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충격적이다. 처음에는 어려운 말만 잔뜩 써놓은 심오한 책인줄 알았다. 의미를 깨닫고 나면 문장 하나 하나가 인상깊은 글이다. 짧은 책이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을 몇 번 씩이나 다시 읽었다.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숨겨진 착취 구조에 의해 착취당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채 착취당하고 있다'는 '자본론'의 생각 구조와 일치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한발 더 나아간 지점은, 현대인은 착취를 당한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더 착취하려고 내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번에 소화하기 어려워 몇번이나 곱씹을 정도로 여운이 깊게 남은 책이다. 피로사회를 소화하다가 내가 피로해질 것 같다. 메세지 자체는 간단하다. 모더니즘-면역학적 시대-규율사회로 표현되는 지난 세기와 달리, 현재는 포스트 모더니즘-탈면역학적 시대-성과사회로 이미 변화했거나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 그래서 지난 시대에 통용되었던 이론들로는 지금 시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현 시대를 설명하고자 하는 헛된 노력들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판한다. 이 과정에서 언급되는 철학자들이나 이야기들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갖고 있었다면 훨씬 이해하기 편했을 것 같다. 하지만 철학적 논리와 그에 대한 비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시대에 대한 저자의 해석과 메세지는 충분히 명확하게 읽어낼 수 있다. 저자는 계속해서 우리 시대를 긍정성의 과잉이라고 정의하고, 그에 맞서는 부정성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긍정성의 과잉은 오히려 수동적이다.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능동적 부정성이 필요하다. 스스로 고독에 빠져있을 때 만큼 덜 외로운 것은 없다.​​

​​

 우리는 평소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야기에는 오히려 관심이 없고, 어렴풋이 알고 있던 생각들에 힘을 더해주는 이야기에 더욱 끌리는 것 같다. 안개 속에 있듯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저명한 철학자가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정리해주니, 마치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이 이것이다.'라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저자의 심오한 철학적 생각들을 내가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생각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위험까지 있다. 시대의 확신을 강력하게 뒤집어버린 저자의 통찰력에 그 정도로 강렬하게 감탄하고, 빠져들었다.


 이 문단은 자칫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다. 놀랍게도, 저자는 책의 제목인 '피로 사회'를 지적하기 보다는 오히려 '지향'하는 듯 하다. 여기서 말하는 피로란 영감을 주는 피로,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내 생각엔 '우리-피로'라는 말이 가장 멋진 표현인 것 같다. 서로를 향한 '긍정적 피로'를 갖는 사회는 오히려 바람직하다.

 서점에 넘쳐나는 자기계발서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 역시 새롭다. 나 역시 자기계발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편이다.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당신이 이들처럼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실패의 요인을 사회 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감추어버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른 시각에서 본다. 역자 후기의 설명을 빌리자면, '성공한 개론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저자는 그것을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본가이며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의 열망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작 인간 자신은 소진되고 마모된다.

 이 지점에서 충격은 극대화된다. 시대는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고, 더 많은 성공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라고 부추긴다. 우리는 다양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그 무엇도 될 수 있다고 말하며, '할수 없는 것'은 없다고 한다. 개개인의 주체적인 성장에 대한 시대의 확신은 확고하다. 그러나 이 시대의 자유는 오히려 스스로를 착취할 자유이다. 개개인의 의식 발전이 시대의 변화를 가져 왔다는 확신과 달리, 시스템이 더욱 가속화된 발전을 위해 새로운 의식을 가진 인간상을 제시했다. 우리가 의식의 발전이라 믿었던 시대의 확신들은 사실 시스템의 요구일지도 모른다. '자본론'보다 더욱 교묘하고 은밀해진 착취의 시대에서,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도 못한 채 한없이 피로해진다. 비록 자율화된 자기착취의 시대 구조를 벗어날 순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삶의 통찰력에서 현저한 차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대 구조를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이번에도 역자 후기의 설명을 빌려야겠다. '... 한병철은 시스템이 이상적인 자아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다면, 개개인이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각성하는 데서 비로소 시스템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단지 우리가 시대적 피로의 이유를 의식하는 지점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 P13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 P28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 P29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 P30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 P32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 P49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 P66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 그런 피로를 통해 비로소 머물러 있는 것, 한곳에서의 체류가 가능해진다. - P68

한트케는 오히려 "우리-피로"라고 말한다. 이때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게 아니라, 한트케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 - P71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 P71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은 자아 감정의 고양을 위해 의식적으로 "회피"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 P89

개성을 확장하고 변형하고 새로 발명해야 한다는 명령이 그 이면에서 우울증을 초래하는데, 그러한 명령의 원천은 정체성과 관련된 상품이다. 사람들이 정체성을 자주 바꾸면 바꿀수록 생산은 더욱 큰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 P99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 P103

외적 지배기구의 소멸은 강제구조의 제거로 이어지지 않고, 다만 자유와 강제의 통합을 가져올 뿐이다. 성과 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 자본주의 시스템은 더욱 가속화된 발전을 위해 타자에 의한 착취에서 자기 착취로 전환한다. - P1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