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 그런데, 삶이란 무엇인가 + 그런데, 노트 세트 - 전3권
롤프 도벨리 지음, 유영미 옮김 / 나무생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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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없이 질주하면 질책’ 받는다!


롤프 도벨리(지음), 유영미(옮김)(2018).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서울: 나무생각.

롤프 도벨리(지음), 유영미(옮김)(2018). 《그런데, 삶이란 무엇인가》. 서울: 나무생각.



살면서 대학교육을 받는 운 좋은 사람도 있지만 집안 사정으로 대학에 가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대학은 꼭 경제적 여건이 따라줘야 가는 학교가 아니다. 기존 대학에 가지 못하면 대학보다 더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대안적인 대학이 많다. 예를 들면 제가 설립 준비 중에 있는 들이대학도 여기에 속한다. 들이대학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면서 몸으로 체험적 지혜를 배우는 대학이다. 들이대학교는 그럼에도(島)라는 섬에 있다. 들이대학교와 어깨를 겨루는 대학이 최근에 또 나타났다. ‘그런대’라는 대학이다. ‘그런대’는 ‘그런데’에서 유래된 대학 이름이다. ‘그런대’에 가면 ‘그런데’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세상의 이치를 배워나가는 위대한 철학자가 있다. ‘그런대’는 ‘그런데’가 생각하는 문제와 질문으로 자각에 이르도록 유도하는 교육철학을 대학의 설립이념과 교육방침으로 삼고 있다. ‘그런대’에 입학하면 전공에 관계없이 두 개의 교과목을 이수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롤프 도벨 리가 쓴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와 《그런데,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배우는 교과목이다. 이 두 과목은 인간은 질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대답을 찾는 가운데 인간과 삶, 자연과 우주의 원리와 이치를 배울 수 있다고 가정한다. 교육의 핵심은 정답 찾기보다 질문이나 문제제기를 통해서 심오한 각성과 통찰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인생에 한 번은 물어야 할 질문들, 정체를 노출시키는 엉뚱하고 진지한 질문들, 날카로운, 혹은 새로운 질문들, 당신의 속을 슬쩍 떠보는 질문들, 마음속 소중한 것을 이끌어내는 질문들, 직접적이고 현실적이며, 지적인 질문들, 상냥하거나 예의를 갖추지 않고 치고 들어오는 질문들, 자신의 목표를 새롭게 만나게 하는 질문들, 탁월한 삶의 철학이 담긴 질문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묻고 답하는 질문들이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와 《그런데, 삶이란 무엇인가 》책을 관통하는 질문들이다. “현명한 사람은 어리석은 질문으로부터 배우고, 멍청한 사람은 현명한 대답으로부터 배운다.” 브루스 리(Bruce Lee)의 말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정답을 찾는 모범생 육성에 교육적 노력을 다해왔다.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인재는 질문을 잘하거나 문제를 잘 내는 문제아, 즉 모험생이다. 모험생은 주어진 문제에 정답을 찾기보다 그 누구도 던지지 않은 질문을 던져 놓고 그 답을 찾으러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사람이다. 


‘그런대’에서 육성하려는 인재가 바로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와 《그런데, 삶이란 무엇인가》와 관련된 다양한 질문을 던져놓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거듭하며 다양한 체험을 통해 온몸으로 배우는 문제아다. “한 사람의 수준은 대답이 아닌 질문 능력으로 판단할 수 있다.” 18C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 볼테르의 말이다. 질문 능력을 배우는 하나의 대안이자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해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두 과목을 공부하러 떠나보자.



그런데나는 누구인가


“당신의 생명이 어떤 상황에서 잉태되었는지 알고 싶은가요? 합의된 관계였는지, 술이 작용했는지, 당신이 만들어지는 순간 어떤 생각이 오갔는지 등등”(16쪽). 사실 이런 질문에 호기심으로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떤 사연을 품고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우연일까 필연일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 수도 있고 필연을 전제로 만난 우연이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질문을 받으면 그 문제를 갖고 씨름을 시작한다. 어찌 되었든 나는 태어난 사람이다. 이제 운명을 거슬러 살아가야지, 살아가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20쪽) 돌직구 같은 질문을 받는 순간 한 참을 사색에 잠기다 사색이 될 뻔했다. 솔직히 아직 나를 잘 모르겠다는 고백이 정답일 수도 있다. 나를 잘 모르기 때문에 나를 탐구하고 실험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몸소 경험하면서 나의 정체성을 밝혀나가는 험난한 탐구 여정인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부단한 탐구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도 모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찾아 평생 공부하는 여행을 즐기는 자세로 살아가는 길만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지름길이다.



“삶의 이유와 목표를 근본적으로 캐물은 것이 언제였나요? 아니면 그때그때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가나요?”(26쪽). 많은 사람이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사는 이유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을 생각해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간다. 왜 그렇게 어디로 빨리 달려가는지도 모른 채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삶의 근본을 뒤흔드는 질문은 실종된 지 오래다.  나를 멈추게 만드는 매개체가 바로 질문이다. 익숙한 질문이라도 생각했지만 근본적인 질문이 바로 이런 유형에 속한다.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여기가 어디지?” “여기 있는 나는 누구지?” 이런 세 가지 질문이 내가 예전에 교통사고로 정신을 잃은 다음 병원에서 정신이 깨어난 다음에 던진 질문이다. 익숙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삶의 근본을 뒤흔드는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지성이 스스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해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물음 아래 밑줄을 긋는 일입니다(9쪽).” 우치다 타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에 나오는 말이다. 해답은 하나밖에 있다는 고정관념, 그리고 그런 해답을 찾는 능력이 진정한 경쟁력이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과 타성에서 벗어나 중요한 질문이 무엇인지를 깊이 사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깨달음으로부터 행동에 이르는 편이 나은가요? 행동으로부터 깨달음에 이르는 편이 나은가요?”(48쪽). 어떤 전략이 옳은 답인지 생각하기보다 어떤 생각이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 있는 답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통찰을 얻기 위해 너무 많은 공부를 하면서  책상에 앉아서 생각해왔다. 사실 그런 생각의 반복이 오히려 기존 생각을 불필요한 생각의 감옥으로 끌고 갈 수도 있다. “통찰이 행동으로 이어지기보다 행동이 통찰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137쪽). 칩 히스와 댄 히스의 《순간의 힘》에 나오는 말이다. 행동하다 보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이 선물로 다가온다. 경이로운 깨달음이 우리 삶에서 실종된 이유도 사실 너무 앉아서 공부만 하기 때문이다. 일상이 기적이고 경이로운 풍경이자 깨달음의 천국이다. “당신의 삶 속에서 얼마나 놀람을 배제하고 살아가나요?”(56쪽). 인생에서 놀람이 없어진다면 경이로운 감탄이나 생각지도 못한 기적을 기대할 수 없는 밋밋한 삶의 반복될 것이다. 뜻밖의 놀람이 많은 인생일수록 뜻밖의 생각, 틀 밖의 깨달음으로 수를 놓은 즐겁고 재미있는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다.



“당신이 병으로 인해 정확히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면 그 기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52쪽).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볼 질문이다. 너무 오랫동안 고민한다고 답은 나오지 않는다. 시한부 인생 판정을 받았을 때 내 생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을 때 나는 그 기간에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를 생각하면 정말 진지하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사람들은 우리가 보내는 매 순간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처럼 긴장감 없이 보내면서 지루한 삶을 답답하게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비록 나는 세상에서 아무 미세한 일부에 지나지 않는 미약한 인간에 해당되지만 나는 나의 고유한 가치와 존재 이유를 갖고 살아가는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독특한 존재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나다름대로 내가 속해있는 공동 체세 기여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삶이 이 지구 상에서 행복이 조금 더 늘어나는 데 기여한다고 생각하나요?”(52쪽). 우리는 어차피 인간이 인간을 만나 관계를 그물을 만들고 그 속에서 공동체가 추구하는 의미와 가치를 공유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의존적 인간인 것이다. 


“당신의 기쁨을 망가뜨리는 최대의 원인은 어디에 있나요?”(66쪽). 기쁨을 망가뜨리는 원인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가 기쁨을 망가뜨리는 주범이 아닐까. “기쁨과 아픔의 근원은 관계입니다. 가장 뜨거운 기쁨도 가장 통절한 아픔도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물건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358쪽). 신영복의 《담론》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지만 사람에게 또한 기쁨의 근원을 발견하기도 한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서 변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만나야 한다. ”타인을 본 순간 호감을 느낄지 그렇지 않을지는 무엇으로 결정되나요?“(155쪽). 순간적으로 호감도 여부를 결정하지만 어떻게 결정하는지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그 경지에 어떻게 올라갔는지 물어보면 대답은 한결 같이 “그냥”이라고 이야기한다. 경지(mastery)에 이르는 비결은 언제나 신비(mystery)에 쌓여 있다. ‘마스터리’는 언제는 ‘미스터리’다. 인간관계의 달인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경지에 오른 인간관계 전문성도 결국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자신도 축적되는 깨달음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사랑할 때 당신은 결심하고 사랑을 하나요?”(166쪽).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이면 되겠다는 느낌이 온다. 바로 결심하고 결단하며 결행한다. 결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던져 상대를 사랑하는 실천으로 옮긴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몸을 던져 구체적인 행동으로 증거하는 실천이다. 어떤 사랑은 결심 이전에 마음이 끌려서 빠져버리는 순간 시작될지도 모른다. 사랑은 머리가 결심한다고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지성을 자극해서 사랑을 방해할 수도 있다. 우리는 평생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느낌이 통하는 사람과 만나 따뜻한 정을 주고받으면서 사랑이 흐르는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성숙해나간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인간관계 속의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은 곧 여행이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떠나는 여행 말이다. “삶이 여행이라면, 여행사는 무엇일까요?”(208쪽). 삶이 여행이라면 그 여행을 기획하는 여행사는 인생여행 기획사가 되지 않을까. 내 인생을 주기적인 여행을 통해 깨달아가는 즐겁고 신나는 인생여행으로 생각하면 어떨지?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또한 낯선 사람과의 마주침을 가져다준다. 낯선 사람과의 마주침 속에서 얼마나 많은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지 그것 자체가 경이로운 기적이고 감동이며 행복이다.


“경력에 대해 보장보험을 들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보험료는 얼마쯤 내고 싶은가요?”(102쪽).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뜻밖의 질문이다. 경력 보장보험. 나의 경력은 얼마나 보장받을 수 있을까? 한 사람의 경력 가치를 산정해서 보험료를 산정하는 비즈니스도 재미있는 직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경력단절을 경험하는 순간 자신의 경력에 해당하는 보험료를 받고 다음 경력으로 이동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면 신종 보험업은 승승장구할 것 같지 않은가? 모든 경력은 심각한 난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성장하는 정신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경지에 오른 경력자는 모두 몸이 뒷받침되는 정신력의 승리다. “정신력을 위한 정력제가 있다면 당신은 얼마를 주고 구입할까요?”(232쪽). 이런 질문 역시 전대미문의 색다른 질문이다.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질문하기도 전에 하찮다고 생각하고 묻지 않으면 대중 속에 묻혀버린다. 물음의 본질은 물음을 통해 삶의 본질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이 무엇인지를 추구하고 탐색하면서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성장하려는 안간힘에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 현명한 답으로부터 배우는 것보다 현명한 사람의 어리석은 질문으로부터 배우는 게 더 많다.” 이소룡이 한 말이다. 현명한 사람은 어리석은 질문 속에서도 색다른 가능성을 찾아내려고 분투노력한다. 그래서 질문은 익숙한 집단의 소속감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로 진입하려는 용기 있는 결단이다.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평온한 세계에서 익숙한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관성이 생긴다. 관성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의 타성에 통렬한 물음을 제기할 때 멈칫하고 멈추면서 삶의 근본과 본질을 생각하는 탐구를 시작한다. 


