 과정 없이 21세기 한반도의 정치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은 몹시 희박하다.

 

윤 교수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서 다른 문헌들을 끌어들인다. 여기서 다른 문헌 속에 언급되는 견해의 역사적 현실적 맥락은 그에게는 별반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입장이다. 모든 객관적 자료는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원용되는 수단에 불과하다. 하나의 이론은 어떤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장소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것이 다른 시대 그리고 다른 장소에도 정당성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은 크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윤평중 교수가 추구하는 엄정 중립적인 합리성이 주어진 현실에서 공명정대한 수직의 잣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윤 교수의 책에서 천편일률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극단의 시대에 중심을 잡는 일이다. 좌우의 도그마에 관계없이 자유의 합리성에 의한 엄정중립주의의 사고 그리고 이에 근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엄정 중립주의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주어진 현실에서 90도 수직으로 바로 세워진 공평무사함이라고 한다.

 

그런데 주어진 현실적 토대는 변증법적 현실과는 달리 수평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한 시대의 정신은 다수 사람들의 견해에 의존하는데, 좌우 대칭의 견고한 구성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끊임없이 유동하고 움직이는 시계추를 방불케 한다. 가령 21세기 남한의 현실에 자리하는 시대정신의 경향은 수평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한의 정치적 지형도는 어떠한가? 한반도는 36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반일의 성향은 강하나, 반미의 성향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21세기 남한의 국회에는 중도 우파 그리고 극우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 조중동과 같은 신문사 그리고 우편향주의적인 종편 TV 등의 수를 세어보면, 남한 사회가 얼마나 우 편향적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간파할 수 있다. 21세기 남한의 정치 풍토는 우측으로 심하게 기울여져 있다.

 

이는 한반도의 분단 상태와 관련된다. 625사변의 끔찍한 체험은 강렬한 반공주의라는 방어막을 형성하게 했는지 모른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치유되고 극복되어야 마땅하다. 언젠가 리영희 교수가 말했듯이, 새는 두 개의 날개로 난다. 그러나 남한의 정치적 판도는 마치 어설프게 비행하는 시늉 내는 날짐승을 방불케 한다. 날짐승은 좌측의 날개를 거의 잃었기 때문에 비탈길 위에서 우측으로 원을 그리면서, 하늘 위로 비상하려고 하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지구는 약간 기울어진 채 자전한다. 그렇기에 여름과 겨울의 밤낮의 길이가 다르다. 만약 누군가 지구가 기울어진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낮과 밤의 길이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자체 무리한 시도일 것이다. 한 가지 사항을 충고하고 싶다. 극단에서 중심을 잡으려면 땅위에서 무조건 90도 수직을 고수할 게 아니라, 처음부터 어느 정도 기울어진 잣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말이다.

 

시대 정신이 우측으로 향하고 있는 현재 세상에서 올바른 중심을 잡으려면, 좌측으로 기울이진 기준과 잣대가 오히려 올바른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우편향의 시대정신을 용인하지 않은 엄정 중립주의는 그 자체 기울어졌음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좌우 양측으로부터 얼마든지 비난 당할 소지를 지닌다. 오래 전부터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한신대학교의 교수 한 분이 조선일보에 여러 칼럼을 발표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좌우 양측으로부터 비난을 당하는 경우를 지켜보는 필자의 마음은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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