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 - 대청 외교와 『열하일기』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 서가명강 시리즈 16
구범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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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후 200년이 넘는 긴 시기 동안 명나라는 조선에 있어 태양 같은 존재였다하늘의 뜻을 받든 대국 명나라의 어진 황제가 있기에 소국 조선이 존재했다이에 더해 왜란 당시 명의 재조지은이 없었다면 나라가 망했으리라 생각했으니응당 조선은 명을 떠받들고 그들의 문화를 숭상할 수밖에 없었다. 17세기 초반만주 지역 후미진 곳에서 발흥한 누루하치를 중심으로 한 여진곧 후금이라 칭하는 이들의 등장은 조선의 자부심의 원천인 중화()-소중화(조선)’라는 관계를 근본부터 흔들게 된다. ‘1780이란 특정한 해가 이 책의 핵심이지만이 책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청(후금)과 조선의 관계가 설정된 17세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으로 인한 조선의 패배와 치욕적인 군신 관계의 성립그리고 뒤이은 청의 입관(1644)과 명나라의 멸망은 조선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흔들었다오랑캐인 청과 맺은 군신 관계는 그 이상 치욕적일 수 없는 수치 중의 수치였다중화인 명이 멸망했으니조선은 기댈 곳이 없었다그러나 명나라의 치세가 곧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인조 이후 왕들에게 있어 반청의식은 기본이되중화를 보존하는 것은 소중화인 조선의 도덕적 의무조선의 역사적 사명이기도 하였다(59p). 그러나 청나라의 위세에 반하는 행위를 할 수는 없었다해마다 조공 사절을 꼬박꼬박 파견하였다그러나 그들은 청에서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1637년 청과 치욕스런 군신 관계를 맺은지 벌써 140년이 훌쩍 지난 1780인조 이후 효종,현종숙종경종영조에 뒤이어 정조가 왕에 오른지(1776)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저자 구범진 교수는 이 해에 초점을 맞추어조선-청 양국 관계에 변화가 있었음을 논증한다. 1780년은 바로 건륭이 열하에서 벌인 칠순 축하 잔치가 있던 해이다주목할 점은 이 해에 기존 조선이 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던 방식(뒤늦은 축하)에서 벗어나 박명원을 필두로 한 진하 특사’ 파견이라는 특별한 방식의 축하를 하였다는 것이다그리고 건륭은 이에 전례 없는 치하와 선물로 자신의 칠순 잔치 축하에 화답한다이에 더해 이 사행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박지원’(박명원은 그의 팔촌 형이었다)이다.

 

진하 특사의 수장인 박명원은 건륭의 소개로 축하 사절 중 한 명인 티베트 불교 세계의 활불인 판첸 라마를 접견하고 그가 준 금동불상(금불)’을 받아온다(한양까지 가지고 들어오진 않는다). 이 일이 조선 정계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게 된다조선 왕의 대리자가 사교(불교)의 상을 받아왔다는 유생과 관료들의 지탄을 받게 된 것이다구범진 교수는 이 사태에 관련하여 당시 사행 여정의 견문을 소상히 기록하고 박명원이 금불을 받아오는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살피는데, (저자 자신이 하이라이트라고도 표현하고 있듯이 이야기를 다루는 3,4부는 증거들(그 당시 일을 다룬 사료들)을 바탕으로 한 영민한 탐정의 치밀한 추리를 읽는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이를 통해 저자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시간 착오를 유도하는 치밀한 구성을 통하여 박명원이 금불을 받아올 수밖에 없었음을 논증하여 그를 변호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마지막 5부는 조선,청의 외교 관계로 이야기를 돌려 1780년 이후 조선의 사신들이 왕이 주재하는 각종 연회에 초대받는 등 그 대우가 달라진 연유를 청의 시각에서 따져 본다당시 소국 조선이 대국인 청을 받드는 것(사대)과 청이 조선에 관심을 보이고 보살피는(자소), 즉 사대자소의 외교 관계는 불가분의 상호 의무관계였다(291p). 연유야 어쨌든 진하 특사 파견 후 조선에 대한 청의 태도가 더욱 좋아졌다는 사실은 조선에 있어 호기였음이 분명하다하지만 청특히 건륭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태도는 외번 및 외국과의 관계 전체와 관련된 큰 그림일 뿐이었다(301p). 조선에만 특별한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 유구,남장,섬라 등 다른 나라에도 마찬가지 혜택을 베풀었던 것이다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의 처지에서 볼 때 이러한 환대는 조선 사인들에게 당시에도 널리 퍼져 있던 청에 대한 이식에 큰 변화를 일으켰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두껍고 분량이 많은 책은 아니다(서가명강 시리즈가 그러하듯). 17-18세기 조선-청의 외교 관계를 주로 다루다보니 헷갈리는 용어들도 더러 나오지만구범진 교수의 친절한 설명과 편안하되핵심을 놓치지 않는 글로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읽었다일전에 <<병자호란홍타이지의 전쟁>>을 통해 보여준 탁월한 솜씨를 다시 한 번 느끼는 바이다좋은 책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여 자연스레 다른 책으로 이끌기 마련이다오래전에 읽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마크 엘리엇의 <건륭제>>, 읽다 만 피더 퍼듀의 <<중국의 서진>>, 사놓고 읽지 않은 배우성의 <<조선과 중화>>를 읽어봐야겠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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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2 세트 - 전2권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수잔 와이즈 바우어 지음, 왕수민 옮김 / 부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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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읽는 수잔 와이즈 바우어. 절판되었던 책이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어 더욱 기대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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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2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2
수잔 와이즈 바우어 지음, 왕수민 옮김 / 부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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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스토리텔링으로 전하는 동서양을 포괄하는 중세사 서술의 백미! 중세편2 기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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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1
수잔 와이즈 바우어 지음, 왕수민 옮김 / 부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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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되었 매우 아쉬웠던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역작이 다시 출간! 4세기부터 7세기 중반까지 다루는 첫편. 기대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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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 -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리처드 월린 지음, 서영화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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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유대인 제자들, 네 명을 통해 살펴보는 하이데거 사유에 대한 냉정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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