그런데삶이란 무엇인가



“물음의 역량은 물음이 향하는 대상은 물론이고 그에 못지않게 묻고 있는 자를 위험에 빠뜨리고 또 자기 자신을 물음의 대상의 위치에 놓는다”(424쪽).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말이다. 물음은 평온한 사고체계에 편지 풍파를 일으킨다. 묻지 않으면 평온했던 삶인데 어느 날 떠오르는 질문을 관심 있게 던지는 순간 스스로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물음의 대상이 아니었던 자신이 물음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 위험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무엇이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나요?”(8쪽). 확실하게 알려고 노력하는 삶이 인생 전반에 걸쳐서 펼쳐지는 게 아닐까. 지금 이 순간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뭔가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오히려 나의 행복감을 떨어뜨리는 장본인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한 때 기분을 기쁘게 만들어주던 사람이 더 이상 기쁨을 주기는커녕 피곤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돌변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았나요?”(14쪽).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는 이유나 목적이 불문명한 채 사회나 조직이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서 바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힘든 세상에 왜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순간 반성과 성찰이 시작되면서 이전과 다른 삶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듯 지옥으로 간주되는 타자의 눈치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남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 나의 주관과 가치 기준에 따라 살아가면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살아가면서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살아지는 수동적 삶에서 벗어나 나의 의지와 자유대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보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은 살면서 몇 번이나 새롭게 시작한 경험이 있나요? 그 선택이 잘한 것으로 드러난 적은 몇 번인가요?”(16쪽). 과연 사람은 살아가면서 늘 새로운 경험을 꾸준히 반복해서 시도하는 것일까? 아니면 늘 하던 일을 반복하면서 지루함과 짜증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것일까. 새로운 경험이 수반되는 도전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경험이 주는 안락함에 안주하면서 어제와 비슷한 일을 반복하면서 습관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경험을 바꾸지 않고 늘 가던 길을 가던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인생이 지루하고 재미없을까. 그래서 이런 질문이 던져주는 시사점은 의미심장하다. “당신의 인생 여정의 도로 상태에 대한 보고서에는 어떤 말이 적혀 있을까요?”(36쪽). 내가 걸어온 길, 걸어갈 길, 그리고 가보고 싶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선망의 길에서 나는 어떤 족적을 남기고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늘 궁금하고 설레는 마음을 간직할 때 삶은 언제나 오늘과 다르게 펼쳐지는 색다른 여행이다. 오늘을 어제와 다르게 사는 방법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핵심가치를 정해서 그것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당신의 가치는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선택된 것인가요?”(77쪽).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다섯 가지 가치는 열정, 혁신, 신뢰, 도전, 행복이다. 어떻게 이 다섯 가지 가치를 선정하게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그냥 내 삶을 대변하는 다섯 가지 단어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선택받은 단어다. 5개의 가치를 다시 세 개로 줄이라면 열정, 도전, 혁신이다. 세 가지 가치를 다시 한 가지 단어로 말하면 도전이다. 나는 이 가치대로 사람을 만나고 스토리를 만들며 책을 쓰고 강연을 하며 세상을 바꿔나간다. 


이렇게 가치대로 살다 보면 당연히 나의 값어치, 즉 가치도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 즉 “당신은 얼마의 가치가 있나요?”(195쪽)라는 물음에도 잠시 머뭇거림은 있겠지만 그리 당황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될 것이다. 가치판단 기준이 분명하고 딜레마 상황에서도 이런 가치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하면서 살았다면 내가 살아온 삶을 녹여내는 나만의 책도 쓸 수 있는 위치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자서전을 어떤 문장으로 끝맺고 싶은가요?”(82쪽). 사람은 책이다. 자기 고유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책으로 정리할 수 있다. 자서전을 쓰면서 마지막 결론에 어떤 문장으로 장식하고 싶은지는 더 고민해볼 화두다. 다만 우리가 하루하루 전쟁처럼 살아내는 인생은 영원히 미(美)완성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오늘도 멈추지 않고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영원한 학생으로 살아갈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당신이 묘비명으로 뭔가 위트 있는 말을 골라야 한다면 어떤 문구를 낳고 싶은가요?”(138쪽)와 같은 마지막 문장을 또 한 번 생각해보는 질문이다. 미리 묘비명을 생각해놓고 그 묘비명에 담긴 삶의 의미와 가치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 나마의 의사결정과 행동방식을 결정하는 기준이 확고하면 “당신에 대한 설명서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내용은 무엇인가요?”(183쪽)라는 질문에도 어느 정도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서전과 묘비명을 미리 구상하면서 가치판단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자기의 존재 이유, 즉 자유를 추구하는 행복한 삶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마음결을 가다듬어주는 문장들이 있나요? 그로 인해 살 수 있다는 마음의 문장들?”(174쪽). 남이 남기 문장일 수도 있고 내가 몸으로 경험하면서 깨달은 교훈적인 메시지일 수도 있다. 언제나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을 위로해주고 때로는 용기와 희망을 주면서 한평생 위안이 되는 한 문장을 만난다. 그런 문장이 바로 인두 같은 한 문장이다. 그런 문장이 무엇인지는 책을 읽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다. 예를 들면 질문의 새로운 가능성을 언급하는 최진석의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 나오는 문장은 책을 읽어보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다. “대답은 과거에 머물게 하고 질문은 미래로 열리게 한다(p.126).” 대답만 하지 말고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질 때 이제까지 가보지 않은 새로운 관문도 열리는 법이다. “신생아가 탄생하자마자 첫울음을 터트리지 않고 첫 문장을 말한다고 한다면, 세상에 나오자마자 당신은 어떤 말을 제일 먼저 하고 싶었을까요?”(66쪽). 이런 질문을 던져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난생처음 들어보는 질문이다. 그리고 질문을 받아보지 않았으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역시 질문은 전대미문일 때 색다른 관문을 열어가는 열쇠를 마련해준다. 아이의 첫울음의 의미를 번역해서 첫 문장으로 번역해내는 새로운 방법이 개발된다면 세상은 더 재미있고 의미 있어지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저자 역시 “질문은 아포리즘을 한 단계 격상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아포리즘보다 더 전복적이면서도 짓궂게 생각과 마음을 조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5쪽)라고 하지 않았던가. 전복적이고 짓궂은 생각이지만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불모지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많이 배우면 행복해질까요?”(98쪽). 이런 질문 역시 배움과 행복의 관계를 따져 묻는 짓궂은 질문일 수도 있다. 배움의 양이 행복을 결정하지 않고 배우는 과정에서 배움의 주체가 몸으로 경험하며 느끼는 충만감과 만족감이 행복을 결정한다. 무턱대고 많이 배운다고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는다. 왜 공부라는지, 공부를 통해서 얻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공부하는 과정을 즐겁고 재미있는 지적 탐구 여행이라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사람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나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 존재한다. 그 만남 자체가 사람에게는 엄청난 공부인 셈이다. “당신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의 가장 친한 친구인가요?”(94쪽).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과 친구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똑같지 않을 수 있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는 과연 어떤 친구일까? 


“우주가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141쪽). 미국의 메리 올리버 작가이 《휘파람 부는 사람》이라는 책에 보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이 있다고 한다. 바로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이다. 사실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은 전혀 다른 별개의 역량에 해당하지 않고 같은 능력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해주는 공인인증서가 있으면 좋을까요?”(110쪽). 저는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공인 인증서로 사랑을 증명하는 시대는 사람이 하는 사랑을 인증서로 판단하겠다는 발상이 과연 가능한 생각일까?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감정의 파노라마다. 언어로 번역해낼 수 없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어찌 다 객관화시켜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비슷한 맥락에서 제기된 질문도 있다. "감정 관리를 하지 않고 전문가들에게 맡긴다면 얼마나 더 좋아질까요?"(121쪽). 과연 감정관리 전문가가 탄생할 수 있을까? 인간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감지해서 적당한 해결책을 투입해주면 감정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질문 자체가 또 다른 질문을 불러오는 색다른 질문임에 틀림이 없다. “당신의 속마음 뒤에는 어떤 속마음이 감추어져 있나요?”(146쪽). 마찬가지로 내 속마음을 움직이는 본연의 속마음, 아마 본능적 욕구가 감춰져 있으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을 통제하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생각이 얼마나 깊어야 바닥을 치고 올라갈 수 있을까요?”(148쪽). 생각의 깊이도 상대적이다. 다만 깊은 생각의 소유자는 그만큼 평소에 당연하고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물론의 세계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과연 그럴까를 의심한다. 의심에 그치지 않고 의문을 탐침을 통해 의구심을 해소하고 색다른 질문을 던져 궁긍함을 이겨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전개한다. “답 없는 질문은 두렵지 않지만, 질문 없는 답은 너무나도 두렵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말이다. 질문 없이 답을 추구하는 시간이 반복될 때 사람은 멍청한 사유체계 안에서 어리석은 짓을 반복할 것이다. “우리 청각의 한계: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듣는다(302쪽).”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한 말이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사람은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 듣는다는 말이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대’학교에서 핵심 교과목으로 삼는 두 권의 책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수많은 질문이 제기된다. 니체의 말대로 그 많은 질문 중에서 내가 잘 들을 수 있었던 질문을 포착, 내 생각을 정리하는 글을 쓴 것이다. “사계절 외에 또 하나의 계절, 즉 다섯 번째 계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해봐요. 이 계절이 성격을 띠도록 디자인할 건가요?”(159쪽). 나는 한 번도 사계절 말고 다른 계절을 내 맘대로 디자인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잘 들리지 않을 수 있지만 호기심으로 포착한 질문이다. 


마지막으로 행복에 관한 질문이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대답이나 정답이 있나요? 각자가 생각하는 행복에 비추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행복이 악기처럼 열심히 연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면 좋을까요?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뎌 가며 힘들게 얻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하나요? 행복을 연습으로 터득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239쪽). 질문에 질문의 꼬리를 물고 긴 항해를 해왔다.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고 행복한 삶을 위한 생각의 씨앗이 잉태되는 질문들이다. “만약 곧 죽을 상황에 처했고, 목숨을 구할 방법을 단 1시간 안에 찾아야만 한다면, 1시간 중 55분은 올바른 질문을 찾는 데 사용하겠다. 올바른 질문을 찾고 나면 정답을 찾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지기 위해 우리가 빠져나왔던 관문과 전혀 다른 관문으로 다시 언제 끝날지 모르는 탐문 여행을 떠나야 한다. 지금 여기서 생각하는 질문의 가능성이 다른 관문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생각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해주는 공인인증서가 있으면 좋을까요?"(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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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 - 힘껏 굴러가며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
최필조 지음 / 알파미디어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보여줄 수 없어 쓴 글     


최필조(2019).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 서울: 알파 미디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담아내는 일입니다. 둘은 다르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치면서 최필조의 사진첩을 운영 중인 사진작가, 최필조의 사진 에세이,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이라는 책의 저자 소개 페이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가르치는 일에 사랑이 동반되지 않고, 사진을 찍는 과정에 마음이 담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르치는 일이나 사진을 찍는 일이나 궁극에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사랑을 매개로 가슴으로 다가가는 위대한 만남입니다.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이라는 제목이 이 책의 제 몫을 다하고도 남음이 충분합니다. 부제목은 독자의 심금을 더 울립니다. “힘껏 굴러가며 사는 이웃들의 삶.” 본업에 충실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전국을 발로 뛰면서 생각의 발로를 담아내는 사진과 사진을 담아내는 글이 사진작가의 진심과 사진에 찍힌 사람이나 현상의 진심이 만나 심금을 또 울립니다. 사진은 사실적 현상에 작가의 진심이 담긴 작품입니다. 평생 결정적인 순간을 찍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큰 깨달음을 얻은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남긴 한 마디,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지만 그 순간이 기록으로 남으려면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포착되어야 한다. 사진작가가 저 순간을 마음에 담아내야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 순간은 지나가지 않고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남아 오랫동안 역사적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한 장의 추억으로 기억됩니다.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에는 정말 말로 담아낼 수가 없어서 마음에 담아낸 흑백사진의 정경이 때로는 짧은 글을 만나고 또 때로는 긴 단상을 만나 과거로 흘러가는 추억의 한 장면을 영원히 추억하게 만들어준다. 스쳐 지나가는 장면 하나하나가 우주의 숨결을 머금고 있고 세계의 일면을 부분으로 감추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사진작가의 마음으로 다가오는 자연의 숨결이 카메라 셔터를 자기도 모르게 누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저마다의 사람이 보여주는 안간힘이 힘껏 살 굴러가며 사는 이웃들의 정경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진실한 당신, 남몰래 훔쳐본 뒷모습이 PART 1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사람의 진면목은 앞모습이나 옆모습에 있지 않고 뒷모습에 있습니다. 앞모습은 위장과 변장이 가능하지만 뒷모습은 그 사람의 고달픈 삶이 기쁜 성취의 뒤안길이 숨김없이 잔잔하게 다가옵니다. 앞만 보고 살아가다 자신이 어떤 족적을 남기고 달려가는지 생각해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거짓 없는 진실이 그의 뒷모습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 그리고 둘’이라는 제목의 사진에는 우산으로 연결되는 두 사람의 간절한 심정이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다가옵니다.     

