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슬부슬 내리는 보슬비를 등지고 법당에 앉아 불상을 바라본다. 그윽한 백단 향과 습기를 머금은 나무 내음이 주변을 메운다. 소설에 빠질수록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경험인지 모호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랬을 거야.”가 “그랬었지.”로 바뀐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집에서, 가족이, 우리가 어쩌다 가는 곳에서, 그들이 최은미 소설에서 차갑다가 뜨겁다가 가라앉다 차오른다. 


절이 집이었던 적이 있다. 회색 법복을 입은 할머니가 법당에 앉아 바구니에 든 염주를 굴린다. 사월초파일이 가까워지면 엄마는 커다란 냄비로 뽀얗고 끈적한 풀을 만든다. 마당에는 어른 키 정도의 쇠막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지고 그 사이로 줄이 이어진다. 염주를 세던 할머니가 잠깐 자리를 비운 법당에, 지금보다 젊었던 엄마와 어렸던 내가 앉아 함께 연등을 만든다. 철사로 만든 연등 틀에 하얀 종이가 둘리고 뽀얗고 끈적한 풀이 엄마 손에서 종이 꽃잎과 엉긴다. 엄마의 손이 새하얀 연등에 닿을수록 자줏빛, 초록빛, 하얀빛 종이 꽃잎이 달린다. 연등이 핀다. 


소설을 담을수록 접어둔 기억이 펴진다. 마음을 따라갈수록 묻어둔 감정이 솟는다. 최은미 작가 식 전개가 내게 주는 감각이다. 한여름 큰비가 내리기 전 퍼지는 더운 공기 같던 ‘시작’이 천둥과 번개, 벼락과 섞이고 굵은 빗줄기를 뿌리며 ‘끝’으로 달려간다. 제자리에서 평온한 건 글자밖에 없다. 이야기와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최은미 작가 만든 세계에서 세차게 흔들린다. 그 세계에는 볼 수 없어도 믿어지고 깨져도 이어지며 사라져도 살아있는 것들이 있다.


《美山》에서 두 남동생을 둔 ‘나’는 막내 동생 생일을 맞아 오랜만에 집을 찾는다. 엄마는 나물볶음 요리로 상을 차리고 ‘나’는 엄마와 첫째 남동생 은욱과 은욱의 어린 딸 나윤이 함께 저녁을 먹는다. 정작 생일을 맞은 막냇동생 은석은 아직 자리에 없다. 《네게 내가 나일 그때》 속 소설가 ‘유정’은 친족 성폭력에 관한 주제로 소설을 발표한다. 소설 발표 후 동생 ‘유태’와 어렸을 때 한동네에서 자란 ‘창용’ 오빠를 만나러 고향 미산에 간다. 늘 누나에게 살가운 ‘유태’는 누나가 쓴 소설 이야기를 할 때면 차갑다.


기억하기 싫어도 지워지지 않고 지났지만 계속 지금을 살며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를 지은 사람들을 최은미 작가는 안다. 그들이 아파트에 사는 것도 알고 절이나 수련원, 공방, 공원 같은 곳에 사는 것도 안다. 그들이 차갑다가 뜨겁다가 가라앉다 차오를 순간이 언제인지도 안다. 최은미 작가는 모두 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21-09-11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