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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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욕망을 어떻게 떨칠 수 있을까? 혹은 디오게네스: 위대한 극기주의자, 디오게네스는 거대한 통을 자신의 집으로 삼고, 거기서 한 마리 개처럼 살았습니다. 자청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 - 그게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표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측컨대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사고와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가난은 불편함과 짜증을 동반하게 하니까요. 디오게네스는 공공연하게 자위함으로써 성욕을 해결하였습니다


디오게네스는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다음과 같이 푸념을 터뜨렸습니다. “, 자위하는 식으로 배를 쓱쓱 만지면서 굶주림을 달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디오게네스는 먹을 게 많이 없었기 때문에, 소식해야 하였습니다. 그 때문이었을까요? 90년 살다가 세상을 하직했으니, 다른 사람들의 두 배 정도 오래 산 셈입니다. 디오게네스는 문헌을 멀리하고, 오로지 자신의 인성의 수양에 전력투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회의주의의 지조를 느낄 수 있습니다. 

 

12.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헤테로피아: 미셀 우엘벡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새로운 인간의 몸, 새로운 인간의 존재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과거의 작가들이 주로 유토피아라는 이상적 공간을 설정하여, 이상적 (혹은 끔찍한) 모델을 설계했다면, 우엘벡은 이러한 사회적 구도 대신에 마치 사이보그와 같은 새로운 인간의 존재를 설정하여, 그 속에 어떤 해결책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이 경우 인간의 몸 자체가 하나의 유토피아의 영역과 같습니다


새로운 인간의 몸은 미셀 푸코가 언급한 유토피아와는 다른 하나의 헤테로피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가령 푸코는 사회가 강요하는 지배로부터 벗어난 공간을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1974)에서 제레미 벤탐Jeremy Bentham의 파놉티콘(Panopticon, 일종의 원형감옥)을 구체적 예로 들면서, 청년 수련원, 양로원, 요양원, 감옥, 정신병동, 군대의 막사, 묘지, 영화관, 극장, 정원, 박물관, 도서관, 축제로 활용되는 들판, 숙박시설, 홍등가, 여객선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찰할 때 새로운 인간의 몸 자체가 하나의 헤테로피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3차원의 공간에 짓눌리면서 살아갑니다. 3차원의 공간은 인간을 구속하는 수단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인간이라는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이러한 3차원의 공간에 구속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인간은 죽지 않는 존재이므로, 성 생활을 통해서 이어져 나가려고 하는 종족 보존의 욕구는 불필요하기까지 합니다.

      

13. 유토피아의 공간으로서의 몸, 혹은 소립자: 우엘벡은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철학자 파스칼이 성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오르가슴은 습관의 문제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사실 성적 오르가슴은 인간이 습관적으로 갈구하는 오르가슴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성적 파트너를 찾아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려고 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가령 인간의 성적 차이는 인간의 성적 갈망을 방해하는 요소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인간에게는 성적 차이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요약되는 요철 (凹凸)의 결합이 없이 성적 욕망이 충족될 수 있다면, 이는 인간 삶을 이별과 고통, 불행과 슬픔을 떨치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가브리엘 푸아니Gabrielle Foigny는 자신의 소설에서 양성구유의 유토피아를 설계한 바 있습니다. 만약 한 인간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면, 사랑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은 몸속에 소립자, 다시 말해서 크라우체 소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남성과 여성의 짝짓기 없이 크라우체 소체의 작용으로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황홀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14.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인간의 쾌락으로써 젊은 독자들을 우롱하는 거짓말쟁이들이다.: 만약 인간이 신과 같이 죽지 않고 스스로 희로애락애오욕의 감정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이는 과연 행복한 삶을 위한 전제조건이 될까요? 과학 기술의 개발로 인하여 불사의 존재 내지 소립자를 활용하여 쾌감을 얻는 존재가 세상에 탄생하게 된다면, 이는 과연 바람직할까요? 이에 관해서 우엘벡은 아무런 해결책을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엘벡의 문학의 가치는 이러한 물음으로써 종결되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우리가 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은 대체로 충족되지 못한 사랑의 갈망 그리고 이로 인한 욕망의 해소 등으로 요약될 것입니다. 마치 헤밍웨이가 전쟁에다 달콤한 사랑이야기를 가미시켜서, 베스트셀러 소설을 발표한 것처럼, 우엘벡 역시 사이언스 픽션의 기상천외한 상상에다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이야기를 가미시켰을 뿐입니다. 인간의 쾌락을 농락당하느니, 차라리 쥘 베른의 소설 해저 이만리를 읽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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