좋아서요

하나면 족한 우산이 좋아서요     

“이제 비 그쳤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우산을 각자 하나씩 쓰고 바다를 바라보면 이야기를 나눈다면 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따뜻한 한 마디를 주고받기 힘들었을 겁니다. 한 사람이 간절한 열망을 품고 한 마디 던집니다. 우산이 하나라서 우리도 하나로 묶어준다고. 우산이 하나라서 우리는 하나가 되는 열망을 품을 수 있다고. 그 우산 덕분에 세월의 거리를 좁혀 주고 있다고. 그래서 더 가까이 당신의 진면목을 바라볼 수 있다고. 비가 그쳤음에도 떨어지기 싫어서 차마 비가 그쳤다고 말할 수 없다고. 사진 한 장이 두 사람의 간절한 열망을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말할 수 없어서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서 쓴 글》의 전형입니다.     


비탈길을 할머니가 힘겹게 허리를 땅과 수평으로 맞출 수도 없을 정도로 구부리고 올라갑니다. 그것도 빈 박스가 담긴 리어카를 끌고. 그리고 한 마디 내던집니다. “이 철없는 종이박스야, 이 매정한 비탈길아!” ‘야, 이놈들아!’라는 제목의 사진입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구부러진 허리는 이제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땅에 닿아갑니다. 거기에 인생이 짐을 짊어지지 못해 리어카에 싣고 평생을 올라갔을 비탈길을 힘겹게 또 올라갑니다. 오르막길에서 숨넘어가듯 기어올라가다 깊은 한 숨을 내쉬며 잠시 쉬었다 다시 올랐을 겁니다. 그렇게 오르고 올라도 앞산을 넘으면 어느새 먼 ㅍ산이 앞을 가립니다. 철없는 종이 박스는 나를 애 무겁게 만들고 매정한 비탈길은 나를 힘들게 하느냐, 할머니가 내뱉은 한 마디에 한 많은 인생살이의 고단함이 배어있습니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그 한 마디가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의 잔상을 미리 보는 듯했습니다. 


‘그녀의 갯벌’이라는 사진에는 이런 글이 곁에서 사진이 품고 있는 삶의 애환을 토해냅니다.      

발자국 찍어

바닷물 고이면,     

거기엔 무엇이 피어날까?  


광활한 바다가 수평선을 펼쳐 보이고, 바다와 갯벌이 만나는 삶의 텃밭에는 허리를 숙이고 힘겹게 삶의 양식을 찾아 움직이는 한 여인의 그림자 같은 모습이 사진의 오른쪽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잔영이 보입니다. “갯벌이 주는 공간 정서는 비논리적이다. 언어를 걸칠 만한 표적이 없고 논리를 비빌 언덕이 없다. 그리고 갯벌의 생태는 끝없이 질퍽거리고 뒤섞이는 불안정성이다. 이 불안정이 갯벌의 안정성이다. 갯벌에는 바퀴의 길이 없지만 갯벌은 수억만 개의 작은 길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갯벌은 갈 수 없는 큰길이다”(109쪽). 김훈의 《자전거 여행 2》에 나오는 말입니다. 오늘 갔던 갯벌의 길에는 내일의 희망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 길은 또 바다가 지워버리고 내일은 다른 길로 가라는 희망의 명령을 품고 있는 터전이 갯벌입니다. 오늘 찍어 놓은 발자국의 힘겨움이 내일은 다행히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수없이 걸어갔지만 흔적도 없는 길이 영원히 반복되는 갯벌은 그래서 언제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입니다.     

 

해 넘어간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한 농부가 일을 합니다. 그 곁에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불안한 눈빛을 품고 힘든 삶을 같이 살아가는 개 한 마리가 주인을 바라봅니다. 그 사진 옆에는 ‘개심심’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이 붙어 있습니다.     


언제 끝나는 데?

집에 좀 가자, 응?     


“얼굴의 언어는 말의 언어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언어이다. 사람은 말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교신한다”(229쪽). 역시 김훈의 《자전거 여행 2》에 나오는 말입니다.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몰두하는 주인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표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저 바라보고 지켜볼 뿐입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서 주인 곁은 지키는 삶의 동반자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지금 당장 말하고 싶은 욕망은 목구멍을 타고 입에 도달했지만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을 유지하는 힘든 시간을 선택합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함이 가중되면서 애간장은 끓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기다립니다. 긴 기다림 끝에 집에 가자는 희망의 메시지가 나에게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고단한 우리들의 삶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무게였나요?     

고무대야가 

시멘트 바닥에 갈리는 소리가

마음속에 박힙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구부정해진 허리가 수직으로 땅과 수평을 이룹니다. 그리고 ‘삶의 무게’가 담긴 고무대야를 끌고 가는 한 노인의 뒷모습에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단면의 힘겨운 사투를 조용히 보여줍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무너집니다. 넘어지면 일어날 수 있지만 무너지면 원상복귀가 불가능합니다. 그게 바로 무너지는 것과 넘어지는 것의 현격한 차이입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자빠지고 때로는 엎어지면서 무릎도 깨지고 얼굴에 생각지도 못한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세상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가 추가되면서 혼자 견디기 어려운 삶의 무게로 내 어깨를 짓누릅니다. 무게를 견뎌야 야무지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짊어지고 가는 삶의 무게가 고무대야에 담기면서 걸어가지 못하고 시멘트 바닥에 갈리며 끌려가는 소리가 마음속에 박혀버립니다. 가슴에 못이 박히듯, 끌려가며 시멘트 바닥에 긁히기 전에 본인이 스스로 먼저 갈아버린다는 생각으로 힘겨운 위로를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한 발을 앞으로 꾸역꾸역 내딛습니다.      


PART 2는 ‘늙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네’라는 주제로 다양한 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손 좀 보자는 사람”보다 “손 내밀어 손 잡아주는 사람”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잘 드러납니다. “삶의 내공이 묵직하게 묻어난 이웃들의 손은 때때로 삶의 지혜가 되어주기도 한다.” 손으로 힘든 육체노동을 견디면서 살아온 얼룩이 손가락 마디마디에 한으로 맺힙니다. 삶의 시름이 손등의 주름으로 아로새겨집니다.      


이 다 빠지고

틀니 정도는 해야

이 맛을 아는 거야!  

   

‘니들이 홍시 맛을 알아?’라는 제목이 세월의 아픔을 견디며 살아온 왼손이 빨간 홍시를 잡고 있습니다. 그 홍시가 너무 먹음직스러워 한 잎 문 흔적이 역력하게 보이면서 홍시의 속살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리고 한 마디 툭 던집니다. 세상의 아픔을 다 견디고 또 견뎌내고 버티면서 밥심으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무 음식이나 씹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내 이빨은 세파의 노고와 함께 세상으로 빠져 달아났습니다. 몇 개 안 남은 이빨과 이빨에 힘을 기대어 틀니로 간간히 버텨나갑니다. 그 틀니로 맛보는 홍시 맛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지고의 경지에 이른 자연과 우주가 만들어낸 신비한 맛입니다. 봄의 희망으로 일군 꽃이 한 여름의 천둥과 번개, 그리고 비바람을 맞아가면서 땡감은 이제 노을의 아름다운 기운을 받아들여 가을의 붉은색으로 익어갑니다. 그 홍시를 한 잎 물었을 때 입안에 고이는 침과 부드러운 홍시 속살은 한바탕의 짧은 뒤섞임을 하다 좁은 목구멍을 타고 넓은 위장의 바다로 나아갑니다. 자연과 우주와 내가 한 몸이 되는 순간입니다.     


네 아물겠지요.     

상처에 익숙해지면

이유 따위는 관심 없습니다. 

    

상처의 이유는 몰라도

우리는 살아야 하니까요.  

   

어디서 그랬는지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몰라, 어디서 그랬는지’라는 사진 작품 곁에 조용히 독백하는 글입니다. 할머니의 깎지 낀 오른손 위에 깊은 상처인지 손등을 덮고 있는 하양 헝겊 위로 피 묻은 흔적이 역력히 보입니다. 하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받은 상처인지는 모릅니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라고 합니다.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또 상처 받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내야 합니다. 살아가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에 꾸역꾸역 살아가는 게 아니라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내야 합니다. 상처는 상급을 보장해줍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상처가 나의 처신을 결정해주기 때문에 오늘도 상처 받으러 바깥세상으로 나갑니다. 상처 받을 용기를 품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정신없이 달리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해보면 삭신이 쑤시고 몸의 어딘가에는 나도 모르게 긁히고 베인 상처가 상한 마음을 향해 아픔을 호소합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받은 상처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오늘을 힘겹게 버텨오면서 내 몸에 각인된 사투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PART 3은 “괜한 참견, 뜻밖의 위로, 밤골”의 적나라한 풍경을 고스란히 드러내 줍니다. 하늘을 이고 살았던 달동네 밤골에서 보여주는 이웃들의 따뜻한 시선을 작가의 마음이 다가가 담아낸 저마다의 사진에는 뜻밖의 위로가 되어 나를 위로해줍니다. 차마 말할 수 없어서 마음에 담은 사진에 담긴 잔상을 반추하며 보여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 한구석의 글을 토해냅니다.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밤골에는 밤마다 서글픈 추억을 머금고 골골히 맺힌 저마다의 사연이 모든 사물에도 박혀 있습니다.     


외롭다고 

말하기 싫어     

빈 하늘에

줄 몇 개 그었다.   


‘줄 하나’라는 제목의 사진에는 밤골의 깊어가는 밤 이전에 하늘을 전깃줄과 전홧줄이 가로질러 만들어내는 어긋남의 아름다움을 외로움으로 승화시키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끊어지면 죽는다는 각오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어지는 줄들의 사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연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고 있는 것일까요. 그동안 쌓아온 삶의 숱한 굴곡의 장면들이 점들로 이어져 선을 이루었습니다. 저 선에는 직선도 있고 곡선도 있다. 직선과 곡선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선도 있습니다. 삶은 그동안 숱한 사선을 넘으며 목숨 걸고 사투를 벌이며 넘어온 변곡점이 저마다의 선으로 연결되고, 그 선은 또 다른 선과 만나 면(面)을 만들어냅니다. 내 얼굴이 드러내는 면상(面像)과 면모(面貌)도 점과 선과 면이 만들어낸 합작품입니다. 밤골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모든 삶의 족적은 이처럼 밤골 사람들의 면모를 나도 모르게 얼굴에 축적하며 살아갑니다.     


어제 국 끓여 먹던 양은 냄비가

오늘은 고물이 되어 팔려갑니다.     


창틀에 올려놓은 소주 반 병도

곧 고물이 되어 언덕을 내려가겠지요.    

 

그전에 마셔버려야겠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한 잔 해야 합니다.


‘고물’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로 고물을 싣고 내려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뒤에서 아련히 바라보는 남편의 모습은 말할 수 없는 아련한 서글픔이 온몸을 휘감고 있습니다. 냄비가 고물이 되고 배고픈 위장을 위로해주던 소주병도 곧 고물이 되어 언덕을 내려가야 되는 운명을 생각하면 차마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소주를 마시지 않고 마셔버리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마실 때의 느낌과 마셔버릴 수밖에 없을 때의 아픔에는 천지차이가 존재합니다. 버리고 싶은 생각과 내다버리고 싶을 때의 느낌이 다르듯이 말이죠. 언덕 위로 올라와 힘들지만 같이 감내해온 지난 시절의 추억이 모든 사물에 속속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사물이 내 곁을 떠나갈 때 내가 겪은 사연도 함께 언덕 아래로 내려가 세상 어딘가로 다시 떠나갑니다. 내가 떠나가기 전에 그들이 먼저 떠나갈 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삶은 우연히 만났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와중에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과 작별의 아픔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아가야 되는 운명인가 봅니다.     


마지막 PART 4는 “고마워요,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길 위에서” 살아가며 사랑하는 이웃들의 저마다의 삶을 담아냅니다.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느끼지 못하고 지나쳤던 수많은 길에서는 만남을 추억하며 묵묵히 오늘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에서 삶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이 세상에

완벽히 버려진 외로움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걱정 말아요’라는 제목의 사진 곁에서 속삭이는 글입니다. 뒷 배경에는 푸른 바다가 세월의 풍파에 지워져서 흐릿한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고 바다와 인접한 모래사장에 한 남자가 바다와 수평을 이루며 깊은 사색에 잠겨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 맨 앞 오른쪽 끝으로 이름 모를 한 마리 새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다와 모래사장, 그리고 사람과 새는 한 장면 속에서 저마다의 존재감을  말없이 드러내지만 사진의 배경이 될수록 희미하게 사라집니다. 아마 조만간 전경으로 드러낸 새도 희미하게 보이다 보이지 않는 배경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사진 속의 사람은 푸른 바다 곁으로 완벽히 버려진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을 곁에 두고 파도소리를 들려주는 바다는 보이지 않는 배경에서 점차 사라지는 외로운 존재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전경으로 드러난 새는 저만큼 뒤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사람과 어울릴 수 있을까요? 모두가 저마다의 위치에서 존재하는 이유를 드러내며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완벽히 버려진 외로움은 없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인지, 사진을 보면서 작가가 품은 상상력의 뒤안길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어느 역은 기뻤고

어느 역은 슬펐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좋았을

그런 역도 있었겠지요.     


당신이 다 지나갈 때까지

멈추지 않는 기차     


눈을 질끈 감고

또 다음 역을 기다립니다. 


기차역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 옆에는 깊은 시름에 빠진 할머니의 진한 흑백사진이 말없이 많은 말을 건네줍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목적지를 향해 달려왔지만 기억에 남은 간이역은 거의 없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리면서 행복이 거기에 가면 널려 있는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니 목적지로 가는 수많은 간이역에 행복이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모든 간이역이 다 기쁨만 주지 않듯, 살아가는 매 순간이 모두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어떤 간이역에서의 삶은 견디기 힘든 순간의 연속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간이역과 간이역을 연결해주는 기차는 말없이 오늘도 사람이 품고 있는 희망을 싣고 끊임없이 이어 달려 나갑니다. 눈을 질끈 감고 다음 역에서 만날 희망의 소식을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우리는 아직 가보지 않은 간이역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보지 못한 간이역에 어쩌면 우리가 찾는 이상향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머무는 간이역에서 매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나가는 일입니다.      


사진과 사진에 담긴 글을 읽으면서 이제껏 살아본 지난 시절을 반추하며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를 다시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어떤 사진과 글 속에서는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삶의 모습을 파노라마로 바라보며 전망하는 내 모습을 혼자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사진첩의 한 페이지를 넘기며 책을 덮는 순간 사진들이 담고 있는 삶의 희로애락이 한 편의 영상시처럼 가슴을 파고들면서 은은한 향기가 은근하게 울려 퍼지는 듯했습니다. “힘껏 굴러가며 사는 이웃들의 삶”에서 저는 따뜻한 정을 느꼈으며, 인간적인 유대감 속에서 만나지 않았지만 만나면서 오래 살아온 친근한 우정을 몸으로 실감하는 듯했습니다. 각박한 사회,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는 삶의 진리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 곤경 속에서 풍경을 만들어가는 사람의 안간힘이 우리 모두에게 힘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살아갈 인생에게 한 마디 던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지지 않기 위해 살아내야 한다고.

당신의 오늘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무게였나요?

고무대야가
시멘트 바닥에 갈리는 소리가
마음속에 박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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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시 - 외롭고 힘들고 배고픈 당신에게
정진아 엮음, 임상희 그림 / 나무생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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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는 시()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다.

맛있는 시-외롭고 힘들고 배고픈 당신에게를 읽고

 

방송작가 정진아 동시작가가 편집한 맛있는 시를 읽다 보면 이 시에 등장하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충동과 욕구가 춤을 춘다. ‘1장 위로 맛 시(), 토닥토닥, 너만 그런 거 아니야를 읽다 보면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는 따뜻한 위로를 전해준다. 위로하는 시를 읽다 보면 어느새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지만 어느새 갑자기 위로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꿈틀거린다. 고두현 시인의 진미 생태찌개를 읽다 보면 생태찌개를 먹으면서 주고받는 정담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 사이 나도 모르게 꼴깍 목으로 넘어가는 침 삼키는 소리를 감추지 못하는 실례를 범한다. 어떤 집만 생각하면 그 집의 정다운 풍경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한 사람은 거참 좋다 감탄사를 연발하고/또 한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숟가락질 바쁘고/다른 한 사람은 감탄사와 말없음표 번갈아 주고받다/이 좋은 델 왜 이제야 알려주느냐고/눈 흘기며 원망하는 집이지요.” 시의 위대한 힘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경험한 사람처럼 오감각을 자극하는 상상력에 있다. 생태찌개 먹으며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대화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생태찌개에 전념하며 맛을 음미하는 건 그만큼 딴전 피울 시간이 없을 정도 진미라는 말이다. 그 국물은 또한 진국이 아니고 뭐였을까.

 

물건을 훔치면 범인이 되지만 마음을 훔치면 연인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훔치고 싶은 게 있다면 연인의 마음이 아니라 시인의 영감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영감으로 연인의 마음도 얼마든지 훔칠 수 있기 때문이다. ‘틀 밖에서 호기심의 물음표(?)를 던져 뜻밖의 느낌표(!)를 찾고 싶은가? 마감 시간 전에 무릎을 치며 공감할 수 있는 시인의 영감이 곳곳에 숨어 있는 이 책을 보는 순간 우리 모두는 시 읽는 CEO’를 넘어 삶의 CEO’가 될 수 있다. 고두현의 시 읽는 CEO, 처음 시작하는 이에게에 쓴 추천사다. 나는 시를 읽으면서 언제나 시인한다. 시인(詩人)의 영감은 함부로 흉내 낼 수 없음을 시인(是認)하는 것이다. 시인의 영감을 훔쳐 내 것으로 만들고 싶지만 쉽지 않다.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읽고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한다. 역시 나는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시인하고 나는 시가 아닌 다른 글로 시인을 능가하는 작품을 남기기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진미 생태찌개를 보고 그것을 매개로 주고받는 사람의 정감 어린 담론에서 우리의 일상에 담긴 소소함을 읽어내는 묘미를 시인은 놓치지 않는다.

 

박성우 시인의 삼 학년이란 시를 읽으면서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가 갑자기 서글픈 심정이 심장을 때리면서 순간적으로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동네 우물에 부었다/사카린이랑 슈가도 몽땅 털어 넣었다/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미숫가루를 통째로 우물에 부는 만행을 저질렀을까. 동심을 넘어 주체할 수 없는 도발적인 행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뺨따귀를 맞은 추억으로 끝나는 시를 읽다가 동심이 받은 상처는 얼마나 컸을까 상상이 된다. 오로지 죄라면 미숫가루를 너무 먹고 싶어서 우물에 풀어 휘저은 돌발적 행동 뿐이다. 하지만 더 큰 어른의 죄는 그 아이의 뺨따귀를 때린 것이다. 아이는 뺨따귀를 맞고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지금 어른이 된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다.

 

‘2장 사랑 맛 시()-사랑한다, 사랑한다, 나 너를에서 만난 시는 저마다 음식에 맺힌 사랑 찬가를 기억한다. 정다혜 시인의 콩밥 먹다가를 읽노라면 어린 시절 영양가 좋다는 콩을 골라내다 엄마의 매정한 한 마디에 풀이 죽은 사연이 떠오른다. “콩밥을 싫어하여 콩만 골라내더/눈 맑은 그 아이 생각에 목이 메고/잊고 살았던 슬픔의 오장육부에/검은 콩알이 산탄처럼 박힌다.” ‘콩밥 먹는 죄인이라는 표현에 왜 죄인들이 먹는 밥은 영양가 좋은 콩밥일까를 생각해보았다.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콩을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벌을 주는 사람이 먹어야 할 밥이 콩밥이라서 그런지를 상상하게 만들지만 콩밥에 얽힌 애틋한 사연은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보면 질문하다 사라지는 안타까운 인간적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 먼지만도 못하고/짐작하는 것만이 산더미 같다/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 비록 질문하다 사라질지언정 콩밥은 왜 교도소에 들어가서 먹어야 하는지를 아직도 질문한다.

 

안현미 시인의 비굴 레시피에서 무슨 굴의 종류를 요리하는 특별한 레시피인 줄 알았다. 비굴하게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참을 수 없는 아픔의 일면을 요리로 치유하겠다는 시인의 발상이 놀랍다. “그러니까 내일 당도할 오늘도/나는 비굴하고 비굴하다/팔팔 끓인 뼈 없는 마음과 몸인/비굴을 당신이 맛있게 먹어준다면.” 세상의 누가 비굴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비굴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현실은 멀쩡한 사람도 비굴하게 만든다. 더구나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비굴하게 살아가는 삶을 자청했던 부모님의 서글픔을 생각하면 갑자기 눈물을 삼키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본다. 전복을 먹다 전복당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처럼 굴을 먹다 비굴하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정상적이지 않는 다짐을 해본다. 비굴을 요리하는 안현미 시인의 상상력에서 갑자기 든 의문은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였다. “어떤 책을 읽는 대 전신이 얼어붙어 어떤 불기로도 몸을 덥힐 수 없게 되면, 나는 그것이 시인 줄 안다. 머리 맨 위가 떨어져 나간 듯 몸이 반응해도, 나는 그것이 시인 줄 안다. 이것이 내가 시를 알아보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대한 정의다. 전신이 얼어붙었지만 어떤 불기로도 몸을 덥힐 수 없는 전율하는 경각심이 다가오거나 생각하는 머리가 떨어져 나갔어도 여전히 몸이 반응하는 그런 충격이 바로 시라는 것이다. 비굴 요리에서 인생의 비굴함을 건져 올린 시인의 상상력에서 시의 본령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3장 인생 맛 시()-간장, 소금, 설탕, 된장, 고추장, 인생의 기본 맛에는 희로애락이 담긴 음식으로 인생의 사계절을 읊는 시가 등장한다. 산문처럼 쓰인 함민복 시인의 눈물은 왜 짠가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유튜브 동영상(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PwdjKQGRjCc&t=73s)으로 감상하면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엄마가 설렁탕 집에 들어가서 주고받는 대화에 코끝이 찡해지고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도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힘겨운 삶을 버틸 수 있는 방부제가 바로 눈물과 땀이다. 침 흘리는 사람보다 땀 흘리며 노동하는 사람, 노동의 고단함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결국 세상의 평범함을 거부하고 비범한 상상력의 경지로 날아간다.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함민복 시인의 시야말로 한 사람의 고단한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사연을 품고 있다. “시작(詩作)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수영의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에 나오는 말이다. 함민복 시인의 눈물은 왜 짠가야말로 온몸으로 밀고 나간 시였다. 어떤 꾸밈도 없고 그런 꾸밈이 들어간 틈도 없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면서 가슴 저려오는 그 서글픔을 뚝배기로 끓여낸 시라고 생각한다.

 

이재무 시인의 항아리 속 된장처럼은 속성으로 뭔가를 달성하려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시다. 이 시는 고속으로 양산하는 속성(速成) 시대에 숙성(熟成)으로 경지에 이르려는 지난한 노력의 수고스럽지만 정도의 길을 알려준다. “세월 뜸 들여 깊은 맛 우려내려면/우선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자는 거야...중략/기다리지는 거야 원치 않은 불순물도/뛰어들겠지 고것까지 내 살/품어보자는 거야 썩고 썩다가 간과 허파가 녹고/내장까지 다 녹아나고 그럴 즈음에/햇볕 좋은 날 말짱하게 말린 몸으로/식탁에 오르자는 거야.” 된장이 되려는 몸부림과 바위도 뚫을 정도의 결연한 각오와 다짐이 느껴지는 시에서 이런 된장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햇볕 좋은 날 말짱하게 말린 몸으로/식탁에 오르자는 다짐에는 된장의 결연한 각오와 결행을 감행하겠다는 눈물겨운 다짐이 서려 있다. 오늘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된장과 어울려 봄의 향기를 전해준 냉이와 달래의 속마음도 궁금해졌다. 자신의 몸속으로 된장이 침투하도록 내버려둔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궁금증을 대신했다.

 

서윤규 시인의 두부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상상력이 품고 있는 생각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었다. “두부를 보면/비폭력 무저항주의자 같다/칼을 드는 순간/순순히 목을 내밀 듯 담담하게 칼을 받는다/몸속 깊이 칼을 받고서도/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칼을 받는 순간, 죽음이 얼마나 부드럽고 감미로운지/칼이 두부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두부가 칼을 온몸으로 감싸 안는 것 같다/저를 다 내어주며/칼을 든 나를 용서하는 것 같다/물어야 할 죄목조차 묻지 않는 것 같다.”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두부를 보고 자신이 두부라고 역지사지로 입장을 바꿔 공감하는 시에서 우리는 시인은 아무나 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시인해야 했다. 가장 좋아하는 요리 중의 하나가 바로 두부 요리지만 그 많은 두부를 먹으면서도 서윤규 시인처럼 두부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자신을 찌르는 칼조차 받아들이며 두부가 칼을 온몸으로 감싸 안는 것 같다는 표현에서 시인이 꿈꾸는 삶의 무궁한 상상력 경지를 그저 감탄으로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4장 엄마의 맛 시-그리움이 피어오르는 시간에는 음식에 담긴 엄마에 대한 애틋한 사연으로 물들여 있다. 이정하 시인의 함박눈에 나오는 수제비 같은 함박눈은 수제비에 담긴 가난한 살림으로 사투를 벌였던 엄마를 떠올리게 만든 장본인이다. “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분식집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그날 어머니가 떠먹여 주던 수제비 같은/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은 펑펑 쏟아지는 눈물의 다른 표현으로 읽힌다. 수제비 국물에 녹아든 담백한 감자 맛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수제비 추억이 생생한 기억으로 떠올랐다. 쌀밥은 그림의 떡이었던 시절, 저마다의 방향으로 산만하게 흩어지는 모래알처럼 보리밥을 먹다가 먹는 뜨거운 국물에 빠져든 수제비 맛은 추운 겨울을 버텨내는 온기품은 음식이었다. 한편 한순 시인의 김치찌개를 읽는 순간 돼지고기 있는 김치찌개가 얼마나 입맛을 돋우는 엄마 맛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치료약으로 돼지고기 몇 조각 넣은 김치찌개를 끓인다는 시인의 감수성에 그만 핑 도는 눈물을 잠시 가눌 길이 없었다. 모든 김치찌개에 치료약으로 돼지고기가 들어가야 하지만 그것조차 넣지 못하고 김치만으로 끓이는 엄마표 김치찌개를 먹었을 때 나는 왜 쓸 데 없는 원망과 불만을 쏟아냈을까를 생각하면 한 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엄마표 요리의 정점은 이문재 시인의 연금술에 나타난다. 좀 길지만 시 전문을 인용해본다.

배추는 굵은소금으로 숨을 죽인다

미나리는 뜨거운 국물에 데치고

이월 냉이는 잘 씻어 고추장에 무친다

기장멸치는 달달 볶고

도토리묵은 푹 쑤고

갈빗살은 살짝 구워내고

아가미 젓갈은 굴 속에서 곰삭힌다

 

세발낙지는 한 손으로 주욱 훑고

안치고, 뜸 들이고, 묵히고, 한소끔 끓이고

익히고, 삶고, 찌고, 다듬고, 다지고, 버무리고

비비고, 푹 고고, 빻고, 찧고, 잘게 찢고

썰고, 까고, 갈고, 짜고, 까불고, 우려내고, 덖고

빚고, 졸이고, 뜨고, 뽑고, 어르고

담그고, 묻고, 말리고, 쟁여놓고, 응달에 널고

얼렸다 녹이고 녹였다가 얼리고

쑥 뽑아 든 무는 무청부터 날로 베어 먹고

그물에 걸려 올라온 꽃게는 반을 뚝 갈라 날로 후루룩

알이 잔뜩 밴 도루묵찌개는 큰 알부터 골라먹고

이른 봄 두릅은 아침 이슬이 마르기 전에 따되

겨우내 굶주린 짐승들 먹을 것은 남기고

바닷바람 쐬고 자란 어린 쑥은 어머니께 드리고

청국장 잘 뜨는 아랫목에 누워

화엄경을 읊조리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요리의 연금술사, 엄마에게 배우는 소중한 교훈은 재료마다 궁합이 맞는 적절한 요리법이 있으며, 식재료의 본질에 따라 그걸 살리는 요리의 연금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 시에는 음식의 종류별로 어떻게 요리의 연금술을 발휘해야 저마다 품고 있는 고유한 맛이 우러나오는지를 적확한 동사를 동원해서 묘사한다. 마찬가지로 지식의 연금술도 어울리는 지식을 숙성시켜 저마다의 고유한 지식 맛이 살아 숨 쉬도록 지식요리사의 연금술을 발휘해야 한다. 시인의 주특기는 관성이나 타성대로 살아가지 않고 탄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있다. 자두 하나를 보고도 감탄하는 사람이 시인이라는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평범하게 바라보지만 시인은 평범속에서도 비범함을 발견한다. 그들은 언제나 정상에서 벗어나 비정상적 사유를 즐기고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서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역지사지의 대가다. 틀에 박힌 현상을 보고도 특유의 언어적 감각과 남다른 상상력으로 비상하는 날개를 펼친다.

 

우리는 모두 삶의 CEO(詩理悟). CEO는 시()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다. 시인은 틀 밖에서 물음을 던져 뜻밖의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다. 이 책은 시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고() 들으며() 남다른 조합()으로 놀라운 깨달음()’깨우침을 배우고 싶은 분, 그래서 작은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감동으로 세상을 움직이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필독해서 중독되어야 할 책이 아닐 수 없다. 대작과 걸작도 시인의 마음으로 시작(詩作)해야 시작(始作)될 수 있다는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황인원의 시 한 줄에서 통찰은 어떻게 시작하는가라는 책에 쓴 추천사다. 삶의 CEO는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가 아니다. 오히려 삶의 CEO는 타성과 통념에 갇혀 틀에 박힌 생활을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시가 품고 있는 이치를 깨달으며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을 건져 올리는 사람이다. 어느 수인囚人과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시에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사랑은 - 생명 이전이고/죽음 - 이후이며/천지창조의 시작이고/지구의 해석자.“ 여기서 사랑을 시로 바꿔 읽어도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시는 천지창조의 시작이고 지구의 해석자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곧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삶을 창조하기 시작하는 사람이며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구를 어제와 다르게 해석하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다. 이런 노력을 거듭하며 사투를 벌이는 우리 모두는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한 세상을 대변하는 어떤 경우를 쓴 이문재 시인처럼 비범한 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어떤 경우/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치료약으로 돼지고기 몇 조각 넣은 김치찌개를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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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소 小素笑 - 진짜 나로 사는 기쁨
윤재윤 지음, 최원석 그림 / 나무생각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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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함에 담긴 에스프레소 한잔의 향기

소소소(小素笑): 진짜 나로 사는 기쁨를 읽고

 

윤재윤(2019). 소소소(小素笑): 진짜 나로 사는 기쁨. 서울: 나무생각.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서삼독(書三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모든 필자는 당대의 사회역사적 토대에 발 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필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입니다. 진정한 독서는 삼독입니다“(266). 신영복 교수님의 처음처럼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는 언제 부터인가 책을 읽기 전에 저자를 먼저 읽어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이나 사연과 배경, 그리고 저자가 걸어온 길을 먼저 읽고 제목을 보고 목차를 훑어본 다음 본문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럼 책의 본문이 마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고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책이 눈으로 들어오고 머리로 생각하며 가슴으로 느끼는 와중에 몸을 통과합니다. 그리고 나를 반성해봅니다. 책을 거울삼아 내 삶을 반추하고 반성하며 성찰해봅니다. 저자의 텍스트가 끝나는 곳에서 독자의 탈주는 시작됩니다. 지금 여기서 안주하는 삶을 탈출하고 새로운 각성의 장으로 옮겨갑니다. 책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나는 이제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변화는 진저리를 동반한다. 독서에는 반드시 몸의 반응이 따른다. 가벼운 바람도 있고 통곡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한겨레 신문에 연재했던 정희진의 어떤 메모’, 정찬의 베니스에서 죽다리뷰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읽기 전의 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이 바로 독서입니다. 한 사람은 이미 한 권의 책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책이 되는 셈입니다. 책이 주는 힘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독서는 한 사람을 이전과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위대한 창조입니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과 접속해서 내 생각도 틀릴 수 있음을 배우는 겸손함도 책이 가르쳐주는 소중한 교훈입니다. 똑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반복되는 익숙한 일상을 보고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같음에서 다름을 보고, 익숙함에서 낯선 의미를 캐냅니다. 책에는 그런 다름과 차이, 낯선 상상과 창조가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항상 나를 넘어서는 지혜가 있다는 믿음, 이를 배우면 현재의 내 삶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199). 사소한 일상에서 만나는 익숙한 사물이나 현상, 사람과의 대화, 지나가다 우연히 만나는 거리의 간판과 문구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며 큰 깨달음을 얻는 윤재윤 변호사님의 소소한 이야기가 심장을 파고듭니다.

 

소소함을 몸소 체험하며 나답게 사는 길, 소소소(小素笑)

 

세상에 사소한 일은 없다. 겉으로 작아 보이는 일이 더 본질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일상의 사소한 일을 보다 정성스럽게 대하면 좋겠다”(207). 사소하면서도 평범한 일상을 비상하는 상상력의 텃밭으로 바꿔주는 깨달음의 향연이 곳곳에서 펼쳐집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행동한 것 중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얼마나 많을까? 오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에게 섭섭해 하고 비난하는 것이 불행과 다툼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겨울 숲길에서 들었던 작은 소리가 나의 굳은 사고방식을 새롭게 점검해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111). 늘 생각을 반추해보고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관조하는 자세가 습관적으로 살아가면서 자기 삶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원동력인 셈입니다. 사소함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곳에서 희소가치를 발견하고 창조하는 저자의 삶에서 사색하며 관조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몸소 보여줍니다. “읽기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오후 강행군을 마치고 그늘에서 마시는 차가운 샘물과 같은 것이다. 책이 그렇게 읽히는 것이라면 반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215). 사사키 아타루의 이 나날의 돌림노래에 나오는 말입니다. 바쁜 일상을 어제처럼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사색의 샘물이자 죽비 같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작은 울림이 앞산에 반동되어 돌아오는 조용한 메아리처럼 귓전을 때립니다. 책을 읽으며 손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그런 저자의 목소리가 담긴 글에 밑줄을 치며 생각을 거듭하게 만드는 메모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118). 책은 이제 내 몸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나로 재탄생시키는 창조의 과정으로 변신합니다.

 

책 제목이 소소소(小素笑)여서 호기심을 갖고 목차를 보고 본문을 보니 이런 풀이가 나옵니다. ‘소소소’, “바람이 아주 부드럽게 부는 모양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라고 합니다. 머리말에는 이 말의 연원과 배경, 그리고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는 글이 나옵니다.

 

(작을 소), 이는 격을, ()의 뜻도 갖고 있다. ‘조심하다라는 뜻도 있단다. 작게, 적게, 조심스레 마음먹고 행하라는 의미이겠다.

 

(본디 소). ‘꾸미거나 덧붙이지 아니하다’, '바탕', ‘질박의 뜻이다. 아무런 빛깔도 없다는 의미에서 흰빛깔을 뜻하기도 한다. 생긴 대로, 본바탕대로, 꾸미지 않는 마음가짐과 태도를 나타낸다.

 

(웃음 소). 이 글자를 파자하면 '대나무()에서 나는 소리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가 웃음이다. 웃음은 단순히 웃기는 일이 생겨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을 수 있는 마음이 갖추어졌을 때에야 가능하고, 깊은 데서 터져 나오며, 이때 마음이 아래에서 위로 열린다. 아무리 짧은 웃음도 그 순간 하늘의 느낌을 갖게 한다(나무 짧아서 기억하지 못할지라도)“(6).

 

작게, 본디 바탕대로, 웃으며 사는 모이 바람이 부드럽게 부는 모양과 같지 않을까”(7). 책의 제목대로 이 책은 조심하지 않고 큰 것을 탐내는 욕심과 바탕대로 자기다운 색깔을 찾아 살아가야 됨에도 불구하고 과장하고 치장하며 사는 태도,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웃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들과 오늘의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적 메시지를 전합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본 바탕대로 살아가면서 삶의 근원을 깊숙이 보는 지혜”(32)를 만나는 순간 깊은 깨달음의 미소가 나도 모르게 나옵니다.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라는 것이다. ‘잘남이 아니라 나다움이 중요하다...나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삶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75). 오늘의 우리들은 바탕색, 내가 갖고 태어난 나만의 독특한 색깔대로 살아갈 때 색다름이 드러나고 그 색다름이 바로 나다움인데 남다르게. 남들처럼 살아가면서 나만의 바탕색을 잃어버렸습니다. 바탕대로 살아가면 발견하는 진정한 나다움의 매력이 드러날 때 가장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보여주기 위해 앞만 달려가서 성취한 결과가 아니라 나답게 살아가며 가장 나다운 성취를 이루었을 때 나오는 미소(微笑)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요. “외적 경험을 많이 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떳떳함이 없으면 자신의 성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또한 자기에게 정직한 사람만이 참된 힘을 가지고 강해질 수 있다. 자기가 가짜로 산다는 느낌을 갖고 있으면 결코 강건해지지 않는다. 무기력에 빠지는 가장 큰 원인은 자기가 가짜라고 느끼기 때문이다”(83-84). 춘풍추상(春風秋霜),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추상같이 엄격해야 한다라는 말처럼 추상같이 엄격한 자기를 지켜낼 때 비로소 진짜 나로 살아가는 길이 열립니다.

 

판단(判斷)은 칼)로 반()을 나누는 결단입니다

 

사람은 고통 받을 때 변화가 오고 성장하는 것 같다. 힘든 일을 겪을 때 진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알게 되고 내면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 아닐까”(41)와 같은 메시지를 만나면 숙연해집니다. 고통은 스승이다. 큰 기회를 주기 전에 고통이라는 관문으로 사람을 통과시키는 이유다. “가장 큰 배움은 가장 큰 고통 속에 숨어 있는 듯하다”(115). 이 책은 역사적 사건이나 실제로 저자가 고소된 사건에 대해 원고와 피고를 대상으로 판결하는 장면, 승소와 패소, 기소와 출소 등 법조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보고 느낀 점을 진솔하게 들려줍니다.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8).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걸 사회제도나 구조와 연결시켜 성찰하는 역사적 시간을 통해 인간의 존엄함을 깨닫는 미학적 시간이자 은혜의 시간이며 깨우침의 시간을 마련하는 장면이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30여 년 동안 법조인의 길을 걸어왔지만 여전히 부족한 인간의 불완전성과 이로 인한 판결의 위험성을 고백하는 장면을 자주 만납니다. “재판경험이 쌓일수록 재판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다. 다투는 당사자 사이에서 진실을 찾고, 가치가 충돌하는 사안에 관하여 정의를 선언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한계를 넘어서는 것 같다. 인간이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하며 편향성을 가진 존재이며, 인간이 만든 재판제도 역시 불완전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26-27).

 

인간이 인간의 죄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해서 판결을 내리는 과정은 헌 인간의 생사를 가늠하는 막중한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리적 해석만으로는 시비를 가릴 수 없는 진퇴양난의 난국에서도 판사는 판결을 통해 유죄여부와 형량을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각한 고뇌의 그늘이 늘 무거운 책임감으로 짓누르는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판사의 ()’이란 글자도 ()로 반()을 나눈다는 것이어서 저울과 같은 뜻이라고 하겠다”(183). 이 책은 칼로 정확하게 또는 공정하게 반으로 자르듯 판단하기 어려운 딜레마 상황에서 고뇌하는 한 법조인의 진솔한 인간적 고백과 직면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사랑도 같이 읽었습니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을 때 증명과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좁히는 마땅한 대안이 없을 때 판사는 다시 깊은 인간적 고뇌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향기로 기억되고, 그런 향기는 저울로 결코 잴 수 없다. 내가 해온 법의 저울질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결코 최종 해답도 아니었고, 온전한 판단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186). 언제나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가 깊은 자아를 만나 반성합니다. 동시에 다시 밖으로 나와 나의 생각과 행동을 사회 전체 구조나 틀과의 관계 속에서 성찰합니다. “일상 속게 파묻혀 있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고, 일상을 깨고 나올 때에만 일상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28-129). 이런 삶을 습관화시켜온 윤변호사님의 생활은 그 자체가 서릿발 같은 엄정함을 추구함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깊은 배려와 존중으로 촘촘히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음을 실감합니다.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인간지성, 실천적 지혜가 답입니다

 

범죄자는 개인차원의 문제라기보다 그런 개인으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도록 부추기는 사회적 관계나 구조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질환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고혈압에 걸리는 원인은 개인차원의 혈관질환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고혈압에 걸릴 수밖에 없도록 내몰아부치는 스트레스와 억압적 구조에 있다는 것이 사회역학의 진단입니다. 사회역학은 한 개인의 질환은 개인의 육체적이고 생리적인 문제라기보다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제도, 시스템과 문화의 문제라고 봅니다. “사회역학은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질병으로 남긴 상처를 해독하는 학문입니다”(14).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쓴 김승섭 교수의 주장입니다. 그는 이어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22). 물고기가 어떤 바다에 사느냐에 따라 비늘에 생기는 얼룩과 무늬가 달라지듯, 사람이 어떤 사회적 관계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몸에 새겨지는 스트레스와 질병을 일으키는 흔적이 달라집니다. 저자 역시 사회역학과 비슷한 입장에서 범죄도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인간이 노숙자나 범죄자로 전락하는 가장 큰 원인은 개인의 도덕성 결함이라기보다 이러한 모욕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구조에 있다. 상습 범죄자는 가해자이기 이전에 속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피해자인 셈이다”(248). 범죄자로 취급하고 법리를 들이대고 판결을 내리기 전에 피 흘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피고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관계와 구조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법률가는 판례와 판단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기술적 숙련공이 아닙니다. 법률가는 무엇보다도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가치관의 갈등과 사회적 구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범죄행위의 인간적 측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따뜻한 인간미의 소유자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대체해도 딜레마 상황에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슈를 판단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입니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경우에 인공지능이 어떤 판단을 하도록 할지가 어려운 문제이다. 사람이 운전을 한다면 스스로 판단할 것이므로 이런 윤리적 문제는 없다. 아무리 고도의 지능을 쌓아도 가치와 의미를 선택하는 도덕적 판단은 인공지능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다”(105). 법률가가 도덕적 판단을 생략한 채 판례에 따라 기계적으로 판결을 내린다면 인공지능이 법률적 판단을 내리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지, 선한지, 의미가 있는지에 관하여는 인간만이 직관을 갖고 있다”(107)면 판례에 축적된 수많은 빅데이터를 근간으로 판결하는 인공지능이 여전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인간지성 시대에 올바른 법률가가 갖춰야 할 진정한 경쟁력은 풍부한 법률지식과 더불어 다양한 딜레마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혜안과 안목, 그리고 도덕적 판단능력과 지혜입니다. “고통받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이 법률 지식보다 앞서 법률가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냉철하게 판단하는 업무를 하는 법률가에게도 이런 마음이 필수적이라면 다른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필요할 것이다”(152). 저자가 언급하는 법조인의 자세와 태도, 갖추어야 할 자질과 역량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강조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 practical wisdom’)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딜레마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지를 파악해서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올바른 선택지를 숙고하고 결정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입니다. 저자 역시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도덕적 판단력을 꼽고 있습니다.

 

배리 슈워츠와 케니스 샤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를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 직업별로 어떤 점에서 중요한지를 주장하는 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에 보면 실천적 지혜를 특정한 상황에서 능력 단순한 흑백영역이 아닌 특정한 상황이 낳는 미묘한 차이, 즉 회색지대를 간파하는 능력”(36), 또는 내면으로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냉정함객관성을 유지하는 일”(59), 즉 공감하면서도 거리감을 유지해 상황을 편견 없이 공정하게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실천적 지혜를 지니고 있는 진정한 전문가는 의뢰인의 문제를 풀어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전문가가 아니라, 의뢰인과 함께 협력해 문제를 푸는 해결사”(304)가 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실천적 지혜를 갖게 되면 비로소 특정한 환경에서 특정한 대상에게 특정한 시점에 맞추어 올바른 일을 올바로 하는 법을 깨우치는 일”(15)을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저자가 언급하는 판사나 변호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원고나 또는 의뢰인과 피고가 처한 인간적 딜레마,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배경에 공감하고 이해하면서도 거리감을 두고 주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해서 올바른 판단과 변호를 하기 위해서 실천적 지혜를 갖춰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실천적 지혜는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고 배울 수 없다는데 있다. 오직 다양한 딜레마 상황에서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판단착오를 줄여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과거는 다른 사람의 미래입니다

 

그는 도중에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 있듯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었다”(26).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 나오는 말입니다. 부당한 권력의 힘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어떤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조지 오웰의 주장입니다. 그는 버마 정부의 경찰을 그만두고 진정한 작가로 거듭나기 위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로 내려가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의 편에서 폭군들에게 대항하고 싶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밑바닥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바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입니다. 이 책의 끝 부분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언젠가는 그 세계를 더 철저하게 탐구하고 싶다. 우연한 만남이 아닌 허물없는 사이로서 마리오, 패디, 동양아치 빌 같은 사람들을 알고 싶다. 접시닦이, 부랑인, 강변 둑길 노숙자의 영혼 속에는 정말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 지를 이해하고 싶다. 현재로서는 가난의 언저리까지 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284). 가난했던 시절의 아픔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그 어떤 조언도 불가능함을 작가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자의 책 역시 힘들고 아픈 사람, 생사기로에서 마지막 희망을 기다리며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만나면서 건져 올린 잔잔한 감동적 단상입니다. 그들과 공감하려는 측은지심의 한 극단에는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가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과 역사적 사건과의 연계성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무게중심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향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시야의 확대와 상처의 존재다. 시야의 확대가 따르지 않는 성장은 진정한 성장이 아니다. 확대된 시야 없이는 상처를 심미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없다. 동시에 아무리 심리적 거리를 유지해도 상처가 없으면, 향유할 대상 자체가 없다. 상처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 용기가 없어 망설이다가 끝난 인생에 불과하다”(37).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고통을 몸으로 견뎌내며 상처받고 살아갑니다. 한 번 일어선 자리와 높이에서 확보한 시야는 내가 겪고 있는 아픔으로 해석하는 관점을 제공해줍니다. 시야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도 틀릴 수 있음을 전제하고 나와 다른 생각과 세계와 자주 만나야 합니다. 지금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봐야 하고, 나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저자들의 책을 읽어야 하며, 다른 전공과 관심을 갖고 있는 낯선 사람과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런 만남이 아픈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시야를 확장시키고 인식의 깊이를 심화시킬 수 있는 소중한 디딤돌이 됩니다. “내 과거는 다른 사람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예요”(153). 미국의 여자 유도 선수, 케일러 해리슨의 말입니다. 내가 겪은 사소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는 에스프레소 같은 진한 삶의 향기가 들어 있는 감동의 서사가 되기도 합니다. 몸소 겪은 체험은 사소한 깨달음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미래에 소중한 성장의 씨앗이 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서로의 씨앗을 깨워 꽃을 피워줄 기회로 가득 차 있는 꽃밭인 셈이다”(143). 사소()한 일상이지만 진지한 성찰의 반복으로 가꾸어나가는 나의 바탕()이 활짝 웃는, 진짜 나로 사는 기쁨()을 낳습니다

"한 인간이 노숙자나 범죄자로 전락하는 가장 큰 원인은 개인의 도덕성 결함이라기보다 이러한 모욕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구조에 있다. 상습 범죄자는 가해자이기 이전에 속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피해자인 셈이다"(248).

"일상 속게 파묻혀 있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고, 일상을 깨고 나올 때에만 일상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28-129쪽).

"사람들은 향기로 기억되고, 그런 향기는 저울로 결코 잴 수 없다. 내가 해온 ‘법의 저울질’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결코 최종 해답도 아니었고, 온전한 판단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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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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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한 세상이다

당신이 옳다를 읽고

 

정혜신(2018). 당신이 옳다. 서울: 해냄.

 

냉정한 의학 기능공에서 치유자로 변신하기까지

 

세상의 책은 두 종류가 있다. 현장에 가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쓴 책과 현장에서 부딪치며 몸으로 쓴 책이다. 머리로 쓴 책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와닿지 않지만 몸으로 쓴 책은 저자의 치열한 문제의식이 독자의 몸을 헤집고 들어와 감동을 넘어 전율하게 만든다. 노명우 교수가 최근에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 쓴 추천사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온다. 이론과 지식으로 쓴 텍스트에는 논리적 엄밀성이 있지만, 머리가 아니라 살갗으로 파고드는 떨림이 없다. 삶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한 후에 쓴 텍스트에는 논리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무게와 깊이를 담은 진심이 있다. 논리적 글은 두뇌로 쓸 수 있지만 진심이 담긴 글은 삶으로만 쓸 수 있다.” 말 그대로 당신이 옳다는 살갗을 파고든다. 그래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이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읽어버린책이며. ‘읽어내는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읽고 말았다는 표현이 적절한 책이다. 아니 단숨에 읽어버릴 수밖에 없도록 독자의 심리를 끌어당기는 묘한 블랙홀이 곳곳에 숨어 있다. “공감은 생각과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서 나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그 부위에 미사일처럼 정확하게 꽂히는 치유 나노로봇이다”(138). 저자가 정의한 공감처럼 이 책은 이제껏 잘 못 알고 있었던 공감의 본질과 핵심을 파고들어 진짜 치유가 되기 위해서 기울여야 할 노력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지적해준 치유 나노로봇이다.

 

심리적 참전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몸으로 건져 올린 언어와 저자의 문제의식으로 새롭게 정의한 개념에는 저자의 뜨거운 신념이 담겨 있다. “스타는 화려하게 시든 꽃”(38)이라고 하거나 우울은 질병이 아닌 삶의 보편적인 바탕색”(86)이라고 거침없이 선언하는 저자의 신념은 나뒹구는 현장에서 몸으로 건져 올린 신념의 표현이다. “공감은 상처를 드러낼 수 있게 만들고 제대로 드러난 상처 위에서 녹아드는 연고다. 상처 위에 바로 스민다. 상처 부위를 덮고 있는 겉옷 위에 뿌리는 분무제가 아니라 옷을 젖히고 상처 난 바로 그 부위 맨살에 바르는 약이다”(158). 공감을 관념적 언어로 정의하지 않고 저자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공감해본 체험적 깨달음을 갖고 공감은 연고이자 치료제라는 메타포를 동원해서 정의한다. 공감에 대한 정의에 이렇게 공감해본 적이 없다. 개념에 신념을 추가한 정의(定義)는 세상을 정의(正義)롭게 만든다. 정혜신 치유자가 공감가는 공감에 대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공감 없는 정신과 의사,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냉정한 의학기능공에서 숱한 시행착오 끝에 몸으로 깨달은 느낌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한 동안 진료실에서 사람을 환자로 대하면서 약물치료를 주로 했던 자격증 있는 의사였음을 고백한다. 자격증은 있지만 과연 내가 사람을 치유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이 들면서 진료실이 아닌 현장에서 환자가 아닌 사람을 만나면서 각성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각성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치유의 길을 걸어가게 만들었다. 그 깨달음의 결과가 바로 집밥같이 따뜻한 온기를 담았으면서도 고통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위한 실전 무술같은 치유법, 적정 심리학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일상의 회복이나 일상적 교감에 집중하지 않고 전문가적 치유에만 기대는 행위, 그게 일상의 외주화다”(81). ‘일상의 외주화공감의 외주화로 이어지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에서 내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생각은 학원에 맡겨져 있고 몸은 체육관에 가 있고 병은 의사에게 맡겨져 있다 보니 내 감정을 고스란히 내가 느끼고 다른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기회도 없어졌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극복하려는 노력보다 전문가에게 맡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는 내 존재에 주목하지 않고 내 아픔에 마음을 포개지 않는 사람”(73)이라서 그 들이 제공하는 어떤 도움도 와 닿지 않는다. 도움이 되는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관념적으로 생각하거나 진료실에 앉아서 알량한 지식으로 환자를 치유한다고 착각하는 오판에서 벗어나야 했다. “책상머리나 병원 진료실에서 도출된 이론이 아니다. 숨이 멎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의 현장들, 끝없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일상의 상처들 속에서 사람의 속마음을 만나며 그 한복판에서 얻어낸 나의 결론, 나의 경험담, 사례연구집이다. 무술로 치면 품새가 돋보이는 화려한 무술이 아니라 위력이 핵심인 실전무술이다. 이것으로 사람 목숨도 구하고 늪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리기도 했다”(314). 숨이 멎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의 현장들에서 몸으로 체화시킨 실전무술이 바로 저자가 정립한 적정심리학이며 그것의 핵심적인 치유법이 심리적 CPR이다.

 

공감은 봄을 불러오는 일이다

 

심리적 CPR(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즉 심리적 심폐 소생술은 CPR을 사람의 심리적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저자가 새롭게 조어한 개념이다. “심장 압박을 할 때는 두꺼운 옷을 젖히고 옷에 붙은 액세서리도 다 떼고 정확하게 가슴의 중앙 바로 그 위 맨살에 두 손을 올려놓는다. 심리적 CPR처럼 보이지만 가 아닌 많은 것들을 젖히고 라는 존재 바로 그 위를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다”(103). 전두엽을 뒤흔들고 심장에 의미가 꽂히는 이유가 저자가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격전의 현장에서 몸을 통과하며 농축된 감정과 느낌을 언어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단어마다 저자의 숨결이 느껴지고 문장마다 아픈 사람의 절규와 아비규환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머리로 정리한 관념적 파편이 산산이 흩어지는 문장을 만나면 참을 수 없는 인식의 가벼움을 느낀다. 오랜 시간 아픈 사람과 뒤엉켜 지내면서 신체적 감각으로 깨달은 저자의 언어에는 삶과 사람에 대한 깊은 고뇌가 담겨 있다. 어느 하나의 문장도 그냥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밑줄을 치고 호흡을 멈춘 다음 저자가 겪었을 당시의 현장 모습을 추체험해본다. 피와 땀과 눈물의 언어는 그 자체로 감동이다. 진심이 담긴 문장이 심장을 뛰게 만든다. 진심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몸밖에 없다. 몸이 겪은 진심을 머리로 설명할 수 없다. 몸으로 증거하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정신과 의사가 창백한 실험실에서 과학적인 검증을 거쳐 재단해낸 논리적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피눈물로 씻어내기 어려운 아픔의 현장에서 고통 받는 사람과 같이 생활하면서 땀과 눈물의 합작품이다. 체중이 실린 언어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실려 독자에게 전달되는 이유다.

 

공감 받으면 마음에 봄이 온다. 강물이 꽁꽁 얼었을 때 얼음을 깨겠다고 망치와 못을 들고 나선다면 어리석다. 망치와 못을 들고 나서는 것은 판단, 평가, 설득 같은 계몽을 하는 일이다. 힘만 들지 온 강의 얼음을 다 깰 수는 없다. 봄이 오면 강물은 저절로 풀린다. 공감은 봄을 불러오는 일이다”(169).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 말기 암 선고를 받은 환자의 불안과 공포, 은퇴로 맞닥뜨린 무력감과 짜증,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아이의 아픔을 공감하기 전에 의학적으로 진단을 내린다. 공감하면 새로운 치유의 길, 얼었던 강물도 녹여 봄이 오게 만들 수 있지만, 봄이 오기 전에 첨단 의학적 진료와 치료가 이루어진다. “우울과 불안을 뇌신경 전달 물질의 불균형이 초래한 우울증 탓으로 돌리는 전문가들을 비정하고 무책임하다고 일갈한다. 대신 이런 증세들은 흔하게 마주하는 삶의 일상적 숙제들이고 서로 도우면서 넘어서야 하는 우리 삶의 고비들”(91)이라고 말한다. 똑 같은 우울증이자만 저마다 느끼는 아픔과 슬픔의 깊이와 넓이는 판이하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횡포이자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칼날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만들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서구의학의 치명적인 한계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내 몸을 의사와 전문가에게 맡겨놓고 치료대상으로 병원에 던져놓는다. 몸에 생긴 질환(disease)이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질병(illness)에 대한 심리적 충격과 아픔은 제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몸과 맘에 생긴 모든 아픔을 의학계가 과학적으로 분류한 질환으로 일반화시켜 모든 환자를 질환 유형별로 일반화시켜놓고 치료하려고 한다.

 

우울증 진단을 내릴 때 원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만을 중심으로 하면서, 진단이 확정되면 갑자기 우울증은 생물학적 원인으로 생기는 거라며 약물치료가 전부인 것처럼 말한다(98). 같은 우울증 환자라고 해도 주관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고통의 강도는 다를 텐데 말이다. 아픈 몸을 살다의 저자 아서 프랭크에 따르면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의 개념적 차이점을 분명히 구분해야 된다고 한다. 질환은 체온, 혈압, 혈당 수치나 피부상태를 생리학적으로 환원하여 제시하는 의학적인 용어라서 주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치로 환산된다. 반면에 질병은 질환을 앓아가면서 환자가 느끼는 공포와 절망,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처럼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다.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의학적으로 위암이라는 질환은 한 가지 용어로 지칭할 수 있지만 위암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나 병력,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환자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주관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 문제는 의사가 환자를 진료할 때 질환으로 구분되는 몇 가지 범주로 나눈 다음 다른 환자도 그 범주에 집어넣어 일반화시켜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데 있다. 의사는 환자를 그 동안 쌓은 전문 지식으로 진단하고 약으로 치료한다. 의사는 환자의 몸이나 표정 등 감정상태의 변화보다 병력을 나타내는 데이터에 근거해서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변화를 보고 약을 처방해준다. 심지어 어떤 의사는 환자의 얼굴을 보지 않고 컴퓨터 스크린에 나와 있는 데이터만 처방해준다. 의사는 환자 으로 다가가지 않고 에서 약으로 통제하고 조정하며 관리한다.

 

하지만 똑 같은 병명으로 판정되어 비록 같은 질환의 범주에 포함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질병은 같지 않다. 때문에 질환을 범주로 나누고 일반화시켜 치료하는 과정에는 유용하지만 환자 곁에서 그들이 겪고 있는 주관적 아픔을 돌보는 치유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환자가 동일한 질환에 대해서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 걱정과 불안감은 다른 환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나는 나의 병을 객관화하지 못하고 대상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젊은 의사는 기어코 나의 병을 객관화하고 대상화하려고 덤빈다. 아마도 나의 병을 대상화시키지 않으면 의사는 나의 병을 손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옷을 치켜 올리고 의사에게 내 맨몸을 맡길 때, 나는 내 병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 나의 이 속수무책을 슬퍼한다. 나의 병은 나의 개별적 생명현상인 것이다. 나는 젊은 의사에게 이 운명의 개별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39).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말이다. 개별적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그 사람을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로 취급하지 말고 질병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대하는 방법이다. 사람을 그 사람의 존재이유로 다가갈 때 그 사람은 존재감을 느끼며 자신의 곁에 있어도 좋다고 허락한다. 많은 전문가가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 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에서 서성이다 쫓겨난 이유도 한 사람이 겪고 있는 아픔을 마음으로 공감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감하려면 가까이 다가가서 몸으로 반응해주어야 한다.

 

에 다가가지 못하고 에서 서성거리는 이유

 

김소연의 한글자 사전에 따르면 “‘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 그 사이의 영역. 그러므로 나 자신은 결코 차지할 수 없는 장소이자, 나 이외의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장소가 곁”(31)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전문가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에 관한 거리감이라고 한다. ‘에서 으로 다가가려면 머릿속의 지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더 넓혀놓는다. 심지어 벽을 만들어 접근 자체가 차단되기도 한다. ‘에서 으로 다가가려면 상대방의 고통에 눈길을 포개는 섬세한 뜨거움(12)”이 몸으로 전해져야 한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이 습득하고 있는 자격증에는 머리로 축적한 지식을 증명할 수 있지만 현장에서 가슴으로 공감한 내력은 증명할 길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 받는 사람 옆에서 지켜보거나 위에서 관망한다. 전문가도 고통 받는 사람 으로 오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을 에서 주다가 쫓겨난다. “왜 심리치유 전문가일수록 현장에서 실패하는가”(15). 전문가 자격증은 있지만 위기의 현장에 뛰어들어 정작 문제 자체가 무엇인지, 지금 당장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 불을 끌 수 없는 똑똑한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통 받는 사람 으로 가지 못하고 에서 서성이며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을 주다가 현장에서 도움이 되는 도움을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하고 쫓겨난다. 상처로 드러난 결과를 치료하기에 급급하다 오히려 상처를 더 아프게 만드는 전문가는 전문적으로 문외한일 수밖에 없다.

 

내 상처의 내용보다 내 상처에 대한 내 태도와 느낌이 내 존재의 이야기다. 내 상처가 가 아니라 내 상처에 대한 나의 느낌과 태도가 더 라는 말이다”(105). 그런데 전문가는 겉으로 드러난 외상(질환)을 치료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 상처와 함께 어떤 아픔과 슬픔(질병)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 왔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말 못할 사연이 사건과 사고 속에 꽈리를 틀고 잠복하고 있다. 사연에 담긴 아픔은 의학적인 치료대상이 아니라 심리적 돌봄의 대상이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다.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과연 자격이 있는가? 자격이 있을지 몰라도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인격은 있는가. 자격과 인격에는 쉽게 건널 수 없는 다리가 존재한다. 자격은 있지만 인격이 없는 이유는 공부를 책상에서 머리로 하면서 지식을 쌓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아픔을 몸으로 체험해보지 않고 책상에서 지식을 축적해서 자격증은 땄지만 격전의 현장에서 뛰어들어 고통을 품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자격으로 폼은 잡아보았지만 타자의 아픔을 품어본 적은 없다. 자격증으로 폼 잡는 전문가와 따뜻한 가슴으로 아픔을 품어주는 전문가 사이는 똑 같은 전문가지만 격이 다르다. 고통을 마주하면서 겪은 저자의 언어는 묵직한 체중이 실려 있다. 머리로 조제한 단어가 아니라 몸으로 직조한 개념의 향연이 생생한 체험현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문장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의 언어는 거기서 벼랑처럼 끊어진다. 길을 잃는다. 그 이상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사건이 풀리지 않을 때 현장을 다시 찾는 수사관처럼 내 언어가 끊어진 벼랑으로 돌아가 보자. 현장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해줄 말이 필요치 않다”(107).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하려 들지 말고 그로 하여금 말할 수 있도록 물어봐주는 것이다. 대답이 없어도 온몸으로 같이 공감해주어야 한다.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인 요인이다. 말이 아니라 내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다”(108). 눈길, 숨길로 상대를 이불처럼 감싸주며 상대의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고통은 고통 그 자체도 괴롭지만 그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든다. 자기가 겪고 있는 것을 제대로 말 할 수 없으니 미칠 수밖에 없고 상대가 제대로 알아주지 않으니 팔짝 뛸 수밖에 없다. 미치고 팔짝 뛰면서 더 말을 쏟아내지만 그때마다 그가 느끼는 것은 더 큰 답답함이다. 도저히 말로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226).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직접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고통을 직접 체험할 수 없지만 고통을 겪으며 겪었던 외로움과 서러움, 말못했던 울분과 분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람과 함께 감정의 강물을 건널 수는 있다. 그 동안 겪었던 고통(苦痛)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孤通)이었는지를 진심을 담아 들어주고 눈길을 맞추며 가슴으로 느끼는 공감의 연대를 이룰 때 상처받은 사람은 고통의 나락에서 서서히 현실로 나와 우리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온다.

 

공감자가 아니면 전문가도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핵심은 “‘가 흐려지면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39)는 것이다. 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한 이유다. 존재감이 가벼워지거나 무력해질 때 사람은 병들기 시작한다. 이 병을 치유해주는 방법은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45). 상대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방법은 공감이다. “그런 마음이셨군요. 그러셨군요.” 온 체중을 실어 깊은 마음으로 전해주는 당신이 옳다는 공감이다. “사람은 자기에게 공감해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47). 반응(response)하는 사람이 책임(responsibility)지는 사람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의 미묘한 감정변화에도 반응해주며 나는 네 편에서 생각해주는 것이다. 진정한 생각은 혼자 진공관에서 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평범한 인간이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근원도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타자가 얼마나 고통을 겪을 것인지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래서 진짜 생각은 뇌세포의 화학적 움직임과 조합으로 발생하는 과학적 추론이라기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측은지심이다. “생각은 잊지 못하는 마음이자 가슴 두근거리는 용기다“(20). 신영복의 담론에 나오는 말이다. 생각이 마음이고 용기가 되려면 생각은 머리보다 가슴에서 시작해서 가슴으로 끝나야 한다. 그래야 계산을 시작하지 않고 수지타산을 따져 행동의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감자가 되려면 머리로 작성된 처방전을 제공하거나 자신이 만든 정답을 주기보다 진심으로 물어봐야 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는 공감자가 되기 위해선 그 마음에 대해 에게 물어야 한다. 돕는 자로서의 견해를 말하거나 주장하기보다 에게 주목하고 그의 마음에 대해 그에게 물어야 한다. 그의 세세한 속마음은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전문가가 알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비로소 그에게 질문을 시작할 수 있다. 그만이 아는 그의 마음에서 혼돈을 끝낼 그만의 길이 나온다. 당사자가 그것을 속속들이 느끼고 만질 수 있을 때까지 그의 손을 놓지 않는 것이 공감자의 일이고 그것이 치유다”(153). 공감자가 되려면 강건너에서 크게 소리쳐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거나 아니면 위급한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 “상처와 혼돈 속에 있는 사람에게 길 건너에서 전문적이고 일방적인 답을 전해주는 사람은 공감자가 아니다. 공감자가 아니면 전문가도 될 수 없다. 그런 방식으로는 상처 있는 사람을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151). 마음을 열지 않고 머리에 설명을 쏟아 부으면 무거운 머리로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자기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 “사람 마음은 외부에서 이식된 답으로는 절대 정돈되지 않는다. 답은 밖에서 오지 않고 언제나 내 안에서 발견돼야 내게 스미고 적용된다. 자기가 처한 상황의 실체, 자기 마음의 실체를 하나하나 또렷이 보고 느끼면서 자기 상황에 대한 심리적 조망권을 확보해야 마음이 정돈되기 시작한다. 온몸, 온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진짜 아는 일이며 그렇게 알아야만 혼돈에서 벗어날 길이 보인다”(151-152).

 

사람은 옳은 말로 변화되지 않는다

 

삶을 살아내는 자들은 삶을 설명하거나 추상화하지 않는다. 그는 끝없이 짓밟히고 빼앗기는 일상의 현실을 견딜 수 없는 자이고, 그 야만의 현실에 대해 야만의 방법으로 대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건설하는 자라기보다 거부하는 자이고,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정당한 자리를 확보하려는 자이다. 이념이나 추상이 얼씬거리지 못하는 자리에서, 삶의 구체성은 뒤엉켜 들끓고, 힘찬 무질서들로 생동한다”(46).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나의 기준으로 계몽하고 훈계하지 말고 진심을 담아 반응해주며 공감해주는 길이 소통의 지름길이다.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294).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충고, 조언, 평가, 판단한다. 충조평판이 시작되는 순간 소통은 불통으로 바뀌고 상대는 마음의 문을 닫고 문고리가 열리기 않도록 굳게 문을 걸어 잠근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 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295). 바른 말은 요즘 말로 하면 꼰대가 아랫사람에게 자기 경험과 지식으로 충고하고 조언하는 말이다. “사람은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를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239).

 

공감이란 제대로 된 관계와 소통의 다른 이름이다. 공감이란 한 존재의 개별성에 깊이 눈을 포개는 일, 상대방의 마음, 느낌의 차원까지 들어가 그를 만나고 내 마음으로 포개는 일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도 내 마음, 내 느낌을 꺼내서 그와 함께 나누고 소통하는 일이다”(247). 소통하고 무수한 인간관계를 맺어왔지만 결정적인 한 가지가 빠진 인간관계 위에서 소통을 해왔다, 소통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소통이 되지 못한 이유는 공감 없는 소통이었기 때문이다. 공감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그 이해를 기반으로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진정한 공감에 이르는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그래서 궁금한 점을 진심을 담아 물어봐야 한다. “고름이 가득한 상처를 소독한 바늘로 터뜨리듯이 그때 네 맘은 어땠는데?“라는 엄마의 질문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아들의 마음에서 고름을 터뜨리는 질문일 수 있다. 누르고 눌러놓았던 속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엄마의 마음은 애쓰지 않아도 아들 마음에 스미게 된다”(267). ‘고름을 터뜨리는 질문’, 폐부 깊숙이 와닿은 인두 같은 메시지였다. 질문을 던지고 기다리면 고름이 터지듯 쌓였던 고통의 응어리가 밖으로 튀어나온다.

 

고름을 터뜨리는 질문으로 상대의 비무장지대를 건드리고 온몸으로 들어주며 공감해주면 닫혔던 마음의 길도 열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공감은 닿을 수 없는 신기루가 아니라 길목마다 흐르는 현실의 옹달샘이 된다”(249). 그 옹달샘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공감은 누구나 노력하면 만날 수 있는 현실의 옹달샘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감은 온몸을 갈아가며 자기 성찰을 하는 과정”(236)이기도 하다. 언제나 내 마음을 열어놓고 내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 위에 상대를 한 세상의 우주로 맞이해야 한다.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 것이다. 근사한 수식이나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신비한 팩트다. 사람은 그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개별성 끝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세상의 전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그래서 누구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 수 있다”(110). 저자는 치유자는 다정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공감이 필요한 순간에는 온 체중을 다 싣는 다정한 공감자여야 하지만 공감을 방해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마주했을 때는 전사처럼 싸워야 한다”(210). 이런 사람이 바로 다정한 전사. ‘다정한 전사다정따뜻한 가슴(warm heart)’으로 상대를 존중해주는 배려이고 전사차가운 머리(cool head)로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이라는 생각이 든다.

 

읽어버렸으니 읽은 대로 쓰고 쓴 대로 혁명을 일으키다

 

 

그들은 읽었습니다. 읽어버린 이상 고쳐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쳐 읽은 이상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기 시작해야 합니다. 반복합니다. 그것이, 그것만이 혁명의 본체입니다”(196).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읽어버린 이상 다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내 삶의 무대 위에서 교본으로 다시 읽고 읽은 대로 쓰고 있다. 쓴 대로 내 삶으로 옮겨 나부터 공감혁명을 일궈나갈 것이다. 독서는 그냥 책읽기가 아니라 몸으로 읽고 실천하며 나를 바꾸고 주변을 변화시키는 혁명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위험한 행위다. 책은 사람으로 하여금 위험한 생각을 잉태하게 만든다. 위험한 생각을 품은 책을 읽은 이상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위험한 행동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지금부터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심리치료자나 정신과 의사에게 필요한 공감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모든 관계와 소통 사이에서 반드시 공감에 관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읽어야 될 필독서가 아닐 수 없다.

 

냉정히 말해서 지식인이란 고통의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고통의 곁에 잠시 머무르는 사람이다. 지식인들은 고통의 곁에서 연구하며 그 연구가 끝나면 언어를 회수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언어가 고통의 자리에,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식인의 자리는 고통의 곁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실이며 서재이다. 아무리 현장을 누비는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290).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당신이 옳다를 읽으면서 저자가 온몸으로 길어 올린 고통체험의 교훈이 진료실이나 연구실이 아니라 심리적 참전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나왔음을 여러 번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다시 창백한 진료실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심리적 참전이 벌어지는 격전의 현장을 맴돌며 아픔을 치유하는 심리적 CPR을 시행하고 있다. 나는 그 동안 너무 안이하게 연구라는 명목으로 현장에 다가갔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을 갖고 일방적인 계몽과 훈계를 해오지 않았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해보았다. 고통의 곁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고통의 옆에서 관찰한다는 명목으로 관망하고 관전해오지 않았는지 연구자로서의 나 자신의 정체성에 자문해보고 있다. 치열한 싸움으로 익힌 저자의 현장무술에 비하면 여전히 갈 길이 먼 이상적 담론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다가가야 현실을 만날 수 있고 현실 속에서 진실을 캐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몸에 아로 새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서로가 서로에게 연인이자 스승이며 도반이자 반려자인 두 사람이 공감하면서 고통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합작품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비가 바람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밀어붙여 나는 퍼부을 테니.

 

로버스트 프로스트의 쓰러져 있다시의 일부로 에필로그를 대신한다. 한 사람이 비가 되면 또 한 사람은 바람이 되고, 한 사람이 바람이 되면 또 한 사람은 비가 되어 밀어붙이고 퍼부으면서 고난의 동행을 자처하며 만들어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을 믿고 밀어붙이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믿고 퍼붓는 아름다운 관계, 그 속에 공감이라는 강이 흘러 우리 모두 바다로 가는 희망과 용기의 연대, 바다에 이르러 손잡고 하늘로 기상하는 수증기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꿈꾸는 눈물겨운 공동체가 되기를 꿈꾸어 본다.

"공감은 상처를 드러낼 수 있게 만들고 제대로 드러난 상처 위에서 녹아드는 연고다. 상처 위에 바로 스민다. 상처 부위를 덮고 있는 겉옷 위에 뿌리는 분무제가 아니라 옷을 젖히고 상처 난 바로 그 부위 맨살에 바르는 약이다"(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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